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관심은 싫어(5)
“몇 도야?”
“......36.3도.”
정상이네, 워낙 튼튼한 녀석이니 감기에 걸렸을 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싫다 해도, 나 때문에 녀석이 다치는 걸 원하진 않았으니.
...근데, 아까부터 자꾸 날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을 하던가. 녀석의 입에 있던 체온계를 휙, 잡아채며 살짝 흘겨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있긴 하지.”
할 말이 있었구나.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길게 해서 좋을 게 없긴 한데...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엔 좀 그렇긴 하다. 할 말이 있다는데 그냥 가버리면, 괜히 무안할 거 아닌가? 내가 할 말이 뭐냐며 어깨를 살짝 으쓱이자 제논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 다쳤어?”
“다쳤으면 그냥 평생 얼려뒀겠지.”
“...그것도 그렇겠네.”
만약 그 폭발에 내가 휩쓸렸다면, 그렇게 간단히 용서하지는 않았을 거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얼려놔서, 용서하고 싶을 때 쯤 녹였을 거다. 그럼 녀석은 감기에 걸렸겠지. 뜨거운 열에 시달리며...기침도 계속 했을 거다.
...이런 상상을 하는데 도대체 왜 가슴이 답답한 걸까. 이 이상한 감각에 답답함을 느끼며 다시 제논을 바라보았다.
“그게 다야?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없어?”
얘 성격에 거의 처음 보는 사람을 걱정하는 건 드문데, 아마 다른 할말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가면 모를까, 지금제논이 다른 사람을 신경쓸 겨를이 있나 싶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 아마 그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을테니.
“아니, 그 게 다야. 네가 안 다쳤으면 됐어.”
“...정말?”
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내 눈매가 좁아지자 녀석은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뭐, 할 말이 없다면 나야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는 할 말 없어?”
“...내가?”
너랑 지금 같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도 미칠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다. 내가 고개를 젓자 녀석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싸웠는지...라던가.”
“별로.”
“...정말로?”
“질책하거나, 뭐라 할 마음은 없어. 싸울 만 하니까, 싸운 거 아냐?”
녀석이 입학식부터 싸운 것은 꽤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행동을 잘못됐다,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녀석에게 어머니가 무슨 존재인지 알고 있기도 했지만...뭐, 부모님이 욕먹었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리라.
“...그렇다고 해도, 입학식 날부터 그렇게 싸우는 건 이상하지만.”
“알아...우리가 싸우는 게 뭐 적당한 싸움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해 받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녀석이 싸운 이유 같은 건 나 말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 제논에게 어머니가 가지는 의미 라던지. 그리고 아까 얼핏 들었던 ‘카르멘’ 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보면,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런 싸움은 이미 예견 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에드윈 카르멘, 제논의 아버지이자- 이 세계의 탑히어로. 제논이 그런 아버지에게 가지는 적개심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좋은 이능을 얻기 위해 이루어진 일종의 정략혼, 허나 자식을 낳은 제논의 어머니에게 주어진 것은 핍박과 천대뿐 이었으니...
‘탑히어로’라는 위명은 그에게 향할 비난을 그대로 제논의 어머니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좋은 씨앗을 받기 위해 천박한 몸뚱이를 놀렸다-라던가, 탑히어로를 속이고 자식을 잉태한 창녀. 이런 것 외에 여러 수식어들이 있지만, 그걸 세계 밖에서 소설로써 바라보던 나조차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들뿐이었다.
하물며 그 것을 막을 여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질까 손을 놓은 에드윈 카르멘을, 자식된 입장에서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아무리 독자였던 나였지만 그 부분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아마 퇴학일거야. 입학식날부터 이렇게 싸웠으니, 아카데미에서도 그냥 두진 않겠지. 그 카르멘 가의 아이도...단순 정학으로 끝나진 않을 거야.”
고개를 숙인 제논은 덤덤히 퇴학이란 얘기를 꺼냈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이, 허나- 그 얘기를 듣는 내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의 퇴학이라, 단순히 내 입장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얘기일지도 몰랐다. 그대로 평생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히로인이 될 일도 없을테고, 적당히 졸업해서, 어쩌면 히어로로 먹고 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그렇게 둘 순 없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가. 주인공은 나중에 히어로가 된다. 결말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자기 아버지를 뛰어 넘어 탑히어로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주인공에 구원받는 이가 한둘인가? 빙의했다한들 이 세상을 단지 소설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아까 만난 레이샤도,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제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며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기껏해야 히로인이 되지 않겠다는 보잘것없는 목표 따위로, 미래에 녀석에게 구원받을 사람들을 내팽개쳐야 할까.
고개를 저었다.
퇴학은 안 돼. 이미 벌어진 일이 있으니 녀석에게 처벌이 내려지는 건 당연하다지만, 아예 이 아카데미에서 녀석이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선 안됐다. 히로인이 될 가능성이 계속 남더라도.
...까짓거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피하면 되니까.
“퇴학이나 제적은 안 돼.”
“...어?”
“...말했잖아, 싸울만해서 싸웠다고. 누가 다친 것도 아니야, 대강당이 무너진 것도 아니야. 이게 왜 퇴학까지 갈 얘기야?”
아카데미에서의 이능 사용에 대한 규정은 엄격하지만, 그렇다 해도 완전히 꽉 막힌 규정은 아니었다. 온갖 이능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기에,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을 터. 이런 싸움쯤이야 아카데미 내에서도 한두 번 겪는 사안이 아닐 것이었다.
시비를 건 것은 카르멘가의 여자 쪽, 그리고 제논의 사정을약간...밝힌다면, 제적은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녀석의 의지였다. 지금처럼 체념하고 제적해야지,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어느 정도 아카데미에 말해야 했다.
“먼저 부모님 욕한 건 걔 잖아. 그걸 얘기하라고, 걔가 먼저 잘못했다. 그래서 내가 공격했다. 학생들이 많은 장소에서 싸움을 시작한 건 반성하고 있다. 한번만, 용서해달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한다고 이해할 사람들일까.”
어른에 대한 불신, 그 지독한 감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와 마주치자 왠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한 녀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아카데미에 계속 다니길 바라는 사람이, 있긴 할까.”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처량해진 시선 끝이 허공에 닿았다.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는 녀석의 모습이 쓸쓸해보여서, 나는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있을 걸.”
차마 내가 그렇다고 말은 못하고,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녀석은 슬쩍 날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냥.”
“...아무튼,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퇴학은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래 이렇게 길게 말할 생각 없었는데, 길게 얘기했다한들 몇마디 수준이지만...약간 찜찜하긴 했다. 내게 떨어지지 않는 제논의 시선도 그렇고, 내가 방금 말한 부분에서 뭔가 실수를 했나?
호감도 깎으려고 살짝 틱틱 거리긴 했는데...
그냥 쟤가 나를 싫어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고민 따위 안 해도 될 텐데.
#
집으로 돌아오자 무언가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살던 집도 아닌, 그저 아이샤가 지내던 집일 뿐 인데도. 아마 오늘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입학 첫날부터 싸우는 망나니 새끼들 말리느랴, 내게 뒤처리를 맡기고 도망간 선생님 덕에 사람 둘을 양호실까지옮기느랴.
게다가 주인공이 퇴학 조치에 수긍하려는 걸 말리느랴. 뭐, 이제 오늘 처음 본 내가 무어라 말했다고 녀석이 들을지는 의문이지만. 만약 주인공이 아카데미에서 나가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뭘 어떡해...대신 굴러야지.”
과몰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뭘 그리 신경쓰냐고 할 수 있지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니까.
한 때였지만, 나도 히어로가 나타나길 염원했으니까.
...비록 나타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던 내가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와 히어로 지망생인 아이샤가 되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히로인, 뭐 그런 건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내가 남자랑 그런 관계가 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지...사실 중요한 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히로인 될 걱정 없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이 세계를 잘은 몰라도, 히어로의 대우가 뛰어나다 못해 영웅 취급을 해주는 건 알고 있었다. 히어로 DC 라던지, 히어로 연금, 히어로 전용 주택 등등...
빌런들을제압하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것이 히어로였기에 그만큼 좋은 대우가 따른다. 그런 걸 포기하면서까지 멀어지려는 것도 아니었고, 원작을 200화 가량 따라갔던 기억이 있는 만큼 그래도 내가 아는 상황을 겪는 게 낫지 않을까, 란 생각도 있었고.
입학식까지 끝낸 지금에 와서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주인공의 곁에서, 메인 히로인이라는 역할을 하기 싫은 것 뿐. 그냥 조력자 하면 안 될까. 도와주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말이다.
푸욱-
“으으으...”
배게에 머리를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루 만에 여자가 되고, 이능을 얻고, 주인공과 엮이고, 그 주인공은 퇴학 위기에 처했다. 원래라면 조용히 이루어졌을 입학식에 사건이 터진 것도 그렇고, 하나같이 꼬이는 이 전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심 받는 건 싫은데, 이게 다 주인공 탓이었다. 팡팡, 배에 덮여있던이불을 마구 발로 걷어차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켰다. 나 학교 어떻게 다녀...!
...그냥 머리를 비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늘은 쉬고, 생각은 내일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애써 잠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