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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올라탄 미엘라가 맞은편에 제인과 함께 자리를 잡자 마차는 천천히 내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흙길을 구르는 바퀴가 쉼 없이 들썩거렸다.
공연히 내부 손잡이를 움켜쥔 제인은 포라킨이 델피온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단장님 고향인데, 걱정되진 않으세요?”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셔서 괜찮습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사원에서 지내서 별로 기억에도 없고요….”
“이제 그만 말 걸게요. 도착할 때까지 좀 쉬세요.”
파리한 안색을 보자니 궁금한 것은 다음에 묻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던 포라킨이 인상을 찌푸리며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누우니까 더 어지럽네요…….”
“어. 그냥 앉아. 차라리 아까처럼 기대든지.”
누우랄 땐 언제고 금방 반색하는 브레고를 포라킨이 못마땅한 눈으로 슬쩍 흘겼다.
“주임님… 아니…. 공주님은 좀 어떠세요. 입덧이라거나…. 뭐 그런 건 없으시고요?”
제인이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브리사나 황비를 통해 일파만파 알려졌다.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눈 직후부터 그녀가 사용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음식, 의복, 잠자리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했기에 하룻밤 새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입덧 같은 징조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이가 제인을 극진히 대했다.
‘그래서 단장님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제인은 한결 편안해 보이는 포라킨을 힐끗 보다가 결심을 굳혔다.
“저기 혹시, 증상이 없어도 임신이 맞는지 확인해 볼 방법은 없겠죠?”
이곳에 맥을 짚어 진단하는 의학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방인 중에 한방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배가 불러오기만을 기다리기엔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하루하루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차라리 아니면 아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귀환석을 받으러 가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도서관이나 마탑에서 연구를 오래 한 포라킨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건데, 뜻밖에도 대답은 미엘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법이라면 하나 있기는 해요!”
“있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제인이 눈을 반짝였다. 미엘라가 선뜻 입을 열다가 잠깐 주춤하더니 포라킨의 눈치를 살폈다.
“고전적인 방식이기는 한데…….”
“뭔데요?”
“자루에 밀이랑 보리를 담아서 그곳에 소변을 보는 건데요.”
계속해 보라는 간절한 눈빛에 미엘라가 말을 이었다.
“임신이 맞으면 신기하게도 싹이 자라난대요. 아니면 그냥 썩어 버리고요.”
제인의 표정에 모호함이 어렸다. 그건 그냥… 샤머니즘 개념의 미신 같은 게 아닐까?
급격하게 떨어지는 신빙성에 낯빛이 흐려질 때쯤 잠자코 듣고 있던 포라킨이 입을 열었다.
“지웅 님과 상아 님이 계실 때 해 봤던 방법입니다. 결과적으론… 싹은 났는데 임신은 아니었어요.”
역시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양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예 얼토당토않은 방법은 아니라더군요. 정확도가 떨어질 뿐이지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하셨어요.”
“양승원 선생님이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현대의의 소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널뛰는 감정만큼 제인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했다.
포라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년쯤이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뭐라더라. 무슨 홀… 호르 작용이 곡물의 발아를 촉진할 수도 있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호르…? 호르몬이요?”
“아. 맞아요. 호르몬.”
단숨에 신뢰감이 상승하는 단어였다. 호르몬.
‘해 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와중에 마차의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내성문을 지나 시가지에 접어든 마차는 매끄럽게 포석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굽이치는 언덕을 올라 본성 앞까지 당도했을 무렵 포라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구속구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사용한 건 그때그때 가져다가 다위 님께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하는데요.”
밀과 보리에만 매몰되어 있던 제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구속구…?”
“황자님이 놓고 가신 장신구들이요. 그게 없으면 큰일이잖아요. 충분한 양을 채우려면 수시로 다른 이방인분들에게 부탁해서 마력을 담아놔야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임신 확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마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데, 자신이 죽으면 취발론에서 귀환석을 받아오는 데 커다란 지장이 생긴다.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인은 입을 틀어막았다. 야닉이 있을 때야 직접 접촉해서 나누어 받았으니 그만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한동안 뇌리에서 지워졌던 장신구는 그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얼마나 남았더라. 몇 달 전에 깼던 것 말고 얼마나 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야닉이 수도에 갔을 때 쓰고……. 그 뒤론 쓴 적이 없어서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기억이 잘 안 나서.”
황망하게 중얼거리는 제인을 보고 포라킨이 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한 번도 안 쓰셨다고요? 황자님이 다른 세계로 가신 지 열흘이 넘었는데요?”
“네. 어…? 열흘……?”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멈춘 지 오래였으나 안에서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밖에서 문을 연 마부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 * *
응접실로 들어온 제인은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문가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야닉이 없던 지난 열흘간 마력을 보충한 적이 없다. 으스스한 한기나 팔다리가 저린 증상이 전혀 없었으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몸 상태가 평소와 같은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오늘 아침에 마력을 받은 것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다.
“뭔데 또 사람을 오라 가라야?”
문이 열리고 염 부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제인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염 부장이 반가웠던 건 이로써 두 번째였다.
“부장님.”
반색하는 그녀와는 달리 염 부장은 시큼털털한 낯으로 들어섰다.
“한 주임이 니가 암만 신분 상승을 했다 쳐도 내가 그래도 상산데, 매번 이렇게 아랫사람 부리듯이 말이야, 어?”
“부장님도 슬슬 호칭을 바꾸는 습관을 들이시죠…. 나중에 황가 모욕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등장한 포라킨은 이번엔 브레고의 등에 업혀 있었다. 아까는 괜찮아 보이더니 걷지도 못할 수준인 건가, 제인의 얼굴에 언뜻 걱정이 스쳤다.
브레고는 오만상을 쓰면서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포라킨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간다. 밥 먹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 끝나면 불러라.”
“그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브레고를 뭐 씹은 얼굴로 보던 염 부장도 자리에 앉았다. 포라킨은 언제 시름시름 했냐는 듯 몸을 바르게 세우고 앉았다.
“공주님도 앉으시죠. 부장님 옆으로요.”
“공주님은 무슨. 닭살 돋게스리. 넓은데 놔두고 왜 내 옆에 앉아?”
염 부장이 뭐라건 옆에 앉은 제인은 먹이를 목전에 둔 짐승처럼 안광을 빛냈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은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부장님. 죄송한데 손가락 좀 빌려주세요.”
제인이 검지를 들고 어서요, 하는 얼굴로 종용했다.
“너…… 또 아프냐?”
예전에 한 번 마력을 흡수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염 부장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코피를 흘렸다고 했던가. 지레 겁부터 먹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아마 괜찮을 거예요.”
장담은 할 수 없어서 ‘아마’를 덧붙였으나 이미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장신구로 테스트를 하려고 했지만 포라킨의 단호한 반대로 염 부장이 실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장신구는 깨지기 전까지 접촉자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제인에겐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확히는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염 부장에겐 미안하지만 아주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지금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내놔 봐.”
절실한 표정에 포기라도 한 건지 예상외로 순순한 반응이 돌아왔다.
“손가락이면 돼요. 저번처럼 손끝만 살짝.”
“한참 모자랐잖아. 손 줘 봐.”
느닷없이 덥석 움켜쥐는 두툼한 손길에 제인이 움찔했다. 양손으로 꽉 잡은 탓에 빼낼 수도 없었다.
“자, 잠깐만요.”
“암시롱도 않구만, 뭐. 어디서 충전하고 온 거 아냐?”
제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력이 전혀… 흘러 들어오지 않는다.
“……?”
“쓰잘머리 없는 일로 어른 부르는 거 아니다.”
툭 내뱉은 염 부장이 일어나 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제인은 손을 잡혔던 자세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놀란 것은 포라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멀쩡하게 걸어 나간 염 부장을 보다가 허둥지둥 제인에게 넘어왔다.
“부장님한테 못 받으신 거죠?”
허공에 떠 있던 손을 이번엔 포라킨이 매만졌다. 더듬거리는 손길이 무척이나 다급했다.
“구속구, 안 쓰신 게 확실합니까?”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포라킨의 안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네. 안 썼어요.”
멍하니 중얼대는 음성을 뒤로하고 포라킨이 천천히 몸을 물리더니 순식간에 그렁그렁해졌다.
“틀림없어요. 공주님의 몸에 다른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
코끝이 빨개진 그녀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태아가 가진 마력이 공주님을 감싸고 있는 거예요!”
“태아…….”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흡! 축하드려요. 공주님.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기적이에요!”
제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쩌면. 만에 하나. 혹시. 막연히 추측하던 일이 맞아떨어졌음에도 명쾌함보다는 얼떨떨함이 더 컸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가만히 배로 가져다 댄 손이 파들거렸다. 떨리는 건 손이 아니라 온몸일지도 모른다.
“주교님께 당장 자문을 구해 봐야겠습니다! 이런 사례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환희에 찬 목소리로 포라킨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좀 전까지 업혀 있지 않았었나…….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오로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여기, 이 안에 생명이 있다. 나와 야닉의 아이가.
그를 떠나보낸 뒤 제인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고, 동시에 두려워졌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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