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상처 주는 건 싫어(3)
“그 사람은...”
손으로 질질 끌려 딸려온 제이스를 가리키자, 그녀는 아, 하며 그제서야 기억났다는 듯 제이스를 바닥에 떨궜다.
“그냥 기절 시킨 것뿐이야. 그나저나 바로 알아봤네. 가면은 역시 나한테 안 맞나봐.”
꽤나 답답했는지, 그녀는 얼굴의 윗부분을 가린 흰색의 가면을 벗어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녹색의 눈과 마주했다. 내 속을 전부 끄집어내려는 듯 나를 핥는 그 시선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의도가 뭐지? 어째서...그 빌런을 내가 상대한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혹여나 시작될 싸움에 대비하여 내 상태를 점검한다. 쩌저적- 약간 이지만, 그래도 얼음이 만들어지긴 하네.
그렇다 한들...이길 가능성이 높진 않았다. 만전을 기한다면 모를까. 어중간한 상태로는 이기기 힘들었다. 이제야 1번검을 사용하는 내 수준은 딱 그 정도였다.
일단은 대화로 풀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뭐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여긴 왜 온 거죠? 제이스씨를 기절 시킨 것도 그렇고.가면을 쓴 것도 그렇고.”
“아, 아직 내 이름을 안 알려줬었나? 헤라 카르멘이라 불러, 제논 누나 되는 사람이고. 언니라 한번 불러볼래?”
“......”
이 상황이 그저 즐겁다는 듯, 슬며시 미소 짓는 헤라를 바라보며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언니라고 부르라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게 낫지.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헤라가 입을 열었다.
“음, 뭐 이해는 해. 아직 우리가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친해질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쩌저적-
그녀에게서 새어나오는 흉측한 살의에, 순간 나도 모르게 주변에 얼음을 둘렀다.여전히 능글맞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사이코 같은 년-
그처럼 짙은 살기를 내뿜으면서,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이런 일을 셀 수 없이 많이 겪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히어로 사무실을 습격, 정식 히어로를 기절 시키고, 이렇게 얼굴을 드러낸 채 내게 대면한다는 사실 자체가. 탑히어로의 딸인 헤라 카르멘에게 작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 순간, 무언가가 뇌리에 번뜩였다. 나를, 죽이려 하는 구나.
“...살려주실 생각이 아예 없었네요.”
“맞아, 내가 알려준 대로 A지구에 갔더라면, 제논만 조금 다치고 끝났을 텐데.”
조금?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원작에서의 전개를 아는 내게 그런 거짓말은 의미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또 제논이 그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데-
감정이 울컥거리며 터져 나오려하는 것을 억누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소설을 읽을 때 그 장면에 얼마나 아파했는데. 비릿한 혈향과 함께 입에서 쇠맛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씹었으면 입술이 찢어졌을까.
“아프겠다.”
영혼 없는 동정. 그래, 애초에 대화로 무언가 해결될 거라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본성부터가 글러먹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 표정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는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맺혔던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어째서 제논을 감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벌써 한 번 경고 했는걸.”
“......”
“위험하다고 했는데 왜 굳이 갔을까? 네가 여기서 죽는 건, 네가 잡아둔 아이들의 복수라고 생각하렴. 그 편이 차라리 덜 억울하겠지?”
하, 죽는 데 덜 억울한 게 어디 있어. 농담 같지도 않는 농담을 비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잔재주는 안 통한다. 그렇다면-
콰아아-
약간의 휴식으로 체온은 어느 정도 돌아왔다. 단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술로 단번에 끝낸다.
휙.
내 손 끝이 하늘 위로 향한다. 자연스레 그 손끝을 따라가는 헤라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거대한, 뱀이 있었다.
대지를 박살내고, 하늘의 빛을 집어삼킨다. 단순히 달빛을 머금는 월야와는 달랐다. 하늘이라는 것을 능히 집어삼킬 만큼이나 거대하고, 대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고고하다. 포식자, 자신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포식하며, 끝내 자신마저 집어삼킨 뱀.
요르문간드.
그 존재를 만들어 낸 탓일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게 내가 쥐어짜낸 최대한, 도시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낸 그 존재를 바라보며, 또 그 뱀을 멍하니 바라보는 헤라를 바라보며,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놀라긴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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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해지지 마렴. 위험해져.”
내가 처음 들었던 말은, 그런 말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밑도 끝도 없이 친해지지 말라니. 목소리의 정체는 듣자마자 깨달았다. 헤라 카르멘, 한 때는 꽤나 친했던...나의 누이였다.
3학년인 그녀가 왜 여기 있는가. 그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어왔다.
“좋아요.”
꽤나 익숙한 목소리, 아니. 이 아카데미에서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단 하나 뿐이었다. 아이샤 이리안.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보곤 따라왔으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당연하겠지. 허나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 어째서 헤라의 말에 그녀가 긍정하는가.
“걔랑, 별로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는 거에요.”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말 한마디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나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만약 제논이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 질문에 자신도 아파할 거라 대답하길, 차라리 침묵하길 바라고 있었다. 허나 이어지는 대답은,
“...딱히,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락이었다.
쾅-
옥상의 문에게 화풀이 하듯, 발로 걷어차 닫은 뒤 휘청이며 계단을 내려와 반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왔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반으로 갔는지, 아니면 집으로 갔는지.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웅성거림에 섞여 그 인파에 몸을 맡긴 채.
파도에 휩쓸린 물병처럼, 난 어디론가로 흘러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상실감. 애초에 그렇게 감정에 영향을 받을 만큼 깊은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녀의 그 대답에 상실감을 느꼈다.
나는 무엇을 잃었지?
그녀와 내가 애초에 친구였나? 아니, 그 질문에 필요한 답조차. 나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고 있으면 깨우고, 내 체향을 맡으며 얼굴을 붉혔지만. 그조차도 내 환상일지 몰랐다. 도대체 왜- 나는.
언제부터, 그녀를 눈에 담고 있었을까.
석양을 담은 듯한 붉은 눈과 마주칠 때면, 그 무심한 말투로 내게 대꾸할 때면, 나는 왜인지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가슴 한 켠에 빈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답답했다, 아직까지 데면데면한 사이인 것에 무언가 불만스러웠다.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기엔, 선뜻 나서기가 두려웠다. 혹여 싫어할까 봐.
다른 이와 대화하고 있으면 고개를 숙여 잠자는 척을 했다. 그러면 깨우러 내게 왔으니까. 흡사 어린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랬는데.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와 같은 지하철에, 바로 앞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는 그 작은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제논...나....B..."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채, 나는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에 왜 왔지?
주욱-
힘없이 거리를 걷던 내 정신을 깨운 건, 누군가 내 소매를 당겼을 때였다. 누구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지 키가 작았을 뿐이었다.
“형아.”
“......”
“형아 울어?”
입에 사탕을 문 채, 그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 꼬마 아이. 그저 지나치려 한 그 순간에, 꼬마는 다시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만 해.”
“남자는 3번 운다고 했는데. 형 지금 한 번 썼네.”
“...어디서 그런 거 배웠어?”
“우리 아빠가 알려줬어.”
“그러냐...그리고 나 안 울었어.”
“눈 빨간데.”
안구 건조증이야, 그렇게 둘러대며. 나는 눈 밑에 살짝맺힌 눈물을 닦아 내었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딱히 운 건 아니었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나 실기 시험 보는 중이었구나.”
“그게 뭐야?”
쪽 쪽, 여전히 사탕을 물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며 나는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냥, 히어로가 할 일을 대신 하는 거야.”
“형아 히어로야?”
“...아니.”
“에이, 재미없어.”
도대체 어디에서 재밌게 해줬어야 하는 걸까. 살짝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어린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뭐해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면 복 나간댔어.”
“그것도 아빠가 가르쳐 주신 거야?”
“아니, 엄마가.”
“...그러냐.”
실기 시험, 이제 7시간 남았다는 것을 알리는 시계를 잠시 쳐다보다가, 꼬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도와줄 건 없을까?”
“없어.”
“...정말?”
“응.”
곤란했다. 실기 시험이 7시간 남아, 이제는 어둑해지는 거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마 다시 정학...어쩌면 이번엔 제적처리가 아닐까. 평소 내 행동이 불량했던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정말 제적을 먹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순히...한 사람에게 관심을 끌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집이라도 데려다 줄까.”
“그러던가.”
쪽 쪽, 여전히 무표정한 꼬마. 나는 입맛을 다시며 꼬마의 손을 잡았다.
“집이 어디야?”
“그냥 쭉 가다보면 나와.”
“가깝네. A지구는 살기 좋아?”
“몰라, 난 B지구에 사니까.”
“...그럼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냐.”
“길을 잃었어.”
그런 말을 태평한 얼굴로 해도 되는 거냐. 어쨌든 길을 잃은 아이를 집에 데려다는 주는 것도 실기 시험에 포함되는 거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꼬마의 손을 맞잡은 채 길을 걸었다.
...아이샤는 잘 하고 있을까.
“...!”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무어라 신호라도 하고 생각나면 좋을텐데,가끔 아무 연관도 없이 떠오르는 아이샤 생각에 곤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아니, 이제는 그마저도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녀라는 사람이 내게 영향을 주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고, 다시 침울함에 빠질 때 쯤.
애애앵-
“...이능 경보다.”
불길한 감각이 내 몸을 좀먹는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위험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언가가 벌어지지는 않을 터. 내 시선은 B지구를 향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왠지 모르게, 이 불길한 감각 사이에서 아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디,관련되어 있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저 멀리-
아마도 B지구, 그러니까 아이샤가 향한 방향에서.
얼음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