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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시험은 싫어(2) (11/115)



〈 11화 〉시험은 싫어(2)

...얘가 왜 여기 있을까.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리에 굳은 채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지껏 학교에 나오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어디 보냐?”

조용히 중얼거리자 녀석이 흠칫하며 어깨를들썩였다. 내 눈매가 좁아지며, 내려가 있던 팔이 올라와 가슴팍을 가렸다. 아까부터, 녀석은 내 가슴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오해...”
“미친 새끼.”

자기가 당장 나한테 해야 할 말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만나자 마자 보는 게 내 젖은 몸이라, 치밀어 오른 화 탓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살짝 높아져 있던 호감도가 뚝, 떨어지며- 조금이나마 참고 있던 역겨움이 목을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무어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팔짱을 낀 채 몸을 살짝 틀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허우적거리며 아니라고 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꼴이란,  모습에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럼 도대체 어딜 본 건데?”
“그, 그냥 젖어 있어서 자연스레 눈이  것뿐이야.”
“...죽어.”
“...미안해.”

젖어있으면 오히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았어야지. 요 근래 여자가 된 이후 부끄러움이 조금 많아진 탓인지 누가  몸에 시선을 두는 것에 살짝 민감해졌다. 예전엔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안 썼는데, 괜히 부끄러워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몸을 대놓고 보다니, 나도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를 뻔 했다. 녀석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 얼려버렸...

아니, 제논이라서 넘어가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은 다른 중요한 얘기를 먼저 듣는 게 나으니까. 굳이 화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학교에 계속 나오고 있었던 거야?”
“음, 학교에 계속 나오긴 했지.”
“반에는 안 왔잖아.”
“갈 수가 없었어. 정학 도중에 반에 들어가 수업 받을 수는 없잖아.”

정학,  말에 좁아진눈이 살짝 커졌다. 퇴학은 피했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자기 얘기를 어느  털어놨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조금 풀리는  같았다. 속사정을 털어내면서 까지 퇴학을 피하려 한 녀석한테 화를 내는 건 조금...그렇지 않은가.

팔짱을 낀 것을 풀으며, 나는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흠칫 놀라며 멍청한 얼굴을 짓는 게 영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지.

“며칠 정학인데?”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야. 2주 정학이었거든.”

생각보다 적은 기한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

“내일부터 나오는 거야?”
“응.”

세상에, 나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마음 편히 있을  있었는데, 다시 같은 반에서 제논이랑 마주치게 생겼다. 자리를 구석으로 옮길까.

...근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면 상처 받을 것 같기도 하고.

골치가 아프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안주고 피할 수 있을지, 집에서 잠이라도 설쳐가며 생각해봐야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귓가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덕분이야.”
“뭐가?”
“퇴학 피한 거도 그렇고...이것저것. 그 때 네가 싸움을 안 말려줬다면, 정말 퇴학이었겠지.”

딱히 내가 뭘 한  없는데,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고맙다는데 그것까지 무어라  생각은 없었다.

“퇴학을 어떻게 피했는지  궁금해?”
“...네가 알아서  했겠지.”
“알려줄 수도 있는데.”

너라면,  말을 말끝에 붙인 녀석이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고 퇴학을 피한  텐데, 그런   나한테 말해. 소설에서도 누군가에게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한 건...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거나 마음이 있는 사람.

기껏해야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됐어. 그런 거보다 그냥 정학이라는 게 중요하지. 다행이네, 퇴학은 아니라.”
“...그러게, 다행이야.”

녀석의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에 걸린 미소 탓인지, 녀석의 인상이 전보다 훨씬 밝아진  같았다. 뭐, 기분 탓일 거다. 원작에서도 아이샤를 초반부터 알기는 했지만, 녀석이 진심으로 웃기 시작한 건 아이샤에게 마음을 준 이후부터 였으니까.

아무튼 제논이 단순히 정학이라는 징계에서 끝난 건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첫날부터 꼬일대로 꼬여버린 전개, 주인공이 있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근데 왜 여기 서있는 거야?”

아까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왜 여자 화장실 앞에 서있던 건가. 혹시 내가 모를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팔을 천천히 올리자 제논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오해라니까!”
“그럼  여자화장실 앞에 서있어?”
“...이거 보면 알잖아. 정학이니까, 교내 봉사 때문에 있는 거야.”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걸레를 보여주었다. 아하. 그걸 보니 얘가 왜 여기 있는  대충 알  같았다. 하기야, 정학이라 해도 아예 집에만 있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적당히 화장실 청소나 시켰던 모양인 듯 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이걸로 내가 궁금했던 건 끝, 그렇게 녀석을 지나치려 하자 녀석이 내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왜?”

갑자기 팔을 왜 붙잡는 거야. 내가 뭐하냐는 듯 살짝 흘겨보자, 녀석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
“뭐?”
“번...호  달라고, 그러니까- 그, 아는 사람이라곤 여기서너 밖에 없거든. 네 스마트 박스도 연락은 되니까. 다른 생각은 없고 그냥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
“자.”

나는 내 플라스틱 박스를 녀석한테 던졌다. 이게 스마트 박스였구나, 이름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스마트폰의 진화형 뭐 그런  아닐까. 그나저나 번호 달라하면서 뭐가 그렇게 말이 많은지. 녀석한테 번호를 주는 게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주인공의 전화번호였다.

아예 모르고 살 수도 없는 거지.

제논은 내가 던진 스마트 박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청한 얼굴로 스마트 박스를 만지작 거리는  영 답답해 입을 열었다.

“뭐해? 번호 안 줘도 돼?”
“아, 아니. 아니야.”

흠칫, 하고 놀라던 녀석은 이내 번호를 입력하고선 내게 스마트 박스를 건넸다.

“..음, 근데 저장된 전화번호가 없더라? 새로 샀을 리...는 없을텐데.”
“없지, 네가 처음이야.”

애초에 어떻게 쓰는 지도  모르는데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프레이 번호도 받아놔야겠네. 스마트 박스를 주머니에 넣은 뒤, 이제 프레이에게 가기 위해 고개를 들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눈도  마주치고, 스마트 박스에서 뭐라도 본 건가...? 나중에 한 번 확인 해 봐야겠다.

“어디 아파?”
“어- 아니, 음. 잘 가. 내일 보자.”
“...그래.”

아예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나는 등을 돌려 그대로 제논을 지나쳤다.


#

푸쉬익-

정말로 사람 머리에서 증기가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내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마치 증기기관차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른 머리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뿜어내고 있을 거라- 아마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 말에 담긴 의미란,  말 그대로가 분명할 터인데.

-네가 처음이야.

그 말이, 사람을 이렇게나 흔들 줄이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그냥 단순한 손짓에도, 평범한 대화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괜히 조급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모르겠다.

스마트 박스에 전화번호를 입력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부모님의 전화번호조차 없이 말끔한 주소록을 보며 순간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나처럼- 부모님을 여읜 건지. 단종  게 5년 전이니, 5년 동안 누군가와의 연락조차 없이 살았던 건지.

그렇게 쓸쓸히 살았으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사실 정학이 확정되었을 때, 아이샤를 찾아가 알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찾아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멀리서나마, 잠깐  전부였으니.

허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모순된 감정이 쌓여갔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려하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보곤 일부러 걸레를 챙겨 남자화장실에서 나오는 척했다. 내가 맡은 곳은 애초에 화장실이 아닌데도.

비어있는 주소록에 내 전화번호를 추가했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처음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눈앞이 하얘져- 그녀의 얼굴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을 때 무어라 대답했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다.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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