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시험은 싫어(3)
“...아.”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건 하얀 색의 천장, 구석에 잔뜩 슬어있는 곰팡이마저 이제 익숙해졌다. 창문을 타고 어렴풋이 비치는 달빛, 아직 밤인 것 같았다. 원래라면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잠들었을 텐데, 오늘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 이러곤 했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혹시 부모님이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무도 없는, 작은 불 빛조차 없는 그 시골길을 홀로 서성이곤 했다. 나중에서야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직 그 때의 버릇이 남아있었다.
툭- 툭-
불이 꺼진, 적막에 휩싸인 동네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손가락으로 그 틀을 살짝 두드렸다. 투명한 창문에 비치는 모습이 백금발의 여자아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실소가 지어졌다.
...옛날 생각나네.
여기 오기 전에도 새벽에 일어나면 종종 창문에 기대 밖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반지하라 이렇게 바깥의 건물들이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발이나 땅이 보였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살기 좋았다.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히어로 지망생이라는 인재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내게 인생을 다시 살 기회라도 내려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내게 다시 한 번 기회라는 게 주어진 거라면.
...이번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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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샤!”
“프레이, 아침부터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저 멀리서 초록 머리의 여자아이가 격하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이능은 달팽이면서 그렇게 빨라도 되는 걸까.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무어라 하긴 했지만, 그런 격한 반김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좋아하잖아. 조금은 솔직해지는 게 어때?”
“...안 좋거든.”
“흐흫, 그래. 네가 그렇다면 다 그런 거겠죠.”
“비아냥거리면 안 된다고 했지?”
“아아아, 알았어...!”
다가오는 프레이를 살짝 밀어내자, 녀석은 머리를 들이밀며 내게 엉겨 붙었다. 내가 이렇게 반응할 걸 알면서 왜 그러는 지 모르겠다. 일부러 그런 건가?
“아, 맞다. 너 그거 공지 봤어?”
“무슨 공지?”
“이번에 보는 실기 시험 말이야. 어제 스마트 워치에 떴을 텐데.”
“...스마트 워치는 또 뭐야.”
스마트 박스는 들어봤는데, 스마트 워치는 뭐지? 내가 의아해하자 프레이가 설마 모르는 거냐며 자신의 손목을 보여주었다. 손목에 있는 건 그냥 평범한 시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있는 작은 버튼을 살짝 누르자-
[실기 시험 공지]
홀로그램이 그 위로 튀어나오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능의 실용적 사용 담당교수인 베로니카입니다...오늘 공지할 내용은 3일 뒤에 있을 실기 시험의 조에 관한 얘기입니다.원래라면 친한 사람과 짝을 맺게 하기, 로 하려고 했었죠. 그런데...생각해보니 제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말이죠. 저는 여러분 나이 때 친구가 없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 어린 시절과 같은 부류가 있을 것 같아,
-조는 제비뽑기로 정합니다.
뚝-
그렇게 홀로그램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 말도 안되는 공지에 잠깐 침묵이 이어진 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흐흫, 나도 처음에 듣고 이게 뭔가 했어.”
자기가 친구가 없었으니, 친구끼리 조를 맺기보다는 그냥 제비뽑기로 정한다- 라는 내용의 공지. 이유야 현실감이 넘쳐 이해할 수 있었지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이거 2인 1조였지?”
“응, 난 너랑 같은 조 하려고 했는데. 아쉬워...”
“...뭔가 불안하네.”
2인 1조라, 설마 수많은 학생들 중에 그 녀석이랑 같은 조가 될 리가 있겠어.
...설마.
고개를 저으며 기분 나쁜 생각을 털어냈다. 아카데미의 학생 수만 200명이 넘는다. 설마 같은 조가 될 리가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그렇게 될 것 같아 일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 점심이 뭐가 나오더라. 스마트 박스를 조작해 확인하자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코다리강정이라니, 이런 걸 점심으로주면 먹으라는 거냐. 나는 코다리가 싫었다. 따듯할 때 먹으면 그나마 먹을 만하지만,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차가워져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뼈도 많고, 무엇보다 식감이 구려서...도대체 제논은 이걸 어떻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코다리를 어떻게 좋아하는 거지, 코다리 말고도 생선류 자체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나중에 횟집에 같이 가서 시험이라도 해볼까. 회는 좋아하는 편이라 같이 가도 좋...
“뭐라는 거야.”
내가 걔 좋아하는 걸 왜 생각해. 아무래도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2인 1조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계속 그 쪽으로 이어지네. 내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자, 프레이가 더듬이를 쫑긋거리며 다가왔다.
“아이샤, 뭐 고민하는 거 있어?”
“...없어, 그냥 2인 1조 그 것좀 생각 하느라.”
“하기야, 아이샤 나 말고 친구 없잖아. 아 그 제논이라는 남자애도 아이샤 친구였나?”
“친구 아니거든?”
“에이, 맨날 틱틱 거리면서 결국 같이 있잖아. 친구 아니야? 아니면 친구 이상...”
“흥.”
친구 이상 같은 소리하네, 제논이랑은 친구도 아니었다. 그냥- 걔가 자꾸 말을 걸어서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는 것 뿐. 괜히 계속 싫다고 하면 걔가 시무룩해 하니까. 그게 신경 쓰여서, 아니- 꼴보기 싫어서 그냥 조금 어울리는 것이었다.
걷는 속도를 높여 프레이를 확 지나치자 프레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다. 그러게 왜 그랬어. 내가 그런 말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아아, 아이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자꾸 엮지 말라고 했잖아.”
“제논은 다른 사람이랑 잘 얘기 안 하잖아. 맨날 얘기하는 사람이 너 밖에 없는 걸.”
“그건 걔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거야.”
남들을 잘 믿지 않는, 오직 자기 자신의 목표를 위해 히어로가 되려는 녀석. 일반적인 히어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제논이었으니까. 나중에는 고쳐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제논 잘생기지 않았어? 난 처음 보고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생겼나 했어.”
“별로.”
물론 녀석의 얼굴이 괜찮은 것은 맞았지만,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녀석의 얼굴은 평범했다. 그냥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다, 그런 얼굴을 잘생겼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
“난 조금 우락부락한 쪽이 좋더라.”
“그러면서 너도 제논 말고는 딱히 남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거든.”
“너 다른 남자애가 부르면 그냥 그 자리에서 응, 알았어- 하고 답하는데. 제논이 부르면 직접 가서 뭐라뭐라하잖아. 그 정도면 관심있, 읍...!”
그 입이 문제야 프레이, 나는 프레이의 입을 얼려버린 채 그대로 앞서 걸어갔다. 걔가 자꾸 소곤소곤 부르니까 그거 하지 말라고 가서 따지는 건데, 그걸 그렇게 오해하면 어쩌자는 건지.
그렇게 교실에 들어서자 한 구석에 익숙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오늘도 엎드려서 퍼 자는 망나니. 그런 녀석을 불만스런 눈길로 살짝 흘겨보자 어느새 입에 있는 얼음이 사라진 프레이가 쫓아와 재잘거렸다.
“우와, 쟤 또 자? 도대체 입학은 어떻게 한 거야?”
“그러게 말이야. 내가 자꾸 자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자네.”
저렇게 자기만 하면 도대체 수업을 어떻게 따라가려고, 원작에서도 맨날 퍼 자서 낙제점을 받기 일쑤였다. 물론 그때는 조용히 있어서 괜찮았지만, 정학을 한 번 겪은 지금도 이러면 어쩌자는 건가 싶다.
...깨워줘야지, 어쩌겠어.
나는 성큼성큼 제논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정학 풀린 지 고작 3일 됐는데, 이러고 있으면 선생님들 입장에선 반항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러면 진짜 제적당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야, 제논.”
탕탕탕-
녀석이 엎드려 있는 책상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미동도 없는 녀석의 어깨,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어깨를 흔들어도- 녀석은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렇게 몸이 약한 녀석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엎드려 있는 녀석에게 살짝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대었다.
쌔액- 쌔액-
숨소리는 괜찮은데. 킁킁, 녀석의 몸에서 좋은 향이 났다. 섬유유연제랑은 다른, 싱그러운 라벤더 향. 그 향에 잠시 취해 한참을 맡다가- 문득 귀에 시선이 닿았다. 빨갛게, 어쩌면 누가 색이라도 칠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귀.
“...깼으면 일어나라.”
“.......응.”
나는 녀석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눈을 마주칠 수 있을 때 까지는...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