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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상처 주는 건 싫어(2) (16/115)



〈 16화 〉상처 주는 건 싫어(2)

사방에 퍼진 빌런들의 눈동자에 읽히는 감정은, 아마도 놀람이리라.

이 검을 휘두르는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빌런의 수 10명, 솔직히 말해 몇 명을 데려갈 수 있을지의 싸움이었다. 전원의 제압은, 설령 아이샤의 이능이라한들 아직 힘들 거라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거기에 하나 더. 아이샤의원래 싸움 방식인 ‘검’을 활용한 전투 방식까지. 이처럼 확신없이 시작된 전투의 과정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언가였다.

서걱-

나를 상대하기 위해 다른 빌런을 불러낸 녀석, 아마 녀석의 이능에 한계가 왔을 거라 생각했기에  표적은 녀석이었다. 이능 ‘블랙홀’, 그 용도가 까다롭기도 할뿐더러, 아까의 싸움에서, 녀석의 신체능력이 그닥 좋지 않음을 파악했으니까.

단지 이능 하나로는 완전한 히어로가 될 수 없다. 설령 그 이능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을 지녔다 한들,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할  있는 체술이 필요했다. 히어로가 되기 위해 쌓아온 무(武), 그리고 아이샤가 지닌 체술은, 마치 하나의 춤사위와도 같았다.

몸은 기억하지만 정신은 그 편린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 약간의 어색함으로 몸이 삐걱이긴 했지만, 어느덧 내 팔은 자연스레 허공에 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겨울에 흩날리는 눈이 땅에 닿으면 녹듯, 상대에게 닿을 때  사라지는 검.

서걱-

검은 구체에 닿지 않게 오른쪽 대각선쪽으로 끌어올린 검이, 빌런의 손목을 잘라내었다.

“...!”

신물이 아래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쏟아지려 했다. 끊임없이 목구멍을 긁으며,  참혹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이 아우성을 쳐댔다.

...괜찮아, 이런 건 많이 봤잖아.

그렇게 속을 다스린다. 누군가를 베는 것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도, 뿜어지는 피를 보며 공포심을 느끼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오로지 냉정.

뜨거워진 심장은, 그렇게 차갑게 식어내려간다.

한 명이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떤 한 명을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 힘을 과시 하는 것. 보기 좋게 먹혀들어가지 않았는가.

더 이상 내게 쉽사리 접근하려 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 검이 휘둘러지는 범위 밖에 있을 뿐, 단순한 발걸음에도 빌런들은 몸을 움찔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대체 누가 빌런인지를 모르겠네. 피에 젖은 얼음, 그리고 다수를 노려보는 한 사람.

아무리 봐도 내가 빌런이 아닐까.

손목을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자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뭐, 이 정도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죽일 생각은 없었고, 제압을 위한 것이었으니.

“하.”

저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히어로는 너무 불리하지 않은가.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이더라도, 늘 제압에 목적을 둔 채로 움직여야 한다니. 이래저래 불만이 많긴 했지만, 내 이능은- 제압에 특화되어있었다.

 이상 이능을  필요도 없었다. 겁에 질린 빌런을 상대로는, 그저 가지고 있는 것을 휘두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이능이다. 허나 그렇기에 더 위협적이었다. 꽃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눈이 휘몰아치는 것은 역설적인 장면이었으니까.

눈보라,

이미 기세를 잡은 이상, 수가 많은쪽에게 기세를 내줄 필요는 없었다. 하여 강세를 둔다. 필요 이상으로 빌런이 다친다 한들, 내게 승기를 잡는 방법이란 그것이 유일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며, 얼음이 별을 담아낸다. 그어지는 선을 따라 얼음이휘몰아친다. 빌런의 손에서 일렁이는 불꽃도, 바위처럼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몸도, 결국 깎여나가 종래엔 스러진다.

한 걸음, 한 진각을 밟을 때마다 쓰러지는 빌런들, 그리고 마지막  마리가 남았을 때-

한 녀석은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악-

“아무도 없는 건 너도 잘 알텐데.”
“오, 오지마!”
“먼저 온 건 너희들이야.”

녀석들을 상대하며 느낀 건 하나였다. 이 기묘할 정도의 고요. 아마도 계획된 테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는  사건의 전말이 파헤쳐지지 않았다. 제논은 처음에 나타난 블랙홀의 이능을 지닌 빌런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으니까. 사방에서 나타난 빌런 들에 의해 건물이 무너지고,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크게 다쳤다.

...그리고 그 싸움 도중에 나타난 히어로는 없었고.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은 이상했다. 단순히 제논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상 무언가 실마리를 찾기엔 단서가 현저히 부족했다.

원작에서도 단순한 빌런의 습격으로 알려지고 끝났을 뿐, 헤라 카르멘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나중의 일이니까.

마지막 남은 녀석을 제압했을 때,  표정은 딱딱히 굳어있었다.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거슬렸다.

“...하아.”

차가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도중에 몸을 쓰긴 했지만, 10명을 상대하며 이능을 사용한 만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논과 상성이었지만, 나에겐 그리 상성이 아니라 생각보다 쉽게 끝내긴 했지만.

“어지러워...”

그럼에도 당장 휴식이 필요한  사실이었다. 월야를 거두며, 입고 있던 교복 마이를 한껏 잡아당겼다. 추워라, 이불 속에 들어가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 널부러져 있는 빌런들을 처리하는 것까지가 일의 마무리.

아까 누군가의 손목을 베었다는 기억에서 따라오는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내 속을 뒤흔드는 터라 더욱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하지만...그럴 수야 없지. 이대로 가면 나나 히어로들이나 곤란해질테니까.

그래도 수확이 있다면, 제논이 겪었어야  대사건을 손쉽게 마무리 지었다는 것과...아마 엄청나게 높아진 실기시험 점수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학생, 시험 점수가 높아졌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타다닥-

기지개를 펴며 빌런들을 수거하려는 그 때에,  멀리서 발걸음이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뭐야.”
“A지구의 히어로인 제이스다. 다른 히어로들은 어디 갔지?”
“못 봤는데요?”

그 한마디에, 자신을 제이스라 소개한 히어로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아무리 그래도 경보가 울린 지 20분이 지났다. 빌런을 제압했다는 연락이 오지 않아 뛰어온 건데, 아무도 오지 않았을 리가.”
“정말인데.”
“...그럼 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뭐지?”
“빌런이요. 전 아카데미에서 실기 시험 치르러 온 학생이구요.”
“...실기 시험을 보러 온 학생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10명을 혼자 제압한 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져 있는 빌런들의 얼굴을 바라보던제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여긴 A지구, 추가 지원은 필요 없다. 빌런은 모두 제압됐다.”

통신기를 조작하며, 그는 눈을 가늘게  채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얼굴을 보니 몇몇은 내가 아는 녀석들이군, 그대에겐 감사를 표하지. 정식 히어로도 아닌데 빌런 10명을 홀로 제압할 줄이야. 아무래도 데뷔하면 탑히어로가 될 수도 있겠는걸.”
“...감사합니다.”
“실기 시험이 있다고는 했지만, 더 이상 진행하긴 어려울 거다. 아무래도 사건에 대한 증언도 필요한데다, 망가진 현장을 복구하는 작업도 시작될 테니까. 사정은 학교에 전하마, 근데 혼자 온 건가?”
“한 명이 있긴 한데...”

걔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게 덧붙이며, 나는 제이스를 따라 A지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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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건가?”
“조금 쓰라린 거 말고는 괜찮아요.”

언제 다친 걸까, 피가 흐르는 목을 닦으며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했다. 9명의 빌런과 동시에 싸우는 난전, 비교적 쉽게 제압하긴 했지만  와중에 다친 건지 목에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조금만 깊었으면 크게 다쳤을 거라고.

“미안하게 됐네. 우리가 조금이나마 더 빨리 갔다면-”
“괜찮아요. 히어로 탓을   없죠.”

아마 헤라 카르멘이 히어로들이 출동하는 걸 막았을 테니까.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TV에는 건물의 붕괴로 B지구 히어로 사무소가 봉쇄당했다는 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석연치 않군. 우연이라 보기엔 너무나도 타이밍이  맞아.”
“...그러게요.”
“뭐...자네는 학생이니까. 지금부터는 어른에게 맡기면 된다. 자네 친구에게는 연락했으니 아마 곧 올 거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아까  멍한 얼굴이 생각나 괜스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을  해결하긴 했지만, 관계가 극단적으로 틀어진 것에 대해선 약간 유감이었다.

바라는 것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꺼림칙한 이 기분을 무어라 칭해야 할까.

푸우-

입술을 내민 채 한숨을 내뱉었다. 잠이나 조금 잘까,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의자 머리받이에 뉘였을 때, 한 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쉬이익-

“...무슨 소리지?”

제이스가 중얼거리며 사무소 문으로 다가갔다. 뭐 별일 있겠어. 나는 다시 머리를 뉘였고, 잠시 뒤 조용해진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용하다.

어느덧 새벽이 된 탓에 사무소에는 제이스라는 히어로와 나 뿐이었다. 이제 그 제이스라는 사람도 나갔으니, 완전히  혼자 남은 이 사무소.  고요를 만끽하며,차가운 배게에 머리를 뉘였다.

...차가워?

댕-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머리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사방에 얼음을 흩뿌렸다. 촤아악- 사무소의 단단한 벽을 때리는 소리가 아니다. 마치 물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아닌가. 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은.”
“푸흐, 안녕?”

 때 히어로였던, 방금까지 나와 대화했던 제이스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그녀.

나는 다시 한 번 헤라 카르멘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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