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상처 주는 건 싫어(1)
이 쪽 세계로 건너와 처음 겪는 실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침착함과 냉정함. 앞에 있는 것이 설령 사람이라 하더라도, 머뭇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건물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녀석을 상대하는 무대가 이 건물의 옥상임을 고려했을 때, 약간 과장된 행동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애애앵-
빌런 경보를 발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일정 기준 이능 사용이 발생하면 울리는 경보, 경보가 울린 이상. 조용히 싸울 필요는 없겠지. 녀석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검은색의 얼굴 아래쪽이 살며시 찢어지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용히 싸울 생각은 없었나봐?”
“조용한 이능은 아니거든.”
“나야...좋지.”
그것을 신호로, 녀석의 손에 맺혀진 검은 구슬의 크기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옥상이 무너진다, 건물이 붕괴한다. 녀석의 이능이란, 그만큼 위험한 이능이었다.
쩌저적-
강대한 이능 앞에서, 사람의 목숨은 무력하다. 하지만 반대로- 강대한 이능은 그 목숨들을 지킬 수 있다. 무너지는 건물의 겉면을 얼린다. 허둥지둥대며 빠져나오는 사람들, 다행히 그 수가 적었는지, 삽시간만에 모든 사람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건물은 무너진다. 부유하듯, 대기를 찢어 가르며 떨어지는 내 몸, 녀석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서로의 눈에서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은 없었다.
...까다롭긴 하네. 공격이 닿기 전에 부서진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얼음 가시도,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얼음 화살도, 결국 검은 구체에 닿아 바스러지기 일 쑤였다.
“원작이랑 같아.”
시야에 닿는 공격은 흡수한다. 내가 신경쓰는 것은 약간이나마 찢어진 녀석의옷자락이었다. 아마 저게 뒤에서 오는 공격을 맞은 거였나. 원작에서도 그랬듯이, 녀석은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것은 흡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만화 속의 한 장면, 아마도 이 걸 썼던 녀석은 모래로 했던 걸로 기억하지만.
지면에서 얼음의 기둥이 솟아오른다. 녀석을 찌르려는 듯, 사나운 기세로 맹렬히 다가오는 가시가 검은 구체에 바스라지는 것도 잠시, 순식간에 얼음의구체가 그 몸을 집어삼켰다. 아주 약간- 찰나의 시간. 주먹을 쥠과 동시에, 구체 안에서 수백개의 가시가 솟아나와 녀석을 찔렀다.
푸욱-
얼음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구슬, 그 겉면에 붉은 선혈이 맺혔다. 허나 단지 맺힐 뿐,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는 그 애매한 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살아있구나,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뒷 편에서 강력한 흡입력이 느껴졌다. 어느 샌가 뒤에 나타난 검은 색의 구체. 언제 빠져나왔을까...하기야, 저걸로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방금은 좀 아팠어.”
“그러니.”
얼음을 뿜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아까와는 살짝 달라진 녀석의 모습. 중절모와 목도리가 너덜너덜해져, 검은 색의 얼굴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된 건 오랜만이야. 아끼는 모자였는데.”
“유감이네.”
꽤 아끼는 모자라면서, 녀석은 찢어진 모자를 휙, 하고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풀어지는 목도리, 녀석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자, 녀석은 후련한 듯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논이란 녀석에 맞춰서 내가 온 건데. 조금 꼬였어.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그냥, 가지 말라고 해서 온 것뿐이야.”
“후우. 그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지. 아무튼, 계획이 꼬인 탓에 조금 빠르게 해도 되지?”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는 없던 몇몇 얼굴이 보였다.
다구리? 이 것까진 예상 못했는데. 목을 타고 씁쓸함이 입안에 번졌다. 블랙홀 쓰는 애 하나도 제압하긴 힘든데, 여러 명을 상대해야 한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팔을 매만졌다. 아직 엄청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인이랑은 비교도 안될 만큼 차가워진 몸.
사용할수록 체온이 낮아지는 이능이기에, 강대한 화력을 언제까지고 사용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이샤도 얼음을 뿜어내는 것만 사용하진 않았지만...내가 아이샤의 방식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한 번, 큰 기술을 사용할 수 있기야 했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내 주변에 나를 둘러싼 이의 수는 대충 10명. 한번 팍, 하고 터지는 식으로 몇 명 정도는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제압할 수는 없을 터. 주변을 둘러싼 얼음의 장벽을 거두며, 검은 얼굴을 지닌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항을 포기한 건가? 뭐, 우리야 싸움 안 하면 좋긴 한데. 그 보답으로...”
“포기 안했어.”
콰드득-
작은 얼음 기둥 하나가 내 앞에 솟아올랐다. 이윽고 조각나는 기둥, 마치 조각사가 세심한 시각으로 얼음을 바라보며, 작은 오차조차 없이 조각하듯 기둥은 점차 형태를 갖춰나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자루의 검.
길게 뻗은 검신은 투명했다. 그 속을 전부 내비치며, 마치 주변의 풍경을 빨아드리듯. 허공에 그어지는 선은 푸르렀고, 검로(劍路)는 밤을 담아냈다. 언뜻 보면 하나의 예술처럼 보이는 그 광경에, 빌런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샤는 검을 뽑을 때마다 그 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검은 총 일곱 자루, 그 중 첫 번째였던 이 검의 이름은,
1번 검, 월야(月夜).
이 밤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 검이라고 한 번도 잡지 못한 몸이었건만, 검을 쥔 자세는 마치 교정이라도 받은 듯 올곧았다. 그리고 검 끝이 한 빌런을 향했을 때, 내 몸이 튀어나갔다.
#
당황,
빌런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것에 가까웠다. 헤라 카르멘의 지령에 따라- 아마 제논 카르멘이라는 남학생을 처리하는 것이 목표였을 터. 웬 여학생이 나타난 순간, 계획은 꼬인 거나 다름없었다.
‘실기 시험은 2인 1조가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건, 헤라가 했던 말.
-그 녀석들 제대로 사이가 망가졌어. 아마 따로 다니겠지.
그렇다는 건, 저 여자는 혼자 온 것일 터. 빠르게 끝내자는 생각으로 힘을 끌어올렸으나상대의 대처는 예상 외였다.
애애앵-
일부러 경보를 울린다. 어쩌면 다른 히어로를 부르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녀가 경보를 울린목적은 그 것뿐만이 아닌 듯 했다. 건물 전체를 얼릴 만큼이나 강력한 화력을 사용할, 일종의 포석.
제논의 이능은 ‘닿는 것을 폭발 시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개성은 ‘블랙홀’. 생성해낸 구체는 시야가 인식한 범위 내의 것을 흡수한다. 그렇기에 제논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유리하겠지만...
‘...씨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공중에서 날아오는 얼음 화살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얼음의 가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얼음의 창은, 자신을 이 자리에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확실했다. 마치 이능의 조건을 완전히 파악하기라도 한 듯이. 점차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이 많아졌다.
이능에도 한계가 있었다.증강계나 이형계라면 자신의 육체가, 그리고 자신처럼 발현계라면 그 정신력이. 허나 저 여자는,그 한계조차 무시하는 듯 끊임없이 가공할 위력의 얼음을 쏘아내었다.
‘한계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내 몸을 거대한 얼음의 구체가 감쌌다. 댕-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피해야한다. 단순히 블랙홀로는, 이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찰나의 순간, 블랙홀로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순간이동에 성공했지만, 여자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었다. 혼자는 무리였다. 그렇게 판단하며- 만약의 순간을 위해 준비해둔 빌런들을 불러냈다.
자신을 포함하여 10명, 분명- 이 정도의 숫자라면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는 여유있는 모습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따듯한 날씨,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그녀의 숨결에 대기에 김이 서렸다.
한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이능을 사용했으니, 이제는 슬슬 힘에 부칠 터. 그 생각이 맞았는지 그녀는 주변에 쌓인 얼음을 거두었다.
그나마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웬 얼음 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아직도 저항하려는 건가. 입맛을 다셨다. 저항 안하는 편이 좋았을텐데. 10명의 빌런, 그리고 1명의 학생. 승산은 명확하지 않은가.
얼음 기둥이 깎여 나간 뒤 만들어진 검을 잡은 여학생은, 그 검 끝을 자신들에게 향했다.
“하하.”
어리석다. 승산을 계산할지 조차 모르는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검은 색의 구체를 만들어냈다. 그까짓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 닿기도 전에 분해시키면 될-
서걱-
그의 생각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그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피, 그 피와 이어진 어떤 이의 손목.
그 손목이, 한 때 자신의 것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