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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관심은 싫어(1) (5/115)



〈 5화 〉관심은 싫어(1)

무시하자.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제논이 무슨 말을 걸던- 어떤 반응을 보이던, 그냥 무시하고 내  일 하자. 괜한 반응을 보여주기 싫었다. 혹시라도 그게 녀석한테 '여지'로 해석된다면...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일부러 사람 들 틈새에 섞여 움직였다. 눈에 띄지 않도록, 다행히도 키가 살짝 작은 편이라 그런지 남자들 뒤에 있으면 완전히 가려졌다. ...원래 키는 좀 큰 편이었는데. 183정도에서 160 즈음의 키로 바뀌니까 도저히 눈높이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냥 서있어도 탁 트인 시야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젠 까치발을 들어도 앞을  수가 없으니.  것도 나름 단점인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상황에선 살짝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에게 섞여 움직이자 제논과 마주치지 않고 A반 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혹여나 마주쳤다면, 가볍게 엿이나 먹여주고 살짝 빠져나올까 생각했는데. 보자마자 욕하는 여자라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지.

아까 그냥 얼굴을 보자마자 욕 할 걸,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치면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그런 것을 막기라도 하듯,  닫히는 입. 상처주지 마- 라는 생각이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생각해보면 빌런들은 잘만 하던데. 왜 나는 못하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앞 쪽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병신 같은 새끼.”
“......”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실실 웃는 거야?”
“네가 무슨 상관...”
“아니, 상관있지. 늘 그렇듯 얼굴이 썩어있으면 모를까, 기분 좋은 얼굴이라면 그냥 둘 수가 없거든.”

제논을 바라보며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자,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제논까지. 주변 사람들은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여자 탓에 주변을 둘러싼 채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욕 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여기까지 입학한 거야? 네 주제를 모르는 건가?”
“...그걸 왜 네가 신경 쓰지?”
“몰라서 묻는 건가. 네 어미 탓에 더러워진 게 어디 핏줄인지 까먹은 거야?”

...하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일이 터질 거라는 걸 깨달았다. 주인공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역린, 그걸 건드린 시점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콰앙-!

제논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절삭음이 아닌 폭발음이 들린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움직임이라는  명백했다. 녀석의 이능은, 닿는 것을 폭발시키는 거니까.

그렇지만,  상황 자체에 미묘함이 느껴졌다. 입학 첫날부터 주인공이 이랬다고? 아무리 초반부 내용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지만, 이런 내용은 없었다. 도대체...어디서 달라진 거야.

순식간에 일어난 싸움에 학교는 수라장이 되었다. 제논이 이능을 다루는 실력은, 아무리 중견 히어로들이라 해도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제논과 싸우는 저 여자. 제논의 일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허나 그런 공격을 가볍게, 심지어는 슬쩍 웃으며 받아내고 있었다.

“네 어미를 욕하는 건 나름 화가 나는 건가? 그렇다고 화를 내면 안 되지. 입장의 차이라는게...있잖아.”
“닥...쳐!”

공간을 울리며 여자를 향해 수많은 폭발이 일어났다. 단순히 손으로 폭발 시키는 것도 위력이 상당하지만, 저렇게 검을 통해 폭발 시키는  그 이상의 위력을 낸다. 쿠구궁- 더 이상 대강당의 결계도  폭발을 견뎌내기 힘든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상대하는 여자쪽도 만만치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 무슨 이능인지는 몰라도, 폭발을 전부 맨몸으로 견뎌내는 걸 보면 증강계인가.

저걸 그냥 무시해야 하나?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저 싸움에 쉽사리 다가가고 있지 못했다. 휩쓸린다면 신체에 지장이  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 싸움을 이대로놔둘 수도 없었다. 입학식 첫날부터 저러면, 아무리 이능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는 아카데미라한들 제제를 피할  없을테니.

-말려야 해.

내가 왜? 가슴 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주인공이 이대로 사라진다면, 나는 오히려 좋은 게 아닐까. 히로인이 될 필요도, 그 비슷한 관계로 엮인 걱정도 안해도 되잖아. 그러다가 문득, 내가 손을 뻗고 있음을 깨달았다. 싸움을 말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하."

웃음이 터져나왔다. 기뻐서 웃는 게 아니라,  상황이 어이 없어서. 아직 나는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거구나. 시선을 옮긴다, 저 멀리- 파편이 튀기고,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흐른다. 아프겠지. 그래, 아플 거야.

-아파.

갑작스레 떠오른 옛 기억에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발걸음이라는 작은 소리는, 폭발이라는 굉음에서 조금도 포착되지 않는다.

뚜벅-

나라는  사람이 인파를 뚫고 걷는 것은, 싸움을 그저 구경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티조차 나지 않는다. 그렇게 싸우고 있는 녀석들의 거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에야,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쟤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쟤는 누구지?’ 같은 의문 섞인 시선, 당장 저 위험한 장소에서 나오라며 재촉하는 손짓. 그리고,

콰앙-!

아직 내 존재를 인식 하지 못한 채 싸움에 열중하는,  두 망나니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부정한들, 결국 저 싸움을 말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왜 내가 이런 걸 해야 할까. 답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 다치는 게 싫다. 알지못하는 미래가 오는 게 싫다. 그러니까, 말리는 거야. 내가 아는 미래로 이끌  있기를 바라며.

파지직-

솔직히 이능을 처음 떠올렸을 때는 내가 이걸 다룰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난생 처음 느끼는 감각이니까. 애초에 초능력을 다룰 거라 생각하며 연습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 의문은 쉽게 사그라 들었다. 이런 것도 재능이라 해야 할까, 이능을 깨닫고 다루는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아이샤의 이능에 적응했다.

투콰앙-

터지는 폭음, 흩날리는 잔해. 땅 위에서 펼쳐지는  단위의 격전을 나는 제압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가진 이능은 제압에 특화되어 있었으니. 얼음을 다루는 것, 실로 단순한 이능이었지만. 이능의 세계에서 단순함은 특별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로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할  있으니까.

콰직-

손끝을 타고 얼음 결정이 퍼져 나간다. 작은 고드름에서, 이내 땅을 뒤덮는 혹한으로. 대기를 뒤흔드는 폭발이 사그라들고, 흩날리는 잔해마저 얼리며- 천천히, 두 사람을 삼킨다.

쏟아지는 냉기에 싸우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왜, 뭐. 그러게 왜 입학식날부터 싸우고 그래.
일순간 불만 어린 시선이 닿았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얼음의 크기를 키워 나갔다.

콰직- 제논의 검이 닿은 부분이 터져 나가고, 그에 맞춰 여자도 얼음을 부수기 시작했다. 얼음이 부서질 때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마 이능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게 내 정신력이라서 그런 건가. 그래도, 계속 부수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하아...”

체온이 내려가고, 차가운 숨결이 내뿜어졌다. 체온이 내려감에 따라  이능은 더욱 증폭되고, 하여 냉각은 더욱 빨라진다. 얼음을 조각내는 폭발마저, 얼음을 부수는 단단한 몸뚱이마저. 결국 한기에 잠식된다.

쩌적-

완벽히 얼어버린 두 사람. 얼어버린 제논과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겠지. 이렇게 얼려놓은 광경을 바라보니  이능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이쯤은 되어야 메인 히로인이라  하지 않겠어.

물론 그런 거 할 생각 없긴 하지만.

내가 서있던 자리부터, 두 사람이 싸우던  자리까지. 그 전부가 단단한 얼음덩어리에 갇힌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내가 이런 걸 했다는 생각에 조금 뿌듯하기도 하고, 이능을 제대로 써본 경험이 생기자 비로소 빙의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만든 나를 향한 시선, 아까 싸움을 말리려고 나섰을 때보다 더욱 쏠린  시선은 참...부담스러웠다. 호기심, 질투, 선망, 동경, 그런 질척한 감정들이 섞여 있기에-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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