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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히로인은 싫어(4) (4/115)



〈 4화 〉히로인은 싫어(4)



녀석의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리고 마주치는 푸른 색의 눈,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짓는 녀석은 아무리 봐도 선수에 가까웠다. 물론 본인이야 그 점을 잘 모르겠지만, 여자 입장에서 저렇게 생긴 남자가 초면에 웃어준다면 안 넘어가기 힘들지.


...저런 얼굴이니 하렘물을 찍는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참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무감각, 남자가 웃는 게 뭐라고. 그냥  때 때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막 세게 때리고 싶은 건 아니고, 적당히. 나를 차라리 미친년이라 생각하고 멀어질 만큼?

막상 마주치니 심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주변인에게 호감을 살 수 밖에 없는 오오라를 막 내뿜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마주치면 쌍욕이라도 박으려고 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입이 꾹 닫혔다. 심한 말을 할 수가 없는 얼굴이잖아...그랬다간 괜히 나만 나쁜 사람이 될  같은데.


내 속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아까 빤히 쳐다보시길래. 뭔가 할말이 있나 싶어서 따라왔어요. 근데 입학식은 안가세요?"
"...안쳐다봤는데?"

잠깐 쳐다봤다고 해서 따라와도 되는 거냐?

"그런가요...? 제가 시선에 조금 민감한 편이라, 그런 걸 착각하진 않는데."
"머리가 하얀색이라 잠깐 본 것 뿐이야. 근데, 그거 물어보려고 따라온거야?"

어이가 없었다. 잠깐 쳐다봤다고 그걸 따라와?  지금 입학식에 있어야 하는데 왜 날 따라온 건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째려봤는지, 녀석은 아하하, 하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건가?

"무슨 의미야?"
"아니, 이거 떨어트리셨더라구요."

펼쳐진 손 안에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이게 언제 떨어진거지? 설마...아까 교문에서 뒷걸음질 칠 때 떨어진건가.


"...하아."


생각대로 되는  없네. 주인공을 간단히 떨어트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렇게 쉽게는 무리였나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다. 주인공을 지금이라도 입학식에 보낸다면?

"준 거는 고마워, 근데...이제 넌 슬슬 입학식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음. 굳이 그래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날 바라봤다. 뭐 어쩌라는 거지, 도무지  성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대답을  걸까? 자유분방한 성격이긴 하지만, 입학식같은 행사에는 꼬박꼬박 출석했는데.


나한테 존댓말 쓰는 것도 거슬린다. 일부러 호감도 깎으려고 반말 썼는데, 왜 존댓말이지?
어질어질하다. 아무리 내가 보던 소설의 주인공이더라도, 히로인 대 주인공 입장에서 대면하면  대처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전 제논이라고 해요. 음, 뭐라 부르면 될까요?"


제논이라, 그러고보니 주인공 이름이 제논이었지. 내 앞에 있는 녀석이 주인공인 건 완전히확실해진 것 같다.

"...아이샤. 아이샤라고 불러. 근데 왜 아까부터 존댓말해?"
"그냥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존댓말 하는 편이라서요. 아니면, 편하게 말할까?"


거짓말, 다른 사람한테는 초면부터 반말 했잖아. 나 혼자 니 이야기를 200화를 봤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다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 나한테만 이런 특별 대우를 하는거지? 야, 나도 초면이잖아. 그냥 편하게 대해...! 제발!

"알아서 하든가."


선을 긋고 싶었다. 딱히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가까이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호감도가 쌓이는 것만 같아서,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봤자 호감도 -500에서 -400 정도겠지만. 남자에게 호감이 쌓여가는 이 불쾌한 감각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차피 할 말도 없고, 나한테 이걸 돌려준다는 용건도 끝났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대로주인공을 지나쳤다. 얘가 입학식에 나왔다면 내가 입학식에 가면 되지.

...따라오지 마라. 제발.



#



대강당으로 들어서자 아직 입학식이 진행중이었다. 저 멀리 선단에 서있는 사람이 교장인가. 저 사람이 예전에 꽤 유명했던 히어로라던데.
그게 정말이라는 듯 학생들은 하나같이 교장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도 배울 점을 찾는 건지, 아예 공책에 필기까지 하는 애도 있었다.


저 사람 이름이...뭐더라.



학생들이 교장의 훈화를 이렇게 열심히 들을 정도라면, 꽤 유명한 수준이 아닌  같은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직 제논이 여기까지 온 것 같진 않고. 저 훈화가 끝나야  배정을 시작할 텐데 말이다.
두 손을 꼭 모아서,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빌었다. 제발 교장 입 좀 막아달라고.


그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걸까,  교장의 훈화가 끝나고 반 배정을 위한 기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복권방송에서 공을 꺼내는 듯한, 그런모양의 기구. 설마 정말로 저기서 뽑는 건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  세상이더라도, 배정을 저따위로 정하는 게 정말 맞는건가...하는 그런 의심.

"...음?"

하지만, 자세히 보자 뭔가 다르다는  깨달았다. 공이 무수히 많이 쌓여있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저 기구 안에 들어가 있는  오직 하나의 공.
그제서야 나는 반 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전부 떠올릴 수 있었다. 각자의 이능과 적성, 성격등 여러가지를 파악하여 반을 배정하는 기구.
정확히는 마도구라 하는 게 맞겠지.

힘이 탁, 하고 풀렸다.

그럼 걔가 여기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아니잖아. 정해진대로- 내가 제논과 같은 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까 풀렸던 가슴 속의 응어리가 다시 단단히 굳어져 숨이 턱 막혔다. 내 완벽한 계획이 이렇게 깨지다니,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더 안좋았다. 원래라면 없었던 만남, 아까 그 길에서 주인공과 마주쳐 대화까지 했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플래그가 박혔을지도 모른다...!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겨우 참아내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시야를 바로잡았다.아이샤랑 주인공이 완전히 맺어지는게 언제 쯤이었더라.
그래, 아마 입학하고 3달 정도 지난 뒤였을 터였다. 그 전까지는 그냥 썸만 타는 사이였지만. 아무튼 나는 썸을 타줄 생각도 없으니.
일단, 주인공과 마주치는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예 불가능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 학교 다닐  얘기를 들어보면, 같은 반이지만 이름도 모르는 애는 하나씩 있었으니까. 내가 주인공에게 그런 존재가 되면 어떨까?
자연스레 관심도 멀어지고, 관심이 멀어지면 플래그도 자연스레 피해지고.

'좋네.'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 정실에서 탈출할 기회는 많으니까. 조금 편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학생들은 각자 자기 반을 확인하며 친구들을 찾아가는 듯 했다. 슬슬 줄도 짧아지고,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샤는 소설에서 A반 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간다면 A반 일거다.

...제논과 같은 반이라는  조금 걸리지만, 차라리 A반이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스토리에서 주로 나오는것이 A반이고, 그만큼 친해지면 스토리 후반부까지 함께 싸울 애들도 많았으니까.
뭐...순수하게 '친구'를 목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같았다.


한 번쯤은 친구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게 제논만 아니면 된다.

"아이샤, 이리안."

내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나는 그 익숙한 기구 앞에 섰다. 영락없이 복권 기계인데, 이런  마도구라니. 이게 판타지?

"손을 집어 넣고, 눈을 감으면 반 배정이 끝날 겁니다."

눈을 안대로 가린 사람이 기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말대로 위에 뚫려 있는 구멍에 손을 집어넣자 동그란 공이 만져졌다.
이제 눈을 감으면 되나?

그렇게 눈을 감자, 다시 학교 강당이 보였다.
....아니, 눈을 감았는데 왜 보이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자 방금 내가 서있었던 그 대강당이었다.다만 다른 점이라면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
오직 손을 넣고 있는 기구와,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는 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어?"

어느정도 짐작가는 부분은 있었다. 주인공인 제논이 반배정을 받을 때, 순간 자신이 있는 장소에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했었으니까.
그 위화감은 아마 이 이상한 장소 탓에 느껴지는 거겠지. 그렇게 멀뚱히 서있기를 잠시, 눈 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반 배정]

이윽고 올라오는 룰렛, 아니- 반을 룰렛으로 정하는 거냐. A가 절반, B가 2할,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 글자들이 칸을 나눠먹고 있었다.
이 룰렛이 시사하는 바가 뭘까? 너는 A반이다,  그런 건가. 그렇게  의사와는 상관없이,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르르-


딱히 긴장되진 않았다. 5할이라는 확률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으니까. 거기에 이미 확정된 원작도 있고.
내 예상대로, 룰렛은 반전 없이 한 글자를 보여주었다.


[A]


이럴거면  룰렛을 돌리는 거야. 예전에 하던 핸드폰 게임도 그렇고, 확률을 보여주면 뭐하나. 결국엔 내가 원하던 거만 쏙 빼고 나오는데.
제논도 아마 A반이겠지. 이제 슬슬 체념할 시간이었다. 반이 뒤바뀔 가능성을 살포시 놓아주고, 어떻게 하면 멀리할지. 그 것만 생각해도 충분했다.

눈을 깜빡이자 다시 수많은 학생들이 있는 대강당으로 돌아왔다. 내가 쥔 공에 떠올라 있는 문자는 역시나 A.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A'라고 적혀진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저 사람이 A반의 담임이었나? 내가기억하는  여자였던 것 같은데.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A라는 팻말을들고 있는 사람 앞 쪽에 보이는  색의 머리. 다른 사람들의 머리색과는 명백히 달랐기에 눈에 더 띄었다.
...쟤는 도대체 언제 온 거야?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주인공의 행보에 한숨을 내쉬며, 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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