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50화 (15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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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주장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사형이 확정된 다섯 명 모두가 앞다투어 너도나도 신의 판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헛소리들 집어치워!”

다위가 즉각 욕설을 터뜨렸고 로하겔 경이 이마를 짚었다.

제인은 야닉이 그러했듯이 입가에 찬 웃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처럼 담담히 응수했다.

“검을 드세요. 제가 상대해 드릴게요.”

“공주님!”

“안 됩니다!”

하랑과 미르가 동시에 튀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악다구니를 썼던 남자는 제인이 발치에 꽂아 넣은 칼로 밧줄을 끊고 주섬주섬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승부를 받아들인 이상 남자는 심판을 받을 자격이 생겼으므로 경계하던 용병 대원들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보다 못한 로하겔 경이 나서려던 순간 다위가 그의 망토를 잡아끌었다.

“일단 둬 봐. 빌어먹을 신관도 없겠다, 여차하면 우리가 나서자고. 저 녀석도 분풀이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이해했습니다.”

다위와 기사단장마저 가만히 있는 통에 하랑이 으아, 머리를 헤집다가 잽싸게 속삭였다.

“위험하면 얼른 물러나세요. 제가 단칼에 없애 버릴게요.”

“고마워요.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지금…….”

제인의 손에 들린 롱소드가 예리하게 검신을 빛냈다.

“화가 많이 났거든요.”

내딛는 걸음에 살기가 실렸다. 그것이 남자에게 향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대는 덩치가 큰 남성. 쥐고 있는 것은 폭이 넓은 브로드 소드.

제인은 이와 비슷한 조건의 상대와 한번 겨뤄본 적이 있었다. 다른 것은 아마 상대의 각오일 것이다.

지면 무조건 죽는다는 사실은 여자라고 해서 그가 우습게 보거나 결코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는 자신을 죽일 각오로 덤빌 게 분명했다. 제인은 오히려 달가웠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오로지 눈앞의 적에게만 신경이 집중되었다. 상대의 시선, 호흡, 검의 각도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제 검이 남자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는 사실을 알아챈 직후였다.

제인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뒤로 물러났다. 상대의 마지막 몸부림에 당하지 않도록 반복적으로 연습한 동작이 몸에 밴 탓이다.

죽을 각오로 덤벼 놓고는 몸을 사리는 꼴이라니. 조금 우스웠다.

“아이노스식 검법이네?”

낯선 목소리가 단숨에 제인을 현실로 끌어올렸다.

쓰러져 신음하는 남자를 거침없이 발로 밀어내고 다가온 사람은 붉은빛이 도는 황동 갑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장신의 기사를 따라 고개가 스르르 젖혀졌다. 얼굴을 봤을 땐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녀의 이목구비에서 자연히 연상된 사람 때문이었다.

‘야닉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롱소드가 맥없이 떨어지고 뒤이어 제인 역시 허물어졌다.

“어머. 어머. 아가씨!”

스스럼없이 따라 앉은 브리아나 황비가 눈물만 뚝뚝 흘리는 제인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잘 싸워 놓고 왜 울지? 어디 다쳤니?”

“아니…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연신 몸을 떨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땅만 보며 죄를 고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 사람이… 죄송,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

그제야 이상하다고 느낀 황비가 고개를 들었다. 취발론을 빠져나온 후에 저를 기다리고 있던 스캄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터였다.

제 아들이 지금 이방인의 세계에 가 있다고. 그리고 많이 다쳤다고.

황비는 무릎을 굽힌 상태로 상체만 옆으로 돌렸다. 뒤이어 도착한 스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너였구나. 내 며느리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오묘한 낯으로 그녀가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 * *

“좀 진정이 됐니?”

다정한 목소리는 제인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찻잔을 든 손이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목을 타고 넘어간 찻물에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브리아나 황비는 갑옷을 벗었음에도 태산처럼 거대해 보였다. 단순히 체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제인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탓이었다.

황비가 몸을 씻고 공단으로 짠 자색 드레스에 머리 장식까지 완벽하게 갖추는 동안에도 제인은 여전히 같은 복장이었다.

응접실에서 황비를 기다리는 내내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숯덩이가 된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내가 누군지 알았을 때 그 자리에서 단죄를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제인은 마음속으로 세차게 고갤 흔들었다.

“저 때문에 그 사람… 황자님이 죽을 뻔했어요. 사실 생사도 잘 모릅니다. 여기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어서 제가 사는 곳으로 보냈고…….”

“그건 들어서 알고 있단다.”

황비가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순간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제인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박히도록 무릎에 올린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전부 제 잘못이니 제가 책임지고 황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귀환석을 받으러 가려면 페어리의 동굴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길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그 기회에 도망을 치려는 건 아니고?”

짐짓 떠보는 말투에 제인이 퍼뜩 고갤 치켜들었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사람을 붙여 주시면 함께 가서 증명할게요! 제가 귀환석을 가지고 오면 다른 사람이 가서 모셔 와도 돼요.”

황비는 그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려는 듯이 올곧은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오기만 하면, 무사한 모습만 보여 주시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여길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고 죽으라고 하시면 죽을게요. 그냥 멀리서 한 번만 보게 해 주시면… 그러면 전하께서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세상에. 또 우네. 나는 울보는 딱 질색인데.”

“안 울겠, 습니다. 제가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또박또박 말하려다 보니 이상한 목소리가 비집고 나온다. 제인은 입 안 살을 꽉 깨물었다.

황비가 쯧, 혀를 차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녀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날아들어 온몸이 따끔거렸다.

“아크만에 오는 동안엔 거인족이 주절주절. 씻는 동안엔 하녀들이 주절주절. 조금 전엔 드워프까지 달라붙어서 네 편을 들더구나.”

“죄송합니다…….”

얼마나 아니꼬워 보일까. 요새 사람들을 통째로 구워삶은 여우라고 생각하시려나, 온갖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네 탓이 아니라는 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서 알겠고.”

“죄송합… 네…?”

“그 애가 보낸 편지엔 멸종한 엘프족도 울고 갈 신궁이라고 하더니, 검도 제법 잘 쓰고.”

제인이 멍한 얼굴로 고갤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숙였다.

“검은 누구한테 배웠지? 스승이 아이노스 사람이니?”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으시는 걸까.

“네. 블라산코 키르도스라는 분인데 좋은 분이세요…….”

“아. 그 남색가! 뭐, 실력만큼은 믿을 수 있지.”

“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막연히 대답했다.

황비는 뜨거운 차가 익숙하지 않은 듯이 호호 입김을 불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유감이구나. 그땐 내가 황제를 갈아치우느라 좀 바빴거든.”

묘하게 야닉과 비슷한 말투에 제인은 조금 먹먹해졌다.

특유의 잔잔하고 태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또 눈물이 올라올 것 같아서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괜찮습니다.”

“흠…….”

제인을 살피듯이 보던 황비가 마침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단다. 기껏 병력이 충원됐는데 이대로 돌려보내기는 아깝잖아. 안 그래도 야닉이 먼저 제안을 해 오더구나.”

제인은 감정을 추스르면서 가만히 경청했다.

“아크만 정예와 제국군, 그리고 내가 데려온 태양의 기사단은 델피온으로 출정할 거야. 오랫동안 염원해 온 제국의 땅을 되찾을 작정이지.”

황비의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 애가 없는 게 무척이나 아쉽지만,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다. 야닉을 찾으러 가는 건… 델피온을 함락하고 나서 하자꾸나.”

말을 마친 그녀가 소매에서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펼쳐 들었다. 그곳엔 오웬의 성을 버린 황제, 시즈 오베라 1세의 이름과 국새가 번듯하게 찍혀 있었다.

제국군에게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앞선 공성전에서 전령이 가져왔다던 것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게다가 2황비가 직접 들고 온 것이니 출처 또한 의심할 바가 아니었다.

제국군은 무조건 황명에 따를 것이다. 삽시간에 의욕이 들끓었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사명감을 참지 못하고 제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가 선두에 나서서 싸우겠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네가 죽으면 귀환석은 누가 찾으러 가니. 관두렴.”

“아.”

의지가 무색하게 꺾인 제인이 민망함에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그럼 델피온에 가신 동안 제가 귀환석을 찾아올게요…….”

급격하게 사그라진 음성과 함께 다시 앉는데 황비가 커다란 눈으로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한다. 사람을 낱낱이 파헤쳐 보는 듯한 눈빛마저도 야닉을 연상케 했다.

아무래도 브리아나 오웬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인은 스치듯 생각했다.

“제인…이라고 했던가?”

“넵.”

“제인… 제인 리버스. 그래.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리버스겠지.”

아이노스 왕실의 상징이자 그녀의 결혼 전, 또한 아들의 성이기도 한 ‘리버스’를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너 따위가 감히 우리 아들을. 그런 건가….’

부정적인 사고로만 흘러가는 와중에 황비가 뜻 모를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히 초야도 치렀을 테고. 혹시 침실은 같이 썼니?”

“……네?”

“하. 돌려 말하는 건 정말 성미에 안 맞아. 그냥 물으마. 관계는 꾸준히 있었니?”

순간 혼란스러워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만 벙긋거리는 제인을 앞에 두고 황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리 사과하마. 내가 원래 제국의 귀족식 화법을 경멸하거든. 네가 나한테 익숙해졌으면 좋겠어.”

“아……. 네. 괜찮습니다. 침실은 같이 썼어요. 관계는… 그러니까….”

“됐다. 네 얼굴을 보니까 안 들어도 되겠어.”

제인이 귀까지 화끈거려서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황비는 명료하게 결론지었다.

“귀환석을 찾으러 가는 건 당분간 보류야. 델피온 출정도 제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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