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성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몰려든 사람들의 축하 인사로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민망함에 다소 형식적으로 응대하던 제인도 제 일처럼 기뻐하는 얼굴들을 보고는 이내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자신들을 배척하는 대신 환영과 존중으로 맞이해 주었다.
이들은 제인에게 있어 이른 새벽 홀로 나선 길에 씩씩하게 길을 안내해 주던 과수원의 소년 벤이었다.
낯선 곳의 이정표이자, 고민하던 등을 떠밀어 준 바람이었다.
처음으로 장갑을 끼지 않고 잡아 본 손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따뜻했다. 포옹은 간질거렸고 뺨에 닿는 키스는 조금 쑥스러웠다.
미엘라의 눈물 콧물이 어깨를 축축하게 적셔도 마냥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뒤론 침실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녀들이 얼마나 거들었는지 거의 두 발이 공중에 뜬 상태로 옮겨진 것 같았다.
마음이 수런거려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제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는 꼭두새벽부터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알리온이 포라킨의 진단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가 택한 방식은 이제껏 중에 가장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가 지금부터 공주님의 마나를 순환하는 마법을 걸 겁니다.”
“넵.”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제인은 숨을 고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는 이방인들이 이곳에 와서 맨 처음 하는 훈련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몸속의 마나를 순환시켜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내부에서 생성된 마나를 ‘마력’이라는 이름으로 외부로 방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법’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이 썼던 양동이 대신 과하게 번들거리는 은색 냄비가 발아래에서 대기 중이었다. 준비가 끝났다는 눈빛을 보내자 알리온이 지팡이 끝을 치켜들었다.
인위적으로 마력을 흘려보내 상대의 마나를 자극하는 알리온의 마법은 육안으론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함이 가라앉는 동안 제인은 자신이 무언가 놓쳤나 싶어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이것 참.”
지팡이를 내려놓은 알리온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노회한 신관의 표정은 좀처럼 읽기가 어렵다.
“경하드립니다. 태중에 아기씨가 계신 것이 확실하군요.”
“왜요?”
확실하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제인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본인의 마력이 아니면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네. 야닉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자님들처럼 마나가 생긴 거라면, 공주님 역시 그분들처럼 구토감을 느꼈을 겁니다.”
“아!”
제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역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공주님의 몸속에 있는 마나는 공주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하면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아기의… 마력이요…?”
알리온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포라킨에 이어 알리온의 소견까지 일치했으니 99% 정도는 맞다고 봐야 했다. 분명히 맞을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제인은 돌아갈 채비를 하는 알리온을 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하던 신관은 그렇게 유유히 사라졌다.
골몰히 생각하던 제인은 이번엔 종을 흔들었다. 미엘라에게 밀과 보리 주머니를 부탁할 심산이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
그러면서도 평소와는 다르게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황비가 이끄는 제국군이 델피온으로 출정한 지 5일째 되는 날, 전령이 황금 독수리 깃발을 휘날리며 요새에 도착했다.
위풍당당한 전령의 손에는 왕비의 서명이 담긴 항복 문서가 들려 있었다.
“델피온을 함락했답니다! 아피오수스 왕이 성을 버리고 도망쳤대요! 그러다가 결국 민중에게 붙잡혀서 공개처형!”
승전보를 전달하고 나온 전령에게 소식을 얻어낸 벤이 온 성채를 쏘다니면서 고래고래 외쳤다.
“국왕은 실은 얼마 전에 제국군이 아크만에 왔을 때도 지레 놀라 도망쳤던 겁쟁이였답니다! 그때 황금과 보석을 실은 마차를 들키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더니, 이번에는 정부와 사생아만 챙기다가 돌에 맞아 죽었대요!”
“자극적인 내용만 신나서 떠들지!”
벤의 머리통을 꽁 쥐어박은 스캄이 혀를 차고는 본성 계단을 세 칸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아! 아파요! 부대장님!”
벤은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콧김을 내뿜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신이 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바깥에서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요새에 다시 상인들이 오가기 시작했으니 델피온의 패전 소식은 머지않아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제국의 위상이 한층 더 드높아지겠지만, 정작 이를 계획한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내가 대장이 되게 생겼네.’
스캄은 복잡한 심경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삭막한 용병 관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화려한 본성 회의장에 그가 마지막으로 들어섰다.
광택이 흐르는 커다란 테이블엔 출정을 나간 사람들을 제외한 요직에 앉은 인원 전원이 집결해있었다.
야닉이 앉았던 상석에는 그의 아내이자 레비탄 제국의 황자비가 된 이방인이 자리를 대신했다.
제인이 반가운 미소로 스캄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부대장님.”
“늦어서 미안하우.”
불과 몇 달 전 관사 회의실에 루이자와 함께 왔던 어리숙한 아가씨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노련한 영지의 관리자들 앞에서도 의연한 그의 상관만이 있을 뿐이다.
착석한 이들을 향해 제인이 자연스럽게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운영 전반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제가 결정권자가 됩니다. 제가 보고받아야 할 사항을 전부 알려 주세요.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볼게요.”
……어째 검은 늑대보다 더 지독한 우두머리가 나타난 것 같은데.
다른 관리인들의 낯에도 비슷한 불길함이 깃들었다.
* * *
제인은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책을 하도 들여다봤더니 눈에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루이보스 차를 가지고 들어온 미엘라가 서재 책상 위에 잔을 내려놓으면서 투덜거렸다.
“영주님도 돌아오셨는데 공주님께서 왜 이렇게 바쁘신지 모르겠어요.”
“델피온엔 장로들이 많다는데 가서 어리숙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 미리 공부해 두는 거예요.”
어쩐지 그 말에 더욱 격분하는 미엘라였다.
“브리아나 황비님을 여자라고 무시하던 꼬장꼬장한 노인들이라면서요. 황비님이 그 자리에서 몇 명쯤 목을 댕강! 날려 버리니까 단체로 입을 다물었다던데, 감히 공주님을 함부로 대할 수나 있겠어요?”
손날로 목을 쳐내는 흉내까지 내는 걸 보고 제인이 킥킥 웃었다.
“나도 출산하면 그렇게 할지도 몰라요. 원래 몸 쓰는 일에 더 자신이 있어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농담을 하자 미엘라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그런 험한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아기씨께 안 좋단 말이에요!”
자기는 목긋는 시늉까지 했으면서. 제인은 툴툴거리면서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야닉을 떠나보냈던 혹독한 봄이 지나고, 여름답지 않은 선선한 계절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가을이었다.
이제는 레비탄 제국의 지명이 된 델피온에는 브리아나 황비가 터를 잡고 초대 제후로 등극했다. 원래는 야닉이 맡았어야 하는 자리라, 정확히는 영주 대리였다.
황비는 정착하는 과정에서 뤼시크 상단의 칼 뤼시크 공작을 불러들여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 원체 가난한 나라였던지라 돈을 벌어들이는데 가장 적합한 인재를 등용한 것이었다.
수도에 남은 상단은 그의 외동딸이자 폐태자비인 모건 뤼시크가 맡게 되었다. 독점하던 사업 몇 가지를 황실 소유로 전환하고 상당수의 비자금도 회수했다.
막대한 손해를 겪었음에도 칼 뤼시크가 이를 수용한 건, 외도를 자백한 모건을 살려 주고 그녀가 낳은 아이에게 ‘오베라’의 성까지 허락한 까닭이었다.
폐태자 체이스 오베라의 아들로 입적한 광대의 아들은 이로써 무사히 황족이 되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명예를 칼 뤼시크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황비는 이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끝나면 마물이 몰려오는 아크만에서 아이를 낳게 할 순 없다면서 제인에게 델피온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안정기에 접어든 배는 동그랗게 부풀어 요즘엔 심심찮게 태동도 느껴졌다.
박 차장은 과거에 엄청나게 고생했던 것 같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자신은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잠이 늘고 이따금씩 배가 당기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이게 맞는 건가?’
아이가 여럿인 다른 부인들이 괜찮다고 했으니 아마 괜찮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으로선 경험자들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제인은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뒤 미엘라와 함께 3층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여름부터 쭉 침실로 쓰고 있는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길이다. 혼자 사라지면 큰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미엘라에게만 비밀의 방을 공개했다.
먼저 능숙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미엘라가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올라올 수 있겠어?]
그럴 때면 어김없이 환청 같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미엘라의 자그만 손이 아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덧그려졌다.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매일 밤 반복되는 기억이 가슴 언저리를 따끔따끔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사다리를 오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달빛이 유리창을 통해 한가득 들이쳤다.
미엘라의 손길이 닿은 꼭대기 방은 가구가 늘어나 조금 더 아늑해졌고, 복작복작해졌다.
“여기도 인제 그만 오셨으면 좋겠어요. 종소리가 안 들려서 공주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큰 일이란 말이에요. 황비님이 아시면 이번엔 분명 제 목을 댕강.”
초를 켜고 화롯불에 불씨를 넣으며 미엘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델피온에 가기 전까지만요.”
“저도 그냥 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바닥에 침낭만 깔면 되는데!”
조용히 웃는 제인을 보고 미엘라는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원래도 수다스럽지 않았던 제 주인은 여기만 오면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미엘라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유리창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손을 짚고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눈에도 통창 너머의 풍경은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너무 낭만적이에요…….”
밤하늘을 보석처럼 수놓은 별들 아래로 노란 불빛들이 발아래에 가득했다. 저 멀리 높은 울타리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 세상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풍광에 취해 한참을 재잘거리던 미엘라가 문득 귀를 쫑긋거렸다. 문루에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