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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추억 속에 잠겨 있던 제인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를 일깨운 말 뒤로 내성문에서 땡땡거리는 종소리가 이번엔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아! 저 이 신호 알아요.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씩 쳤다가 쉬고 또 세 번씩 치는 거. ‘아군의 귀환’이죠?”
둥둥둥…… 심장 고동이 종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사다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가는 손과 발이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파들파들 떨려왔다.
미엘라의 도움을 받아 내려온 다음엔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자꾸만 빨라지려는 걸음걸이는 아이를 생각해 자제하려고 애썼다.
“한 주임님!”
본성의 황금문이 열리고 그 앞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자였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거친 숨에 바스러졌다. 밭은 호흡과 함께 제인이 실망감을 갈무리했다.
“집사장님.”
고향에서 돌아온 루이자의 양손에는 짐가방이 그득했다. 가죽 캐리어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던지고 루이자가 홀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세상에! 이를 어쩜 좋아…!”
루이자는 제인의 둥근 배를 보고 발치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며 제인도 따라 앉았다.
“어서 오세요. 집사장님. 잘 돌아오셨어요.”
“용서를… 아니, 저를 죽여 주세요! 맙소사, 어떻게 이런…….”
“괜찮아요. 집사장님 잘못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정말.”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루이자의 눈은 안으로 푹 꺼져있었고, 뺨은 안쓰러울 정도로 홀쭉했다.
바닥을 짚은 손도 앙상한 데다가 보랏빛이 돌았던 머리는 중간중간 희끗희끗해져 색이 옅어져 있었다.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여실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제인은 먹먹해진 눈으로 루이자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잘 오셨어요. 식사는요?”
더 보고 있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서둘러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시에나가 황급히 하녀들에게 지시하자 몰려들었던 인파는 각각 식당과 집사장의 방으로 흩어졌다.
루이자는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낸 뒤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제인은 넓은 바닥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짐가방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오늘 밤은 아마 잠을 잘 수 없겠지. 종이 울릴 때마다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 * *
델피온의 국왕 부부가 살던 성은 낡고 노후되어 임산부가 지내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제인이 머물 곳은 얼마 전에 새로 지은 궁으로 결정됐다.
내부 시설을 신식으로 만들기 위해 건축과 설비에서 아크만의 이방인들이 동원되었다.
자재들을 옮기느라 짐마차가 밤낮으로 요새 안팎을 드나들었다. 도개교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고, 문루의 종도 편의상 울리지 않게 되었다.
실내장식이 끝나고 가구와 집기들, 그리고 궁의 사용인들까지 모두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브리아나 황비가 보낸 편지에는 루이자도 함께 데려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일전에 야닉의 부탁으로 그녀를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
제인은 양피지 위로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마저도 번질까 봐 금방 거두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델피온으로 간다.
새로운 거처에서 아이를 낳은 다음 취발론에 가서 귀환석을 받아 올 계획이었다.
페어리가 순순히 내어 주지 않는다면 기꺼이 검을 들 작정이다. 이번에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져와서 야닉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내가 죽어서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귀환석을 가져오기만 하면 돼.’
이방인은 나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 그래. 그거면 된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첨탑의 꼭대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제인은 오늘 미엘라와 함께 자기로 했다. 전담 하녀로서 자신과 함께 델피온으로 가는지라 꼭대기 방은 미엘라에게도 마지막이었다.
이곳을 마음에 들어 했으니 하룻밤 정도는 소중한 장소를 공유할 요량이다. 오늘만큼은 그를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수다를 떨 계획이기도 했다.
야닉을 너무 자주 생각하면 제 안의 그가 조금씩 닳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봐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눈을 떴을 때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어제와 똑같은 죄책감이 조금씩 무게를 더해 마음을 허물어뜨렸다. 무겁다가, 아팠다가, 허전한 것이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멀쩡한 침실을 두고 이곳에서 자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좋은 것만 생각하자.’
상념은 아까부터 소란스러운 아래층의 소음에 끝이 났다.
제인은 침낭을 가지러 간 미엘라가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겠거니 했다. 밤새 재잘거릴 생각에 이불 말고도 온갖 먹을 것들을 챙겨 올 게 분명했다.
야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데 등 뒤로 입구 타일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득 평소에는 즐기지 않았던 간식거리가 간절해졌다.
“아, 미엘라. 혹시 말린 사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이 다물어졌다.
당연히 미엘라가 있어야 할 자리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요즘 들어 낮잠을 많이 자니까, 그래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든지. 아마 그럴 거야.
“……그렇게 보고 싶어도 꿈에 나온 적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야트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상했을까. 고단함이 물씬 내려앉은 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음영이 드리워진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묘하게 현실감을 더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얼굴에 머물렀던 황금색 눈동자가 아래로 약간 내려가는 듯하더니 무참히 흔들렸다. 이윽고 다시 마주친 시선이 위태로웠다.
꿈속의 야닉은 금방이라도 화낼 것처럼… 아니,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닉……?”
“우리 아기가, 말린 사과가 먹고 싶대?”
터지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인은 비로소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목소리에 다리가 풀려 버렸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몸을 단숨에 잡아챈 야닉이 다급하게 얼굴을 매만졌다.
“제인.”
익숙한 감촉. 뜨거운 체취에 희미하게 섞여든 밤공기 냄새. 그리웠던 목소리.
아. 그 사람이다. 정말로 야닉이다.
“미안해……. 미안해.”
어떻게 돌아온 거냐고 물으려 했는데, 막상 보니까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제인은 야닉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얼룩진 시야로 보이는 그 역시 짙게 떨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었다.
야닉은 텅 빈 마음을 메우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제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옭아매는 시선이 아프게 쏟아졌다.
제인이 엄지로 눈 아래를 훔치자 손가락 사이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몸을 떨어뜨리고 그를 위아래로 더듬었다.
불현듯 그가 다쳤던 순간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흥건했던 피가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등, 등을 많이 다쳤는데.”
“다 나았어.”
몸에 닿는 손길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야닉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나 좀 봐. 얼굴 좀 보여 줘. 응?”
“진짜 괜찮아? 이제 안 아파?”
고갤 끄덕인 그가 두려울 만큼 근사하게 웃더니 제인의 배를 향해 눈짓했다.
“무서워서 함부로 끌어안지도 못 하겠어. 그러니까 그대가 날 좀 안아 줘.”
야닉이 팔을 벌리고 포옹을 재촉한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정말로 그가 돌아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포옹보다 더 확실한 감각이 절실했다. 내내 그리웠던 품에 안기는 대신 그녀는 갈급하게 입술을 찾았다.
놀란 듯 굳어 있던 그가 이윽고 제인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제인은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움직여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층 더 농밀해진 촉감에 비로소 그가 돌아왔다는 게 체감됐다. 제인은 눈을 꼭 감고 그에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야닉은 떨어져 있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열렬하게 반응했다. 숨을 고르려 잠깐이라도 입술을 떼면 기다리지 못하고 재차 달려드는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서로의 호흡이 가빠지고 열기가 짙어졌다. 쉴 새 없이 입술을 겹쳐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안에서부터 고였다.
‘부족해.’
한참 만에 겨우 떨어진 야닉이 이마와 뺨, 턱에 연달아 키스를 퍼부었다. 자제하려는 그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인은 손을 뻗어 아직 열려 있는 탑의 문을 아래로 밀었다.
쿵! 하고 판자가 떨어져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울렸다. 야닉은 그 소리에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이성을 되찾았다.
“잠깐만.”
그녀가 원하는 걸 알아챈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안 돼. 그대 지금….”
“괜찮아. 이제 안정기야.”
야닉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는 냉정해졌지만 진작 궤도에 오른 신체는 여전히 아내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홑몸이 아닌 그녀에게 부담을 줄 순 없었다. 결국, 그가 꺼져 가는 음성으로 토로했다.
“오랜만이라 자제할 자신 없어.”
“…….”
고집스럽게 쳐다봐도 선뜻 다가오지 않는 손길에 불만이 쌓여 갔다.
그가 일부러 거부하는 게 아닌 걸 안 이상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녀도 강수를 두어야 했다.
제인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용기를 끌어 올렸다.
“내가 할게.”
앞쪽에 여밈이 있는 원피스 잠옷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보이자 야닉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를 꽉 물었는지 그의 턱 근육이 움직이는 것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제인은 착실하게 손을 놀리면서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참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도 얼마나 그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망상을 하는 게 아니란 걸 믿게 해 줘. 야닉.”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한 마디에 야닉은 굴복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을 등지고 선 제인의 모습은 신성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물론 제 처지는 그다지 신성하진 못했다.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날 물어뜯고 걷어차서라도…….”
홀린 듯이 중얼대는 와중에 마지막 단추가 툭 열리더니 옷자락이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동시에 그의 인내심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리 와.”
가라앉은 탁한 음성에 그녀가 격앙된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