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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고장 난 사람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황비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에도 역시 ‘네?’가 튀어나왔다.
“아.”
불현듯 제인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다짜고짜 부부생활을 묻더니 귀환석도, 델피온도 가지 말라니.
조금 더 일찍 눈치채지 못한 것이 황당할 정도였다. 그녀는 단박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임신은 아닐 거예요.”
“어떻게 확신해? 최근에 달거리를 했나?”
“그건 아닌데 제가 원래 주기가 좀 불규칙해서요. 건너뛰는 달도 많고…….”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언제 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겨울에는 그래도 꼬박꼬박했던 것 같은데.
골똘히 궁리하다가 도저히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었더니 황비가 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꼭 주기적이어야만 아이가 들어설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멀쩡히 야닉을 가졌으니까. 정말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겠니?”
“그건… 모르겠어요.”
이곳에 피임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계에 있어 최소한의 조심도 없었다.
그저 강렬하게 야닉을 원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눈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타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뿐.
제인은 생리가 불규칙하다는 이유만으로 막연히 임신의 가능성을 제쳐 두고 있었다.
“둘 중에 누가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혹시 네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거나 그런 걸까?”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아니라고 답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니까.
황비와 제인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머물렀다.
길이가 절반쯤 줄어든 양초에선 촛농이 뚝뚝 떨어져 촛대에 쌓여 갔다. 사용인들을 모두 물린 응접실에선 장작이 타는 소리만 탁탁 울려 퍼졌다.
브리아나 황비의 얼굴에 노을빛이 내려앉는다. 한층 더 음영이 짙어진 얼굴로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너만 알고 있으렴. 지금의 황제는 후손을 볼 수 없어.”
제인이 아연히 고개를 들었다.
“7황자인 이든은 심성이 여려 황제의 재목으론 맞지 않아. 모친과도 이야기를 끝냈단다. 두 사람의 안위를 보장하는 조건을 붙였지.”
그녀는 미지근한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제인과 눈을 맞춘 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도기가 달칵거리는 소리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 아들의 핏줄을 제위에 앉힐 심산이란다. 그게 바로 내가 시즈를 도운 이유야. 물론, 그 애도 동의했고.”
“…….”
“다시 말하자면, 네 배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뜻이야.”
갑작스레 너무 많은 정보가 밀려들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납작한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부디 임신이 맞았으면 좋겠구나. 야닉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애가 유일한 내 아들의 흔적이 될 테니까.”
담담하게 말했지만 황비의 눈엔 미처 숨기지 못한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아들이 돌연 다른 세계로 갔다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텐데, 황비의 의연한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있을까 봐 화를 내지 않으셨구나.’
손을 꼼지락거리던 제인이 그렇게 우물을 파고 있을 때 황비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는 정말이지 저치들이 말한 그대로구나! 이야길 들어 보니 내 아들이 자초한 결과던데 그렇다면 당당하게 행동해야지. 설령 잘못이 있더라도 뻔뻔하게 굴고!”
“……네?”
“아가. 네가 앉은 자리는 그래야만 해. 턱을 치켜들고 부탁이 아닌 명령을 내리거라. 네 태도로 인해 남편을, 나아가 제국을 얕보이게 만들지 마.”
거침없이 사람을 찌르던 검사는 어디 가고, 새초롬한 눈만 끔뻑이는 순진한 아가씨를 내려다보던 황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귀환석도 네가 가져온 거라던데. 그럼 다시 구해 올 수도 있는 거 아니니?”
조금 누그러진 음성 뒤로 제인이 즉각 대답했다.
“구해 올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덩달아 일어선 제인을 보고 황비가 긴 팔을 뻗어 어깨를 눌러 주저앉혔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몸가짐에 주의해야지. 귀환석은 그다음이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그럼 됐다. 나는 여독을 좀 풀어야겠으니 너도 건너가서 쉬어라. 이따가 저녁이나 함께하자꾸나. 네게 들을 이야기가 아주 많아.”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만 끄덕이는 제인을 뒤로하고 황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임신이 아니더라도 나를 속이려 들거나 세레나처럼 부정한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내 아들과는 다르게 무르지 않으니까 말이야.”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이 열어 주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어젖힌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아찔할 만큼 거센 폭풍이 다녀간 듯했다.
제인은 멀거니 문만 바라보다가 사색이 된 미엘라가 달려온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야닉의 어머니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다른 건 몰라도 무르지 않다던 브리아나 황비의 말만은 사실이었다. 신의 판결을 요청했던 죄인들은 검 한번 잡아 보지 못하고 단칼에 목이 잘려 나갔다.
황비는 제국군이 자리를 잡은 병영 중앙에 귀틀벽을 세우고 이들의 목을 나란히 내걸었다. 그 아래에는 델피온의 출정을 명하는 황제의 칙서가 보란 듯이 붙어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여전히 아크만에 적의를 품고 있는 병사들을 제압하는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불온한 움직임은 즉각 죽음에 대한 공포에 수그러들었다.
델피온은 아크만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 근거리였기 때문에 출정 준비 역시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선봉에 선 로기아 후작 앞에 제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갔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황비 전하께서 데려온 치유술사 덕분에 가뿐합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제국의 광명을 안겨 드리겠습니다.”
완쾌했다고는 하나 아성의 유령으로 지냈던 시절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여파는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알리온의 치료에도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한 이유가 오랜 시간 쇠약해진 몸 때문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몸도 온전하지 않은데, 나이마저 불혹에 접어든 그가 또다시 다칠까 봐 제인은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원래는 야닉이 계획했던 일이라던데. 괜히 저 때문에 영주님이…….”
면구한 마음에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황비의 조언대로 당당해지려고 했지만 죄책감이 그렇게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다.
“황자님을 찾으러 가시려면 좀 더 단단해지셔야 합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요. 제 마음은 다 나았고 몸도 좋아질 예정이니, 이제 공주님 차례입니다. 부디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어렵지 않게 감정을 읽어낸 후작이 뒤로 넘어간 후드를 제인의 머리에 덮어 주었다.
“제가 없는 동안 아크만을 잘 부탁드립니다. 듣자 하니 황자님보다 영지 관리를 더 잘하신다던데요.”
늘 진중한 그답지 않은 농담에 결국 제인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다위마저 콧방귀를 꼈다.
“흥! 잘하기는 얼어 죽을. 대장간에 있는 장비랑 재료들을 빠짐없이 죄다 적어 달라는 게 잘하고 있는 거냐?”
“아, 그거는 보급품 목록을 작성하기 전에 기존 재고를 파악하려고…. 출입 수량을 알아야 해서…….”
“이것 봐라! 어려운 말로 내 머리를 터뜨려서 드워프족을 완전히 멸종시키겠다는 수작이 틀림없다고.”
그게 아닌데. 제인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군마에 올라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던 황비는 제인의 주위를 둘러싼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훑어보았다. 그곳엔 자신이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뒤섞여 있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드워프족, 황실 소속의 상급 마법사, 과거 행상인이었던 시종, 수도 귀족 출신의 용병, 어릴 때부터 야닉만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이방인 아버지, 조만간 대주교가 될 예정인 노신관, 아이노스에서 이름난 검술 선생, 거인족과 여우 수인, 전담 하녀와 요새의 주민들…….
출신도, 신분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있다. 그들의 미소가 향한 곳엔 야닉이 선택한 여자가 있다.
제 아들을 반반한 얼굴에 넘어가는 멍청이로 키운 적 없었다. 그렇기에 황비는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다.
브리아나 황비는 투구를 턱 끝까지 당겨 얼굴을 감추고,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태양의 기사단이 제국의 위대한 발돋움에 함께 하겠다! 델피온을 향해 전군, 출정!”
상공에 메아리치는 올리판트의 신호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후미에 있는 보병들은 아직도 도개교를 건너고 있는데, 선두에서 깃발을 든 기마부대는 거의 지평선 끝에 걸려 있었다.
끝도 없이 장대하게 이어진 행렬을 보는 제인의 가슴도 전에 없이 벅차올랐다. 델피온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연합군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아쉬웠다.
마지막 부대가 다리를 건너고 성문이 굳게 닫히는 모습까지 지켜본 제인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북부의 봄을 얕봤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에요! 이제 그만 마차에 타세요, 공주님.”
미엘라가 수선을 떠는 탓에 성벽으로 가려던 계획도 포기해야 했다. 혹시 모를 임신 가능성 때문에 말도 탈 수 없었다.
원치 않은 호사였지만 차마 거부할 수도 없어서 제인은 마부의 팔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아무도 관심 없던 곳이라서 그동안 무사했던 거지, 크기로 보나 인구로 보나 델피온 자체는 함락하기 어려운 나라는 아니에요.”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라킨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브레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무척이나 힘이 없었다. 일주일 정도면 괜찮을 거라더니 생각보다 마력 회복이 더딘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비리비리한 게 더 약골이 됐나, 브레고가 단박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차라리 누워라. 또 쓰러질 거 같아서 도저히 못 보겠다.”
“그래…….”
포라킨은 지체 않고 미끄러지듯이 머리를 내렸다. 정작 누우라고 한 브레고가 더 놀라서 허벅지를 베고 누운 포라킨을 황당하게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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