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시험은 싫어(1)
[띵딩딩~굿모닝~띵딩딩~ 빠빠빠-]
텁.
잠이 덜 깨 어지러운 정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알람을 껐다. 내가 설정해둔 알람이 아니라 혹시 환각이 들린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플라스틱 박스에 알람이 설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며칠 듣다보니 이제 정겨운 소리가 되었다.
정신병 때문에 알람 환청을 듣던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내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쪽은 아포칼립스가 배경이라 빙의했으면 훨씬 골치 아팠겠지. 그런 세상에 빙의 안 한 게 어딘가 싶다.
이제 슬슬 여자의 몸에 적응해 가는데다, 학교에 제논도 안 보이니까 마음이 편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얘기해줬는데 자기가 퇴학인지 정학인지 어떻게 됐는지 얘기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뻔히 내가 학교에 나오는 거 알면서도,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다. 그것만 알려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지.
거울을 바라보자 내 입술이 삐죽 나와 있었다. 섭섭해 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섭섭해 하기보다는...그래, 주인공의 배은망덕함에 치가 떨리는 것 뿐 이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나는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뽀드득, 수증기가 가득찬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자 드러내는 내 모습. 새하얀 나신을 처음 봤을 때는 속으로 엄청 놀랐지만, 이제는 별 감흥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이쁘니까...기분이조금 좋아지는 정도.
잘생기고 예쁜데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냥 그 정도의 느낌만 들었다. 이제 아이샤가 나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해야 할까. 자신의 몸을 보며 욕정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이제 그 궤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말캉-
이 가슴도 조금 불편하고, 원체 가벼운 몸인데 앞 쪽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브레지어도 그렇고,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항상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팬티만 입고 싶긴 한데.
집이면 모를까 밖에서 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흐으읏...!”
가볍게 기지개를 편 뒤, 그대로 문 밖을 나섰다.
학교 갈 시간이었다.
#
원래 나이는 22살, 지금 나이는 17살. 한두 살도 아니고 5년의 차이였기 때문에, 파릇파릇한 애들하고 어울리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그 대상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라면.
처음에는 대강당에서의일을 기억하는 애들 때문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렸지만...뭐, 지금은 그냥 적당한 정도의 관심이었다. 딱 내가 원하는 수준이라 해야 되나. 우리 반에 누가 있어요? 라고 물어보면 대충 5번째쯤에 이름이 불리는 애매한 위치.
특별히 튀어 보이거나, 두각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나중에 빌런이 나타날 때도 힘을 숨긴다던가, 하는 멍청한 짓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작중 초반인 지금은 빌런이 나타날리도 없고...이능보다는 다른 부분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
그 ‘다른 부분’은 학생이란 신분에 걸맞게도 공부였다.
...씨발, 이걸 도대체 내가 왜 해야하는 걸까. 여자가 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몇 년 손을 놓고 있던 공부를 다시 하라니. 대학에 들어가서 했던 공부도 시험이 끝나면 가물가물하건만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내가 입학한 곳이 쓸데없이 명문인 터라, 그 난이도 또한 무지하게 높은 편.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에 쏟는 게 아니라면 쪽지 시험조차 따라가기 힘들었다.
“아이샤, 또 공부하는 거야?”
“응...딱히 할 것도 없잖아.”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공부만 하고 살아...너 집에 가서도 그렇게 해?”
문제집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내게 말을 건 여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너 그렇게 공부만 하면 안 돼! 안되겠다. 요 밑에생긴 휴게실 같이 가보자, 응?”
“나 이것만 풀고.”
“아아, 아이샤...제발...응?”
“...하아. 그래.”
내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탓에 팔이 축축해졌다. 녀석의 이능이 ‘달팽이’라 그런 탓이지만. 아무튼 그런 녀석이 이렇게 징징대면 나도 곤란한 터라 어쩔 수 없이 휴게실에 가자는 제안을 수락했다. 이 곳 내부를 둘러보는 것은 나도 흥미가 어느정도 있었으니.
자리에서 일어서자 녀석의 초록색 머리카락 일부분이 더듬이 마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으면 그렇다고 했었나. 그걸 살짝 건드리자 달팽이의 눈 마냥 바로 푹, 하고 머릿 속으로 숨어버렸다.
콕, 콕.
“아, 아이샤...그거 간지러워...”
“이거 느낌 좋아. 너도 해볼래?”
“내 머리카락이잖아. 바보야.”
그건 그래, 투덜대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살다살다 여자애랑 친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내 인생에 여자랑 접점이 생길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으니, 이건 여자가 되어서 생긴 장점이라 볼 수도 있겠다.
“프레이, 근데 너는 왜 껍질이 없어?”
“아, 껍질 보고 싶어?”
“응, 너 달팽이잖아. 보여줄 수 있으면 보여줘.”
내게 프레이, 라고 불린 여자애가 살짝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붙어있으면 몸이 축축해지고, 머리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더듬이 탓에 달팽이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껍질을 보고 싶긴 했다. 설마 진짜 달팽이처럼 잘 깨지진 않겠지?
쑤욱-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녀석의 등이 아닌 팔뚝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언뜻보면 그냥 방패 같은데, 이게 설마...
“응, 껍질이야.”
“...확실히 소용돌이 문양은 있는데.”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예상한 건 거북이처럼 등에서 껍질이 튀어나와 몸을 덮는 거였는데, 방패라니. 확실히 이 쪽이 더 실용적이긴 해보였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별로다.
“야, 네가 보여 달라 해놓고선 실망하면 어떡해?”
“아니- 그게 무슨 껍질이야.”
“너 설마 거북이처럼 등에서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응.”
“바보야, 그렇게 껍질이 나오면 히어로 활동을 어떻게 해.”
“잘.”
프레이는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한 번 흘겨보더니, 갑자기 내 몸에 착 달라붙었다. 아, 그렇게 붙으면 옷이 다 젖잖아...! 내가 몸부림쳐봤지만, 프레이의 몸에서 끈적한 점액이 나와 도저히 떨어트릴 수가 없었다.
“야아악...! 미, 미안하니까...!”
“아 몰라, 네가 ‘잘’ 떨어트려보던가.”
“그런 걸로 토라지면 어떡해!”
“응.”
어쩐지 아까와는 입장이 반대가 된 것 같은데, 슬쩍 얼음을 살짝 얼려 녀석의 몸에대봤지만, 프레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실실 웃으며 더욱 달라붙었다.
“아이샤는 샴푸 뭐 써? 냄새 좋네.”
“아니이, 떨어지라고 프레이...!”
“내가 떨어져야하는 이유 좀 말해줄래?”
능글맞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한 대 쳐주고 싶었지만, 곤란하게도 난 옷이 젖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나는 마이 없이 셔츠만 걸친 상태, 셔츠는 흰색. 그리고 내 속옷은...
“...나 오늘 브레지어 검정 색이란 말이야...”
하얀 색이 젖으면 투명해진다. 그러면 속옷이 비치겠지. 결국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걸 현타 온다고 해야 하는 건가 싶다. 내 기어가는 듯 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내 몸을 감싸던 끈적이는 감촉이 사라졌다.
“그...미, 미안해 아이샤.”
“....됐어.”
내 입으로 직접 속옷 색 얘기를 꺼내게 만든 프레이의 죄는 컸다. 어쩐지 붉어진 프레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확, 돌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같이 가줄게.”
“싫어.”
“아이샤아-.”
“갔다 온다.”
프레이의 점액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휴지로 닦아도 젖은 건 그대로겠지. 다행히 가슴팍이 완전히 젖진 않아서 검은 색이 살짝 비치는 정도였다. 아무튼 조금 화나면 맨날 몸을 붙여대니, 같이 다닐 때마다 곤란하게 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기껏해야 입학한지 2주 지났을 뿐인데, 이상하게 꽤 친해진 것 같다. 물론 프레이가 먼저 다가오긴 했지만...프레이마저 없었으면 완전 혼자겠지. 가끔 이상한 짓을 하긴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애였다.
그렇게 휴지로 몸을 대충 닦고 나오는 찰나, 분명 문을 열었을 텐데 웬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뭐에 부딪힌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날선 턱 선에 오뚝한 코, 새하얀 피부와 비슷하리만치 하얀 머리카락까지.
그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이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아이샤.”
항상 일자를 유지할 것만 같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녀석이 내게 환히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