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시험은 싫어(2)
...얘가 왜 여기 있을까.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 자리에 굳은 채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지껏 학교에 나오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어디 보냐?”
조용히 중얼거리자 녀석이 흠칫하며 어깨를들썩였다. 내 눈매가 좁아지며, 내려가 있던 팔이 올라와 가슴팍을 가렸다. 아까부터, 녀석은 내 가슴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오해...”
“미친 새끼.”
자기가 당장 나한테 해야 할 말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만나자 마자 보는 게 내 젖은 몸이라, 치밀어 오른 화 탓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살짝 높아져 있던 호감도가 뚝, 떨어지며- 조금이나마 참고 있던 역겨움이 목을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무어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팔짱을 낀 채 몸을 살짝 틀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허우적거리며 아니라고 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꼴이란, 그 모습에 내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럼 도대체 어딜 본 건데?”
“그, 그냥 젖어 있어서 자연스레 눈이 간 것뿐이야.”
“...죽어.”
“...미안해.”
젖어있으면 오히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았어야지. 요 근래 여자가 된 이후 부끄러움이 조금 많아진 탓인지 누가 내 몸에 시선을 두는 것에 살짝 민감해졌다. 예전엔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안 썼는데, 괜히 부끄러워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내 몸을 대놓고 보다니, 나도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를 뻔 했다. 녀석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 얼려버렸...
아니, 제논이라서 넘어가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은 다른 중요한 얘기를 먼저 듣는 게 나으니까. 굳이 화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학교에 계속 나오고 있었던 거야?”
“음, 학교에 계속 나오긴 했지.”
“반에는 안 왔잖아.”
“갈 수가 없었어. 정학 도중에 반에 들어가 수업 받을 수는 없잖아.”
정학, 그 말에 좁아진눈이 살짝 커졌다. 퇴학은 피했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자기 얘기를 어느 도 털어놨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속사정을 털어내면서 까지 퇴학을 피하려 한 녀석한테 화를 내는 건 조금...그렇지 않은가.
팔짱을 낀 것을 풀으며, 나는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흠칫 놀라며 멍청한 얼굴을 짓는 게 영 꼴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지.
“며칠 정학인데?”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야. 2주 정학이었거든.”
생각보다 적은 기한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
“내일부터 나오는 거야?”
“응.”
세상에, 나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는데, 다시 같은 반에서 제논이랑 마주치게 생겼다. 자리를 구석으로 옮길까.
...근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면 상처 받을 것 같기도 하고.
골치가 아프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안주고 피할 수 있을지, 집에서 잠이라도 설쳐가며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귓가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덕분이야.”
“뭐가?”
“퇴학 피한 거도 그렇고...이것저것. 그 때 네가 싸움을 안 말려줬다면, 정말 퇴학이었겠지.”
딱히 내가 뭘 한 건 없는데,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고맙다는데 그것까지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퇴학을 어떻게 피했는지 안 궁금해?”
“...네가 알아서 잘 했겠지.”
“알려줄 수도 있는데.”
너라면, 그 말을 말끝에 붙인 녀석이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고 퇴학을 피한 걸 텐데,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해. 소설에서도 누군가에게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한 건...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거나 마음이 있는 사람.
기껏해야 몇 번 본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됐어. 그런 거보다 그냥 정학이라는 게 중요하지. 다행이네, 퇴학은 아니라.”
“...그러게, 다행이야.”
녀석의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에 걸린 미소 탓인지, 녀석의 인상이 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뭐, 기분 탓일 거다. 원작에서도 아이샤를 초반부터 알기는 했지만, 녀석이 진심으로 웃기 시작한 건 아이샤에게 마음을 준 이후부터 였으니까.
아무튼 제논이 단순히 정학이라는 징계에서 끝난 건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첫날부터 꼬일대로 꼬여버린 전개, 주인공이 있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근데 왜 여기 서있는 거야?”
아까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왜 여자 화장실 앞에 서있던 건가. 혹시 내가 모를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팔을 천천히 올리자 제논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오해라니까!”
“그럼 왜 여자화장실 앞에 서있어?”
“...이거 보면 알잖아. 정학이니까, 교내 봉사 때문에 있는 거야.”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린 걸레를 보여주었다. 아하. 그걸 보니 얘가 왜 여기 있는 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하기야, 정학이라 해도 아예 집에만 있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적당히 화장실 청소나 시켰던 모양인 듯 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이걸로 내가 궁금했던 건 끝, 그렇게 녀석을 지나치려 하자 녀석이 내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왜?”
갑자기 팔을 왜 붙잡는 거야. 내가 뭐하냐는 듯 살짝 흘겨보자, 녀석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호.”
“뭐?”
“번...호 좀 달라고, 그러니까- 그, 아는 사람이라곤 여기서너 밖에 없거든. 네 스마트 박스도 연락은 되니까. 다른 생각은 없고 그냥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
“자.”
나는 내 플라스틱 박스를 녀석한테 던졌다. 이게 스마트 박스였구나, 이름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스마트폰의 진화형 뭐 그런 게 아닐까. 그나저나 번호 달라하면서 뭐가 그렇게 말이 많은지. 녀석한테 번호를 주는 게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주인공의 전화번호였다.
아예 모르고 살 수도 없는 거지.
제논은 내가 던진 스마트 박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멍청한 얼굴로 스마트 박스를 만지작 거리는 게 영 답답해 입을 열었다.
“뭐해? 번호 안 줘도 돼?”
“아, 아니. 아니야.”
흠칫, 하고 놀라던 녀석은 이내 번호를 입력하고선 내게 스마트 박스를 건넸다.
“..음, 근데 저장된 전화번호가 없더라? 새로 샀을 리...는 없을텐데.”
“없지, 네가 처음이야.”
애초에 어떻게 쓰는 지도 잘 모르는데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프레이 번호도 받아놔야겠네. 스마트 박스를 주머니에 넣은 뒤, 이제 프레이에게 가기 위해 고개를 들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눈도 못 마주치고, 스마트 박스에서 뭐라도 본 건가...? 나중에 한 번 확인 해 봐야겠다.
“어디 아파?”
“어- 아니, 음. 잘 가. 내일 보자.”
“...그래.”
아예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나는 등을 돌려 그대로 제논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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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익-
정말로 사람 머리에서 증기가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내 모습이 꼭 그렇지 않을까. 마치 증기기관차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른 머리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뿜어내고 있을 거라- 아마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 말에 담긴 의미란, 그 말 그대로가 분명할 터인데.
-네가 처음이야.
그 말이, 사람을 이렇게나 흔들 줄이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그냥 단순한 손짓에도, 평범한 대화에도 가슴이 답답하고, 괜히 조급해지는 이 것이 무엇인지를...모르겠다.
스마트 박스에 전화번호를 입력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부모님의 전화번호조차 없이 말끔한 주소록을 보며 순간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나처럼- 부모님을 여읜 건지. 단종 된 게 5년 전이니, 5년 동안 누군가와의 연락조차 없이 살았던 건지.
그렇게 쓸쓸히 살았으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사실 정학이 확정되었을 때, 아이샤를 찾아가 알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찾아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멀리서나마, 잠깐 본 게전부였으니.
허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모순된 감정이 쌓여갔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려하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보곤 일부러 걸레를 챙겨 남자화장실에서 나오는 척했다. 내가 맡은 곳은 애초에 화장실이 아닌데도.
비어있는 주소록에 내 전화번호를 추가했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처음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순간 눈앞이 하얘져- 그녀의 얼굴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불렀을 때 무어라 대답했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다.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