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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닉이 무사히 병원에 도착해서 치료를 받았을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제인이 허전한 옆자리를 찬찬히 쓸었다. 주인을 잃어 온기가 사라진 침대는 혼자 눕기엔 너무 크고 쓸쓸했다.
그가 사라진 지 사흘째. 정확히는 제 손으로 보낸 지 두 번의 밤이 지난 지금은 죄책감에 함몰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제인은 간단히 씻은 뒤에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본성은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용인들로 북적거렸다. 사망자들의 장례 문제와 더불어 영지 안에 들인 제국군 때문이었다.
사원의 객사에는 귀족 기사들을 배정하고 모자란 숙소는 여관을 무상으로 개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수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내성 밖 농경지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영지 바깥에 세워 두었던 병영을 해체해서 외방벽 안쪽에 다시 세우는 작업은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자다가 마물을 습격을 받지 않으려면 옮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제국군이 무리하게 취발론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에 군량은 물론 다른 보급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본성의 생산직들은 그들이 먹고 덮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손과 발을 움직였다. 음식을 만드는 화구에선 밤새도록 장작불이 타올랐고, 직조실에선 모포와 붕대를 짜느라 쉴 틈이 없었다.
성채 내에 있는 병동은 부상병을 전부 수용할 수가 없어서 연무장에 막사를 세우고 바닥에 모포를 깔아 환자들을 눕혔다. 병동의 인력이 부족해 고령의 신관들까지 병시중에 동원되어 약초를 달이고 붕대를 교체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다친 곳을 치료해 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음에도 일부 군인들은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그리폰이 들이닥치기 전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의 혈육이거나 친우들이었다. 마물에게 당한 것은 어쩔 수 없어도 적군에게 죽은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크만의 영주는 아직 병상에 누워 있고, 가장 두려웠던 3황자는 초주검이 되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증발해 버렸다.
아크만을 대표하는 두 우두머리 대신 마력도 없는 이방인 여자가 엉겁결 권좌에 올랐다. 갈 곳 잃은 분노를 표출하기에 지금처럼 적당한 때는 없었다.
제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연무장에서 환자들을 둘러본 뒤 내성 밖 상황을 살피기 위해 퀴버에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는 하랑과 미르 두 사람과 함께 말을 몰아 성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눈이 얼핏 가늘어졌다. 늘 활짝 열려 있던 강철문이 어쩐 일인지 굳게 닫혀 있었다.
관문 병사에게 이유를 물으려는데, 성벽 위에 있던 종기사 헥토르가 제인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아! 공주님! 저기, 오늘은 그, 시찰을 쉬시는 게 어떨까요?”
“헥토르가 여긴 어쩐 일로……. 로하겔 경께서 와계신 건가요?”
제인이 퀴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물었다. 상대에게서 거짓말에 익숙지 않은 어색함이 풀풀 풍겨 오고 있었다.
“예옙. 그렇습니다. 다위 님도 계시고…. 두 분이 병영을 둘러보고 계시니까 공주님은 그만 들어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예… 예? 아니, 아니요?”
당황하는 헥토르를 보자니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앞을 막고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제인은 뒤를 돌아 하랑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뜻을 알아챈 하랑이 곧바로 당당하게 외쳤다.
“제인 공주님께선 아직 거동이 불편하신 영주님을 대신해서 특별히 영주 권한을 일임받으셨어요. 그 말은 곧 영지 안이라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가실 수 있다는 뜻이죠!”
“그야 물론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길을 막겠어요! 사실은, 로하겔 단장님께서 공주님이 오시면 적당히 둘러대라고 하셨거든요…….”
지레 겁을 먹고 털어놓는 헥토르를 보고 제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유는요?”
“실은… 새벽에 민가에 잠입해서 집에 불을 지르려던 제국 병사 다섯이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성문을 닫아 놓은 상태고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는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헥토르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잡아서 심문을 해 보니까 전사자의 형제들이더라고요. 며칠 전 전투에서 우리 쪽에 가족을 잃어 복수를 계획했다고 합니다.”
“복수…….”
“그래서 다위 님과 기사단장님께서 전사자의 가족들을 전부 축출하기 위해 나가신 겁니다. 화근을 살려 두었다가 오늘 같은 일이 재발하면 곤란하니까요.”
“그렇다고 민가에 불을 질러? 제정신인가, 그놈들은?”
잠자코 있던 미르가 발을 쿵쿵 굴리면서 걸어 나왔다. 거인족의 흉흉한 기세에 움찔한 헥토르가 목을 움츠렸다.
“그들이 잘했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가족을 죽인 원수와 하루아침에 같은 편이 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죠…….”
친동생이 인질로 잡혔던 헥토르에겐 그들의 분개심이 이해가 될 법도 했다. 그렇지만 복수의 대상이 한참 잘못되지 않았는가.
제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목구멍으로 삼켜 한껏 낮아진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제가 직접 봐야겠어요. 안내해 주세요.”
“아, 넵! 알겠습니다!”
절도있게 대답한 그가 서둘러 앞장서서 성문으로 걸어갔다.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철문에 걸린 기다란 잠금쇠가 옆으로 밀려나더니, 말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땅을 고르느라 정신없었는데 벌써 천막들이 들어섰네요!”
하랑이 손날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뒤꿈치를 바짝 들어 두리번거렸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이리저리 패이고 얼룩져있던 땅 위엔 어느새 제국군의 붉은 막사가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양 보란 듯이 제국기를 걸어 놓은 막사도 있었다.
아크만이 언제 제국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제인은 냉소적으로 깃발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군인들은 병영 한가운데에 도열해 있었다. 까맣게 늘어선 병사들 주위엔 무장한 아크만의 기사들과 트라야누스 공격대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방화를 계획했을 것이 분명한 남자 다섯 명이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들 앞에는 팔짱을 낀 다위와 검을 뽑아 든 로하겔 경이 있었다.
“공주님?”
사람들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본 로하겔 경이 제인을 발견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종기사를 다그쳤다.
“헥토르!”
“제가 앞장서라고 했어요. 혼내지 마세요.”
제인이 아래로 굽어가는 헥토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선은 죄인들에게 단단하게 고정된 상태였다.
“저분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고요.”
“공주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보급품 관리도 도맡아 하시는데 범죄자를 처리하는 일 정도는 저희한테 맡겨 주십시오.”
“그래. 아침부터 저녁까지 꽁지가 빠지게 돌아다니면서 이놈들 필요한 걸 챙긴다면서! 그럴 가치도 없는 놈들이라고.”
다섯 명이 앉은 방향으로 침을 뱉은 다위가 괘씸함으로 부푼 가슴을 들썩였다.
“하아…….”
폐에 담긴 공기를 전부 토해 내듯이 한숨을 쉰 제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저분들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반적인 방화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몇 년간 노역을 살게 합니다만, 인명 피해를 노린 방화에는 살인죄가 적용됩니다. 저들은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불을 지르려고 했지요. 이건 공주님께서 반대하셔도….”
“그렇게 하세요.”
“죄송하지만…… 네…?”
진중히 대답하던 로하겔 경이 제가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고개를 들었다. 제인의 무감한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법대로 해야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원칙대로 처리하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저 사람들 말고도 유가족이 있는지 확인한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은요?”
로하겔 경은 한쪽에 따로 격리해 둔 무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크만에 와서 핏줄을 잃은 자는 백여 명 남짓했고, 그리핀이 아닌 사람에게 당한 숫자는 그 가운데 3할 정도였다.
제인은 분노와 슬픔, 혹은 두려움에 떠는 30여 명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이 숨을 쉴 때마다 호흡에 섞여서 전염되는 것 같았다.
저들의 처분은 기사단장인 로하겔 경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지금은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용건은 그걸로 끝이라는 것처럼 돌아서던 제인의 귀에 거친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우리를 살려 줘!”
밧줄에 묶인 다섯 명 중에 가장 덩치가 큰 남자였다. 방화 과정에서 화상을 입었는지 오른쪽 볼이 검붉은 얼굴을 한 남자가 제인에게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당신도 남편을 잃었잖아!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잖아! 그러니까 살려 달라고!”
“조용히 해!”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이 들이밀어지는데도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돌아보는 제인에게 용기를 얻었는지 더욱 목청을 드높였다.
“얼마나 답답하면 그랬을까!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겠냐고! 내 동생의 복수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복수?”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지독하게 싸늘한 표정과는 반대로 눈동자에선 불꽃이 튀었다.
단 몇 걸음 만에 남자의 앞에 당도한 제인이 용병이 들고 있던 브로드 소드를 획 낚아채고는 남자의 무릎 바로 앞에 거칠게 내리꽂았다.
어깨를 움찔거린 남자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다갈색 눈동자에서 차마 감출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 남편을 다치게 만든 사람은 내 손에 죽었어요. 정당한 복수를 한 셈이죠. 그런데 그쪽은요? 그쪽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당신의 형제를 죽였나요? 물론 아니겠죠. 당신은 그저 만만한 곳에 화풀이했을 뿐이에요. 비겁하기 짝이 없게.”
“내 동생은 마수의 발톱이 아니라 사람의 칼에 맞아 죽었어. 전쟁 한복판에서 누구의 짓인지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눈을 부릅뜨고 항변하는 남자를 향해 제인이 천천히 몸을 기울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왜 몰라. 동생을 전장으로 내몬 사람은 누군지 알 거 아니야. 그 사람한테 복수하면 되잖아.”
“……뭐?”
나도 언젠간 그렇게 할 거거든.
그렇게 말을 마친 제인은 다시금 고요해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위로 올리판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외방벽에 있는 문루에서 길게 울린 소리가 어째서인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누군가 영지에 방문한 건가, 빈손으로 넘어간 야닉이 3일 만에 혼자 돌아왔을 리는 없고.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킨 제인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내 들려온 외침에 또다시 몸을 굳혀야 했다.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알고? 나도 현자가 치렀던 신의 판결을 신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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