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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공간이 한눈에 전부 담기는 크기의 방은 성에서만 살아온 그에겐 온통 충격이었다.
주방과 침실, 욕실을 모두 욱여넣은 듯한 작은 방은 둘째치더라도 무엇보다 낮은 천장이 답답함을 배가시켰다. 심지어 손을 뻗으면 그대로 닿을 수도 있었다.
서울 시내에 이만한 가격치고는 좋은 편이라는 걸 야닉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기에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
단 몇 걸음 만에 집 안의 모든 곳을 둘러본 다음에야 방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인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작지만 어수선하지 않게 정리된 물건들. 초록과 우드톤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가구.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폭이 좁은 침대 위엔 크림색 침구가 편편하게 깔려 있었다.
야닉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방안을 빙 둘러보았다.
제인이 한 주임이던 시절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어느 곳 하나 그녀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작은 집은 어느새 아늑하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로 변모해 있었다.
벽 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기다란 쿠션을 보았을 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뭐든 끌어안고 다리를 올리고 자는 습관은 저것 때문이었나.
넓은 침대를 두고도 항상 자신에게 꼭 붙어서 새근새근 자던 얼굴이 아른거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 달콤한 숨결, 꼭 감은 눈이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했다. 제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온함이 찾아왔다.
외투를 벗어 아일랜드 위에 올려놓은 그는 작은 침대에 몸을 뉘고 쿠션을 끌어안았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녀의 체취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래지 않아 야닉은 작은 침대 위에서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가지는 다디단 휴식이었다.
* * *
지이잉.
좌식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리고 남자의 손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이젠 제법 자연스러웠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가 아는 인물이었다.
- 어머, 세상에! 진짜 황자님이에요?
“오랜만이야. 여행은 잘 다녀왔나?”
- 대박! 대박이다, 진짜! 진짜로 지금 재인이 집에 계신 거예요?
야닉은 피식 웃으며 스피커폰으로 돌린 후에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뚜껑을 돌리며 그리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래. 재인이 집.”
아내의 집에 머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야닉은 놀라운 속도로 이곳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 테이블로 돌아온 그가 습관처럼 티비를 켜고 채널을 빠르게 돌렸다. 손이 멈춘 장면은 늘 그랬듯이 드라마였다.
문화를 익히고 배우는 데는 일상생활이 자주 나오는 일일 드라마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전화기를 재차 들어 올렸다.
“세부라는 곳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 세부요? 아… 필리핀 세부. 네. 잠깐 쉬다 왔어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아!
고조되는 음성에 칭얼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필시 박 차장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이일 것이다.
제인이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제 일처럼 기뻐했겠지.
얼마 전부터 종종 느꼈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야닉은 뻐근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 서준이 착하지. 엄마 여깄어. 아니, 황자님 그래서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예요? 설마 여기서 쭉 지내실 건 아니죠?
“글쎄….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대들이 겪었던 고충을 그대로 답습하는 중이야.”
- 황자님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수발들어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큰소리였다. 걱정을 하는 건지 윽박을 지르는 건지 모를 잔소리가 시끄럽게 이어졌다.
- 단톡방 보니까 다들 황자님이랑 놀러 다닐 궁리만 하던데 미래를 생각해야죠. 얼마간은 우리가 케어해 드린다고 쳐도 앞으로는요? 앞으로는 어쩌시려고요? 계획은 있어요?
아. 제인이 말했던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는 게 바로 이거였나.
불현듯 떠오른 기억 속 박 차장은 술에 취해 제인에게 가시 돋친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여자였다. 그 추운 날 얇은 드레스만 입은 제인을 달빛 아래 쓸쓸히 걷게 만든 여자.
선의와 악의의 경계가 모호한 화법에 일순 심기가 뒤틀렸다. 게다가 어쭙잖은 떠보기까지.
야닉의 음성이 급격하게 온기를 잃었다.
“내가 그대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 아니, 그렇게 받아들이면 제가 뭐가 돼요. 저는 단지 걱정이 돼서,
“물론 그렇겠지. 그댈 비난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속이 시커먼 장사치들을 신물 나게 겪었던 야닉은 박 차장과 같은 부류를 잘 알고 있었다. 강한 자에겐 꼬리를 내리고 약한 자 앞에선 턱을 치켜드는 뻔한 족속들.
너무 뻔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라 상대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 온 뒤로 도움만 받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양 선생이 치료비에 생활비까지 전부 부담해 주고 있고, 김유정은 자꾸 뭔가를 집으로 보내더라고. 공 대리는 외출할 땐 자기를 부르라고 해서 종종 만나고 있어.”
- …공 대리 걔는 그냥 황자님이랑 같이 다니고 싶어서 그런 거고요.
박 차장은 한풀 꺾인 채로도 남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과분할 정도로 챙겨 줘서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여차하면 제인이 벌어 둔 돈도 있고.”
- ……네? 설마 재인이 통장…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안 봐도 선명한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야닉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내역을 보니까 8년 동안 꽤 많이 모았더라고. 아내가 근면한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 어, 얼마나 있는데요?
동료들이 아크만을 떠날 때 제인은 그녀에게 전 재산을 넘긴다고 했었다. 박 차장이 돌아와서 곧바로 오피스텔과 재산을 처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장기간 여행까지 다녀왔을 정도니 맡겨 둔 돈처럼 안심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제인이 아등바등 고생해서 벌었을 돈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 전 싹 휘발된 참이다.
“얼마더라. 양 선생에게 빚진 걸 전부 갚는다고 쳐도 제법 많아. 이걸로 다른 이방인들한테도 조금씩 갚아 나가야지.”
- 아니, 저기. 황자님! 그 돈을 왜, 저기, 사실은요…!
“아. 운동 나갈 시간이네. 이제 씻어야겠어.”
- 저희 만나서 얘기 좀 해요! 혼자서 제대로 식사도 못 하실 텐데 제가 음식 좀 만들어서 갈 테니까…!
“오기 전에 연락해. 집 비밀번호가 바뀌었거든.”
간결하게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른 야닉이 저벅저벅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홀로 남겨진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연달아 울려 댔지만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이내 묻혀 버렸다.
잠시 후 오피스텔에서 나온 야닉은 이제는 익숙해진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마지막 진료 때 이제 가벼운 운동 정도는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소식을 들은 공 대리가 그날로 야닉의 몫까지 PT 등록을 해 버렸다. 안 그래도 찌뿌드드했던 참인지라 그도 기꺼이 동의했다.
피트니스 센터는 오피스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거침없이 걷던 걸음은 도로 앞에서 천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신호등 앞에 선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만든 모양이었다.
박자에 맞춰 끄덕거리면서 흥얼거리는 젊은 남자, 마주 보고 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의 표정이 해맑았다.
‘캐럴’이라고 부르던가. 티비에서 비슷한 선율을 들었던 것도 같다.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유려한 가창력보단 그녀가 부르는 가사가 오히려 귀에 꽂혔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며 오로지 당신만을 기다린다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랑 노래.
‘산타, 내가 정말로 필요한 걸 가져다주지 않을래요?’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어쩐 건지.”
두 달이면 충분히 기다린 것 같은데, 혹시 요새에 남아 있던 귀환석을 잃어버린 건가. 아니면 돌아갈 몫까지 가져오겠다고 또다시 취발론에 들어가기라도 한 걸까.
제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잘못되었다면.
크게 다치거나 저번처럼 초주검으로 돌아와서 며칠씩… 아니, 이번에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야닉은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서 흩날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았다. 얼굴에 닿아서 녹아내린 눈은 빠르게 얼음장 같은 물로 변했다.
피부가 따가울 만큼의 추위조차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호등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산타, 내가 정말로 필요한 걸 가져다주지 않을래요? 내 연인을 내게 보내 줄 순 없나요?’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하디흔한 사랑 노래가, 잘 버티고 있던 자신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새 계절을 맞이했다.
공기는 한층 더 매캐해졌고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은 그저 새카만 어둠에 불과했다.
기다란 쿠션에서도 단출한 옷장에서도 제인의 체취가 희미해졌다.
어쩌면 이미 사라진 것을 억지로 기억해 내려는 의미 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야닉은 관성처럼 제인의 옷가지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기다란 상흔이 남은 등에선 이따금씩 저릿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어느새 초여름.
테이블과 바닥에 빈 맥주캔들이 쌓여 갔다. 지난달까지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냉장고에 음식을 채우고 집을 정리해 주던 박 차장이 이사 준비로 바쁘다고 발길을 끊은 집은 금방 어수선해졌다.
부재중이라는 화면만 잔뜩 떠 있던 전화기는 언제부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작동을 멈춰 버렸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지겨워졌고, 앞날을 계획하려던 의지도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하루하루 의미를 잃어 갔다.
제국의 황자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시즈가 봤다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었을 테고 어머니가 봤다면 실망을 금치 못하실 것이다.
자조적으로 쓴웃음을 짓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제기랄…….”
왜 데리러 오지 않을까. 궁금증은 이제 그녀가 살아 있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결핍. 야닉 리버스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던 그 말이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통째로 그를 집어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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