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히로인은 싫어(3) (3/115)



〈 3화 〉히로인은 싫어(3)

툭-

문을 열고 나가자 머리 위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뭔가 싶어 손으로 집어 들자 보이는 건 분홍색의 꽃잎,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

영락없는 봄이구나, 바람에 날려 분홍빛 꽃잎이 하늘을 수놓았다.
쏟아져내리는 비처럼, 허나 부드럽게. 코끝을 간질이는 꽃가루에 재채기를 하기도 잠시.
고개를 들어 만연한 봄을 맞이했다.


입학의 계절, 시작의 계절.

이것저것 칭하는 말이 많다만, 봄이 기분 좋은 계절임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나도...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그냥 감성에 젖어 있을테지만.


그럴 수야 없지. 플래그를 피해야하니까.


주변을 둘러보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간에, 일에 치이며 쫓겨다니는 사람들.
머리색이 알록달록하다는 것만 빼면, 내가 살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엇."

쿵-

정정, 정확히 말하면 '이능'빼고 전부 비슷했다. 6m? 그즈음 되어보이는 사람이 근처를 지나간다.
바위로 뒤덮인 피부하며, 속옷만 겨우 입은 그 모습이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지만,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건 오직  하나. '이능'에 물든 이 세계엔 그마저도 당연한 일인 걸까.

자세히 보면, 특이한  많았다. 예를 들어 저 멀리 날아다니며 싸우는 사람들. 복면을  사람을 둘러싼 채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공중에 둥둥, 하고 떠 있는 사람. 땅에서 여러 개의 손을 뽑아내어 총을 겨뉜 사람. 그 외에도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코트를 입은 채 검을  사람.

누구지, 하고 중얼거리는 찰나 옆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어로다!"


히어로구나. 하기야, 평범한 사람이라 보기엔 힘들었으니. 그러면 중앙에 복면을 쓴 사람은 빌런이겠지.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당장이라도 싸울 듯 기세를 내뿜고 있음에도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함은 없었다.
이런 광경을 자주 볼 수 없는지 그저 신기해하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기대하는 얼굴뿐.


"...이래도 되나?"

만약 저 히어로라 불리는 사람들이 약간 실수해서, 빌런이 누군가를 인질로 잡는다면? 혹시나 모를 사고가 생겨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기라도  듯, 사람들의 태도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평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물론 하루만에  평범함에 적응할리는 없기에, 나는 굉장한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이능을 다루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잘 실감이 나질 않았으니까. 꿈에 들어와 걷는 것 같았다. 너무 생생해서, 고통마저 느껴지는 그런 꿈.

구경하느라 잔뜩 붙어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헤쳐나간다. 간혹  교복을 보고 '너도 히어로 지망생이니?' 하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 시선을 돌렸다.

나도 저렇게 태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할 게 너무 많은  아닌가 싶다.

제적을 피하기 위해 내 나름대로 열심히 이능을 다뤄야 하고, 주인공에게 꽂힐 플래그도 열심히 피하는 한편 주변 인간 관계도 잘 다져야 했으니까.


...혼자가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왕따는 조금 싫어서.


"흐아..."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에 시선이 닿았다. 낮게 올라와 있는 거뭇거뭇한 건물들 사이로 솟아오른, 흰 색의 건물. 나랑 똑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맞게 왔나 보네."

길을 잘 못찾는 편이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서 왔는데. 다행히 이상한 곳을 알려주지는 않았나 보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었을 때 눈 앞에 보인 건. 엄청 거대한 교문 이었다. 분명 사람의 키는 커봐야 2m도 안되는데, 어째서  교문은 이렇게 큰 걸까.


태극기를 걸어놓으면 국기계양대라 해도 믿을 만큼 큰 교문 이었다. 그렇게 교문을 멍하니 보기를 잠시,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멍하니 있어서 뭐라 그러려는 건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머리를 한 남자가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냐."

딱히 대화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중얼거리네.  모습이 퍽 웃겨서 슬쩍 웃던 중,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흰 머리, 그리고 병신같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투. 영락없이...주인공의 특징이 아닐까? 팔뚝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점점 보면 볼수록, 저 사람 주인공이잖아. 준수한 외모, 적당한 키. 거기에...허리춤에 있는 검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ㅡ 나는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세상에, 입학식 시작도 전에 만날 줄이야. 메인 히로인이라 이렇게 접점이 빨리 찾아오나?
아니, 분명  만남은 조금 더 뒤에 있었다. 굳이 먼저 플래그를 꽂아줄 이유는 없지.

혼자 열심히 이 상황을 무마하며, 곧바로 학교 내부로 들어섰다. 뒤에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았지만 일단 무시.
역시 겉으로 보기엔 내가 아는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돌아다니는 학생들, 선생님들 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끔 사람과는 거리가  이들도 있긴 했지만, 모두 그런 존재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 곧 입학식이 시작되니까, 여기 있는 표지판을 보고 전부 대강당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어?"

주변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째 옆에서 소리치는 것마냥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도, 그렇다고 마이크를 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게 '이능'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참 편하네, 인간 스피커라.


"대강당...대강당..."


표지판을 따라가며 대강당으로 가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대강당으로 가야하지? 물론, 나는 모두가 '네'라고 할 때 같이 '네'라고 하는 전형적인 인간이었다.
단순히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아니라...이대로 가다간 정말, 히로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입학식에 가면,  거기서 하라는 걸 따라 할거고. 그렇게 하고 나면 반 배정이 나와서? 주인공이랑 같은 반이 되겠지.

"그건 좀."


하지만, 입학식에 가지 않는다면?  배정이 시작될 때 내가 없다면? 반 배정은 학생의 손으로 직접 쪽지를 뽑아 배정된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형평성따윈 개나 줘버린, 하지만 학생 입장에선 가장 공평한 방식.
원작에서는 아이샤 손으로 직접 쪽지를 뽑아 주인공과 같은 반이 되었지만, 내가 뽑지 않는다면?


얼굴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히로인이 되는 일 따위 없지 않을까?

우뚝-

그대로 대강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어차피, 입학식은 그저 행사일뿐- 출석을 체크하지도 않는다. 교복을 꼼꼼히 입은 건 교문 앞에서 검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지만.
입학식에서 출석 체크를 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주변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입학식은 그냥 안갈래, 같은 말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완전 합법이라는 소리다.

주인공은 뭐, 입학식에서 반배정이나 하라 그러고. 아, 가슴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한결 풀어지는 기분이다.
아무리 여자의 몸이라도, 한 때 남자였던 사람이다. 내가 주인공이랑 엮여서 막, 막 사랑을 하라고?

"그럴리가."


남자였던 시절만큼의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그렇다.
근데 이런 몸이면 여자랑 사랑하기도 조금 그렇지 않나? 역시 난 혼자가 어울려. 응.

그렇게 다시 밖으로 나오자, 아까와는 달리 조금 한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들 입학식에 갔을테니까 그렇겠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학생들이 보여 영 쓸쓸하진 않았다. 건물에서 더 뒤로 나아가자 학생들이 걸으라고 만들어 둔 것 같은 길이 보였다.
쭈욱- 깔린 벚꽃 나무 사이로 뚫린 길.


예전에 여자친구 생기면 이런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여자가 되어서 이런 곳을 걸어도 되는 거냐.
그래도, 이렇게 혼자 걸으면 생각하기 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주인공을 어떻게 피해야할지.


"근데 생각해보면 같은 반이 아니니까.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아이샤와 주인공의 플래그는 같은 반 이기에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벗어난다면?
...벌써 끝난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히로인만 아니면 여자의 몸이 무슨 상관이야. 예쁘고, 능력 있고. 집이야 가난하지만, 나중에 히어로 되면  버니까.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 싶다. 쉽게 끝날 줄이야. 그런 거면 아까 그렇게 고민 안해도 됐잖아?

"저기?"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한번 들어본 것 같다는 점에서 걸음이 멈추고.

"아까 우리 보지 않았어요?"


아까 교문 앞에서 들었던 목소리라는 부분에 고개가 돌아가고.


"......."
"...어, 아까도 그렇게 보시던데......"

그 얼굴이, 내가 아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내 표정이 잔뜩 구겨진다.

네가 거기서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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