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48화 (14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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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누군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 댔다. 거친 노크 뒤엔 다급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황자님! 계세요? 문 좀 열어 보세요! 황자님!”

야닉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손잡이를 돌렸다. 무게감 없이 열린 문 너머로 양승원과 박 차장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신고하려고 했잖아요.”

“어휴, 술 냄새! 이게 무슨 일이야!”

박 차장이 코를 확 틀어막더니 그대로 야닉을 밀치고 거침없이 들어왔다.

맥없이 비틀거리던 야닉이 싱크대로 가서는 손바닥에 수돗물을 받아 목을 축였다. 겨우 잠이 들었던 터라 갑자기 일어나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괜찮아. 안 죽었어.”

아직은. 야닉은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낮게 읊조렸다.

언제부턴가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몽롱한 상태여야만 제인의 얼굴이, 체취가 떠올라 소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 여자는 왜 흔해 빠진 사진 하나 없는 걸까.

초상화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생생한 모습을 담아낼 수 있는 문물이었다. 작은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다면 늘 품에 지니고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었을 텐데.

널브러진 술병들 사이를 가로지른 박 차장이 꽁꽁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6월에 막 접어든 미지근한 공기가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황자님 술 세지 않았어요? 그 독한 벌꿀주도 멀쩡하게 마시던 분이 왜…….”

“그때는 마력을 쓸 수 있었으니까.”

벽에 등을 대고 비뚜름하게 선 그가 느른한 얼굴로 대꾸했다. 삶의 의지마저 저버린 듯한 태도에 양승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하고요.”

“이런 때…….”

야닉은 미끄러지듯 천천히 주저앉았다. 어쩌면 무너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광경이었다.

“맨 처음 귀환석을 보여 줬을 때 제인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어.”

바닥을 정리하던 박 차장의 손이 멈칫했다.

“그때는 가벼이 여겼는데 막상 와 보니까 완전히 별세계인 거야. 이 좋은 세상을 두고 굳이 불편하고 위험한 곳에 남겠다는 이유가 뭘까. 처음에는 몰랐던 게 이제는 이해가 돼.”

무어라 더 말하려던 입술이 달싹이다가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대들이 돌아갔을 때 제인이 많이 울었어. 그리고 날 가족으로 받아 달라 했더니… 또 울더군.”

“황자님…….”

“그때 깨달았어. 잊고 싶은 과거 때문에 아크만에 남기로 한 게 아니야. 제인은 내내 외로웠던 거야.”

만난 지 고작 반년에 불과한 인연에 모든 걸 버릴 수도 있을 만큼, 그 여자는 외로웠구나.

그래서 어디든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구나.

“어리석게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고.”

허울뿐인 결혼 허가를 받겠다고 수도에 가 있는 동안 세레나가 돌아와 제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뒤끝 없이 이혼장을 받아 내겠다고 델피온으로 가는 길엔 이한율에게 납치를 당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때라도 그녀에게 바로 돌아갔어야 했다.

마침내 성으로 갔을 때 세레나와 이야기를 하고 오라는 말을 듣기보단 그녀를 따라가 안아 주었어야 했다.

다른 건 전부 필요 없다고, 그대만 있으면 된다고 꼭 안아 주어야 했는데.

뒤늦게 제인에게 갔을 땐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눈을 뜨지도 못하는 여자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입을 맞추는 일조차 진작에 그리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온통 후회뿐이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외로움조차 자신에겐 사치다.

“그냥 그뿐이야…….”

무릎 아래로 고개를 떨군 야닉이 한참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들어 온 땅거미가 방안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손님들이 돌아간 작은 집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박 차장의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어느 맑은 날의 오후였다.

- 황자님 집이세요? 저 지금 가고 있으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요! 엄마, 빨리 좀 가봐!

- 얘, 우리 지금 벌금 10만 원도 넘게 물게 생겼어. 아무리 그래도 규정 속도는 준수해야지.

- 지금 벌금이 문제야? 아무튼, 황자님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모친과 함께 차를 타고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은 야닉은 일어난 김에 샤워를 하고 어질러진 집을 대강 정리했다. 마실 게 있었나, 냉장고를 열어 본 그가 페트병에 든 레모네이드 음료를 꺼냈다.

싱크대 선반에서 머그잔을 내리고 있을 때 때마침 인터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

“황자님!”

다짜고짜 들이닥친 박 차장이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게 아니었나 잠깐 생각할 때 그녀의 모친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작달막한 김유정과 비슷한 시선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저… 안녕하세요. 혜진이가 그동안 와, 왕자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박 차장의 모친은 말하면서도 이상한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혜진이가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실종됐을 때 래미탄이랬나. 그쪽에서 돌봐 주셨다고…. 정말… 무슨 소린지.”

누가 봐도 믿지는 않지만 적당히 말을 맞춰 주려는 태도였다.

진짜라니까! 모친의 팔을 찰싹 친 박 차장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황자님, 얼른 짐 챙겨요.”

“무슨 일인데?”

멋대로 옷장을 열고 캐리어를 꺼내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욱여넣던 박 차장이 퍼뜩 고갤 돌렸다.

“아니지. 이딴 걸 가져가서 뭐 해.”

엉망으로 헤집어 넣은 것을 도로 꺼내더니 초조하게 발을 굴린다. 현관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휴. 실은 우리 애가 얼마 전에 이혼하고 시댁에서 나왔는데…. 짐 정리를 하다가 이걸 발견해서요.”

여인이 알록달록한 아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열었다.

“새집도 혜진이가 래미탄에서 가져온 보석들을 조금 팔아서 산 거였거든요. 얘가 실종된 상태에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난 건 합의금이 많이 안 나오더라고요. 보석을 팔아 보니까 얘가 했던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네요.”

이혼이니 합의금이니 어쩌고저쩌고하는 뒷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이 작은 돌에 단단히 박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보여 드렸어…?”

그제야 박 차장이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실은… 세레나 공주 방에서 가져온 거예요. 제가 일부러 훔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로…. 우리 서준이가 눈에 밟혀서 제가 잠깐 눈이 돌아서…….”

야닉이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박 차장 앞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커다란 덩치보다도 이글거리는 위압적인 눈빛에 오금이 저렸다. 아닌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공포심에 박 차장은 두 눈을 꽉 감았다.

“헙!”

그녀가 일순 저를 껴안는 단단한 팔에 놀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머! 총각!”

그녀의 모친이 놀라 달려들기도 전에 야닉이 꽉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머리 위에서 고맙다고 이어 말하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박 차장은 그의 팔을 살며시 토닥였다.

‘많이 힘들었구나, 이 남자도.’

올 때만 해도 통장 받을 생각에 신이 났었는데, 갑자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 주임이 좋아하는 것 좀 챙겨서 가세요. 그러고 보니까 걔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네. 하. 나도 참 정 없다……. 이런 걸 두고 면목이 없다고 하는 거구나…….”

어느새 그녀도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황자님은 반년이 넘게 재인이만 기다리고 있는데, 몇 년을 같이 산 제 남편은 제가 없어진 지 석 달 만에 바람을 피웠네요. 벌 받은 거죠……. 이혼에, 양육권에… 사실은 오자마자 세부가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만 내내 들락거렸어요.”

죄책감과 기쁨, 그리고 어리둥절한 각자의 감정이 이른 더위에 녹아들었다.

창밖에선 아침부터 매미가 세차게 울어 댔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남자는 언제부터 매미가 울기 시작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한참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그의 시간이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야닉이 귀환석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분명 과거에 페어리가 자신에게 건네준 바로 그 돌이었다.

「네 거야.」

이 뜻이었나. 손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움켜쥔 그가 주방 선반에서 작은 과도를 꺼냈다.

박 차장과 그녀의 모친이 멍하니 있다가 놀라 펄쩍 뛰었다.

“카, 칼은 왜…?”

“설마 바로 가시게요?”

여기서 가져갈 게 얼마나 많은데! 속사포로 만류하는 박 차장을 무시하고 야닉이 곧장 손가락에서 붉은 피를 내었다.

“그랬다가 늦으면 또 후회할 것 같아서.”

하루라도, 한시라도 빨리 제인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πάλιν.”

“아니, 여기는 어떡하고…!”

시동어를 말하자 귀환석이 붉게 빛나더니 스르륵 몸을 감싸 온다. 이곳으로 왔을 때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기운에 그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양 선생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 빌린 돈은 다 갚았으니 남은 건 그대가 알아서 하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봐.”

“황자님!”

야닉의 모습이 이윽고 홀연히 사라졌다.

허공을 향해 뻗었던 박 차장의 손이 허무하게 떨구어졌다. 연기처럼 흩어진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그녀의 모친이 오도카니 서서 입만 벙긋거렸다.

“세상에……. 너 정말로 어딜 갔다 온 거니…?”

* * *

시각보다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존재감마저 희미했던 마력이 단전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용솟음쳤다.

들끓는 힘에 손끝까지 저릿저릿해 야닉은 이를 사리물었다. 하얗게 점멸되었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여기는…….”

기억 속 어린 시절의 자신이 달려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는 장면이 허상처럼 그려졌다.

돌아온 곳은 2황비궁. 그가 태어난 장소이자, 친모인 브리아나 오웬의 침실이었다.

융단이 깔린 바닥을 그가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황성이다.

감격에 젖어 있을 겨를 따윈 없었다. 야닉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갔다.

“누구냐!”

‘아이노스어.’

얼마 가지 않아 경비병을 마주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병사는 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제국민의 생김새와는 분명 달랐다.

“야닉 리버스다. 아이노스에서 왔나?”

“헉! 제국의 3황자님을 뵙습니다! 태양의 기사단 소속의 종기사입니다! 지금은 임시로 2황비궁에 배정되어 근무 중입니다!”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린 병사가 재빨리 신원을 고했다.

황궁에 머무는 아이노스 병력이라면 시즈가 제위를 얻은 이후일 것이다. 저쪽 세계와 동일하게 시간이 흐른 상태인 건가. 아니면 직후?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님께선 이곳에 계신가?”

“황비 전하께선 지금 델피온에 계십니다!”

델피온?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가 다치기 직전에 세웠던 계획을 떠올리고는 불현듯 몸을 굳혔다.

“황제가 즉위한 지 얼마나 됐지?”

“예? 아마 반년 정도가 지났을 겁니다!”

멈춰 있길 바랐던 시간은 기대를 저버리고 똑같이 흐른 모양이었다. 야닉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즈… 황제 폐하께 고해라. 야닉 리버스가 뵙길 청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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