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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55화 (완결) (155/155)

쌀쌀해진 뒤로는 방에 놋쇠 화로를 들여 온도를 높였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화로에 숯불을 넣을 일은 없을 것이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공간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달뜬 얼굴을 어루만졌다.

“등……. 많이 아팠지.”

걱정되어 살펴봤던 야닉의 등엔 기다란 사선 형태로 흉터가 크게 남아 있었다. 바늘로 꿰맸던 자국까지 희미하게 보였을 땐 제가 다 고통스러웠다.

“보기 흉해? 똑같은 자리에 상처를 내고 회복마법을 받으면 말끔해지는데, 그렇게 할까?”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제인은 곧장 사색이 되어 도리질했다.

알았어. 안 그럴게. 그렇게 달랜 야닉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런데 머리 자른 건 왜 감상이 없어. 다시 기를까?”

“아니! 기르지 마. 지금이 좋아.”

이번엔 제인이 진심이었다. 야닉은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의외인 얼굴을 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제인이 아래로 눈을 깔고 우물거렸다.

“……차장님이 귀환석을 훔쳤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러실 분은 아니었는데.”

“그만큼 절박했겠지. 덕분에 나도 돌아올 수 있었고.”

제인은 고갤 들어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은 다른 세상에 가서도 반짝반짝 빛나게 잘 살 줄 알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여기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도 있었을 텐데.

잘 지냈다고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아까의 모습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그곳에서 많이 힘들었던 걸까.

부산스러운 시선을 읽었는지 야닉이 다정하게 물어 왔다.

“무슨 생각해.”

“음. 우리 집에 있는 네 모습. 내 침대에 누운 너. 상상이 안 돼.”

걱정을 끼치긴 싫어서 둘러댄 말에 그가 설핏 웃었다.

“그대의 동료들이 신경을 많이 써줬어. 덕분에 그대가 살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고.”

“정말 잘 지낸 거 맞아?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래.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다 온 기분이야. 제법 긴 여행이었지만.”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둘러대는 걸 알면서도 태평하게 쉬었다는 말이 못내 섭섭했다.

“……거짓말.”

슬쩍 눈을 흘기면서 중얼거렸더니 야닉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치고는 몸을 똑바로 돌렸다. 뾰족하게 솟은 천장을 바라보는 눈엔 쓸쓸함이 묻어났다.

“정말로 잘 지냈어. 가끔 추웠던 것 빼고는.”

야닉의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제인이 몸을 일으켰다. 담요가 허리 부근으로 흘러내렸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추웠어? 왜?”

“거기선 힘을 쓸 수가 없었거든. 마력이 없으니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야닉은 그 말은 영원히 묻어 두기로 했다.

“도착했을 때 거긴 겨울이었어. 그래서 추웠고. 그게 다야.”

그가 담요를 집어 제인에게 둘러 주며 담담히 읊조렸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생략된 감상이었다.

세세하게 캐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제인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파헤치는 건 상처만 될 거라는 걸 저 역시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추워했던 기억을 모조리 제 온기로 채워 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가 다시 만났다는 기쁨만 만끽했으면 했다.

그녀는 그가 했던 것처럼 잘생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랑스러운 눈자위에, 오뚝한 콧날에, 뜨거운 입술에 연신 새털 같은 자국을 새겼다.

애정을 듬뿍 담은 뽀뽀 세례에도 흘러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몸을 맞대고 있어도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멈칫했던 그가 제인의 등을 손가락으로 느리게 쓸었다. 도톰한 담요가 손길을 따라 발치로 흘러내린다.

피부에 닿는 선연한 감각에 제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건 처음인데. 당신 누구야. 부끄럼 많은 내 아내는 어디 있지?”

야닉이 귓가에 대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간질거리는 숨결마저 자극으로 다가왔다.

차오르는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제인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랑해.”

“응?”

귓불을 잘근잘근 깨무느라 제대로 못 들었는지 짧은 물음이 되돌아왔다. 한번 바깥으로 꺼낸 말은 이제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었다.

“사랑해, 야닉. 사랑해.”

제인은 세상을 통틀어 가장 눈부신 눈동자를 똑바로 보고 마음을 전했다.

시간이 멈추고 아무도 없는 세상에 오로지 사랑한다는 고백만 남은 것 같았다.

“…….”

말에 중력이 실린 것도 아닌데 야닉은 무게감이 벅찬 듯 고개를 떨구었다. 예상보다 더 큰 반응이었다.

“잠깐만…. 잠시만 이대로…….”

제인은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야닉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그대가 없는 세상은 온통 겨울이었다고. 사실은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목 언저리에서 조그맣게 고백하던 남자는 몹시도 뜨거웠다.

요동치는 감정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마력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인은 이대로 야닉의 품에서 뜨겁게 타오르다가 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먼 곳에서 튼 새벽빛이 요새 위로 떠 오른다. 언제고 밤이 찾아오겠지만 더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재회에 기쁨에 흠뻑 빠져든 두 사람 앞에는 몇 달 후에 찾아올 축복과 함께 오래도록 긴 행복만이 남아 있었다.

* * *

[대한민국의 마지막 주자, 한송이 선수가 피날레를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그 꿈이었다. 언제 또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벌써 4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선고등학교 1학년의 자랑스러운 양궁 국가대표 선수죠. 앞선 예선과 본선에서 내내 만점을 쏘아 올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에이스! 믿습니다!]

늘 같은 목소리가 순서대로 재생된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송이야, 안녕.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이네.

장밋빛으로 물든 통통한 뺨, 새초롬한 눈매,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자세.

그래. 나는 이렇게나 예쁜 아이였지.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과거의 나를 꼭 안아 주고 싶다. 열심히 잘 살았다고, 그러니까 혼자 아픈 건 이제 그만하라고.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말이다.

[긴장된 표정의 한송이 선수. 아무래도 자국에서 열리는 준결승전이다 보니 관중석의 야유가 어마어마한데요, 부디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사방을 둘러싼 병사들이 위협적으로 바닥을 쿵쿵 찧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거의 패닉이었지.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다.

막무가내로 사람을 납치해 놓고 마력 양을 가지고 급을 나누는 행위라니, 내가 마지막 소환자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시즈 오베라가 황제가 된 후 4년에 한 번씩 이방인을 소환하던 제도가 폐지되었다.

소환에 관한 자료들을 일제히 소각하고 연구과 실험에 참여했던 황실 마법사들은 서약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거기엔 물론 포라킨 단장님의 손자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는 이방인의 힘과 능력을 빌릴 수 없게 된 시즈가 불만을 늘어놓긴 했지만, 야닉과 함께 황궁에 다녀온 뒤론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야닉이 귀환석을 써서 돌아온 다음부터 그는 어디를 가나 나와 함께 다녔다.

단 하루라도, 반나절 거리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항상 일은 자기가 없을 때 터졌다고 토로하는 게 기특해서 아무도 안 볼 때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다가 붙잡혀서 하마터면 서재에서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다.

델피온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는 무사히 제후 자리를 물려받았다.

제국의 땅을 되찾은 공을 치하받아 대공 작위까지 얻어냈다. 언젠가 김유정이 말했던 대로, 3황자는 진짜 ‘북부 대공’이 되어 버렸다.

황비님은 그가 없었던 6개월 동안 피의 숙청을 통해 굳건히 다진 자리를 넘겨주셨다. 아이노스에서 온 악마의 여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 따윈 일체 신경 쓰지 않는 강한 분이었다.

황비님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야닉이 대영주가 되자 잔존하던 보수파 장로들이 슬금슬금 그를 찔러 보기 시작했다. 구워삶아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인지 간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목표물은 만만한 나였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나는 내 출신과 뿌리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 노인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화살을 쏴서 낡은 생각을 쪼개 버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밀가루처럼 하얗게 변한 안색들을 보고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다음날부터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야닉이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보냈다고 들었다.

나중에서야 그에게 ‘악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생겼다는 걸 알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난 다음부턴 잠잠해졌다.

[경기장에 바람이 좀 부는데요, 시간은 많으니 한송이 선수 차분하게 쏘길 바랍니다.]

아, 맞다. 지금 꿈을 꾸는 중이었지.

한송이가 활을 든다. 조금 있으면 손을 놓을 테고 그다음엔 휘청이던 화살이 날아가 5점에 박힐 것이다.

나는 이제 한송이를 연민으로 바라보았다. 실수 한 번에 인생이 무너졌던 17살의 내가 쓸쓸히 서 있었다.

‘괜찮아. 너는 다시 일어설 거고 다시 웃을 수 있어. 신기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염원하던 가족도 만들게 될 거야. 실은 너한테만 살짝 말하는 건데, 조만간 가족이 한 명 더 늘어날 계획이야. 첫째는 야닉을 쏙 빼닮은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이번에는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

날카롭게 눈을 빛내던 한송이가 내 말을 들었는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손에 활이 들려 있었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맞아. 내가 한송이였지.

경기장에 부는 거친 바람.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타국의 관중. 시선 끝에 자리한 까마득히 먼 과녁.

제인은 숨을 멈추고 천천히 팔을 들었다. 손에는 리커브 보우 대신 다위가 만들어 준 활이 들려있었다.

수없이 외쳤던 바람을 마침내 흘려보내고 시위를 놓았다. 공기를 가르며 멀리 날아간 화살이 어딘가에 콱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인은 점수판을 확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5점이든 10점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최선을 다한 지금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저 멀리 야닉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금관화로 꾸민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립한 관중들이 손뼉을 쳤고, 하늘에선 금색 컨페티가 봄날의 꽃잎처럼 휘날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은퇴식에서 제인은 허리를 깊게 숙이고 지켜봐 준 모든 이에게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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