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시험은 싫어(4) (13/115)



〈 13화 〉시험은 싫어(4)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그저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설령 겉으로 보기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더라도.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지금이라면 구태여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살짝 뜨거워진 귀 끝을 두드리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주인공과 접촉한 건 아니었다. 지금 제논 곁에 있는 사람은 전무(全無), 싸움을 말린 것도- 잠을 깨우는것처럼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결국 ‘필요’에 의해 벌여지는 것의 일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처음에 내가 마음먹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무엇을 생각해도 제논과 연결된다. 무엇을 하던, 어떤 행동을 하던 결국 제논과 닿았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오소소,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내 생각대로 이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공의 싸움도, 그걸 내가 말리고 양호실에 데려다 준 것도,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을 때까지. 내 행동을 돌이켜 봤을 때 과연 누가 제논을 멀리하려 했다 생각할까.

 가지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원래의 아이샤였다. 원작에서 제논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고, 불량아나 다름없던제논의 행동을 이끌었으며, 종래엔 제논의 연인이 된. 원래의 아이샤.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원작을 따라간다. 자신의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어날 사건은 일어난다. 나타날 빌런도 나타나고. 만약- 내가 제논을 좋아하게 되는 것마저 그런 ‘필연’이라면.

“...하.”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히로인 따위, 하기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녀석에게 멀어지는 방법이 무엇일까.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한 구석에 박혀있는 것? 이제 와서 될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접점이 많아진 지금, 갑작스레 멀리하면 되려 다가올 계기를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쿡쿡-

책상에 엎어진 지우개를 찌르며, 수많은 방법들을 떠올리고 배제했다. 옆에 누가 온 지조차 모른 채.

“아이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졸음이  깬, 예의 그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이것부터 난관이었다, 내가 아무리 멀리 하려 한들- 어째서인지 녀석이 다가온다. 원작에서는 그렇게도 무관심했던 녀석이, 보던 내가 속이 터질 것만 같던 녀석이 어째서.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턱을 괸 채 날 바라보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불러.”
“왜긴, 같은 조가 됐으니까.”
“같은 조...?”

끊임없이 돌아가던 사고 회로가 끊어진다. 맹렬히 회전하던 두뇌가 멈추고, 딱딱히 굳은 고개가 삐걱이며 앞을 향했다.

[아이샤 이리안, 제논]

“아...”
“...잘해보자.”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제논이랑 같은 조가 된 것인가.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실기 시험조는 대충 정했으니...그럼 3일 뒤에 치러지는 시험을 알아서,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친한 사람이 아닌  알지 못하는 사람과 조가 이뤄진 건 실전에서 다른 히어로와 임시로 팀을 맺는 경우와 유사하죠. 이번 실습에서 그 것을 깨닫고, 나중에 활용할  있길 바랍니다.”

담당교수의 말이 끝나고, 교수가 교실 밖을 나감과 동시에 내 고개는 책상에 처 박혔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이 믿을  없는 확률을 저주했다. 하필이면, 200명의 학생 중에서 하필이면 이 녀석이라니.

내 결심을 비웃듯, 이런 조를 내준 하늘을 속으로 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몰라도 돼.”

나를 부르는 제논을 무시한 채, 반 밖으로 나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필요했다.
실기 시험의 내용이 뭐였지? 아직 따로 공지되진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여러 유명 히어로의 자식들이 입학하는 아카데미인 만큼 형평성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떠올려야 할 것은 원작의 기억.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이윽고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지 떠올릴  있었다.

임시 파견. 하루 동안 히어로의 삶을 학습하기 위해, 등교하지 않고 다른 동네로 파견  히어로 활동을 하는 것. 차라리 가상 빌런 퇴치 같은 거였으면 좋았으련만. 한숨이 터져 나왔다. 2인 1조로 다른 동네에 파견 가는 것이기에 그만큼 붙어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붙어있는 것만으로 플래그가 설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혹시라는 게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몰랐으니까.

프레이의 말이 떠올랐다. 남들의 눈에는 내가 제논에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솔직히, 부정할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난 제논이나 프레이 외에 다른 사람에게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깨달은 지금에서라도 조심해야했다.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를 짓눌러도,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렇다면 차라리- 머리를 비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가자.

벌컥-

옥상의 문을 열어젖히고, 난간에 기대 아카데미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봄 특유의 싱그러운  내음이 사방에 퍼진다.

좋네-

여름이 아직 오지 않은 봄은, 색이 만연했다. 흰색,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곧이어 초록빛으로 물들 세상은 아직 다채로웠다. 복잡한 생각으로 지끈 거렸던 머리가 나아지고,  막힌 시야가  트인다. 손을 휘젓자 젖지 않는 물결이 닿았다. 기분이...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옥상에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이샤니까. 살짝 찜찜하긴 했어도 나쁘지 않았다. 옛날에도 이렇게 올라오곤 했는데-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살짝 찌푸린 찰나. 한 쪽 끝에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파랗다, 그 사람을 본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허리까지 뒤덮을 만큼이나 긴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려서 일까.  사람의 뒤에서 일렁이는 물길 탓일까. 동화 속에서 숲에 나오는 요정을 본 사람의 심정을 느끼듯- 나는 그 몽환적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녹색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푸른 녹음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시선이  몸을 흝으며,그녀의 곁에 있던 물길이 천천히 내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머, 안녕?”
“...안녕.”

내 인사가 영 이상했는지,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 하고 웃어보였다.

“안녕이라니. 너 이번에 입학한 애 아니니? 아이샤..였었나 아마. 존댓말 써야지."

선후배간에 존댓말은 무슨, 약간 불만이긴 했지만.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을 살짝 높였다.

“안녕하세요.”
“푸흐,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반가워.”
“...하아.”

종잡을 수가 없네. 존댓말을 쓰라길래 썼더니,  필요가 없다니. 살짝 흘겨보려다가 그냥 시선을 거두었다. 굳이 말을 섞을 필요는 없으리라.

“음...나 무시하는 건가?”
“아니요. 눈 안 보고도 얘기는 수 있잖아요.”
“선배한테 너무 쌀쌀 맞네. 나때는 안 그랬는데...하아, 너무 슬프다.”

...무언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기시감. 이 말투를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행동,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 한 말투.

“아, 그러고 보니 너 걔랑 친하니?”

웃는 얼굴이었지만, 내 몸을 휘감았던 물길이 점점 나를 압박하려는 듯 다가오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약간의 금이라도 가면, 날 질식시키기라도 하려는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걔’가 누굴까, 궁금중은 쉽게 풀렸다. 나랑 연관된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았으니까.

“제논 카르멘.”

그녀의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불만이 아닌, 의문으로. 제논의 이름 뒤에 붙는 성씨를, 나는 아직 몰라야 했으니까.

“...카르멘? 에드윈 카르멘이라면 들어봤는데요.”
“아직 내 생각보다 친하진 않나보구나. 자기 성씨를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럼 내가 스포일러한 건가? 미안하게 됐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 짓는 그녀였지만, 호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건, 질척일 만큼이나 역겨운 적의. 내게 향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그 대상은...제논이겠지.

“너무 친해지지 마렴. 위험해져.”
“.......”

마치 내게 경고하듯, 그녀는 그런 말을 던졌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딱히 친해지고 싶진 않았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름이 조금 떠오르는 것 같네.

헤라 카르멘.

1부의, 중간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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