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상처 주는 건 싫어(4)
전투? 누구와? 아마 빌런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이미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꼬마 아이의 집을 찾아주는 도중이었지만, 그런 건 이미 생각에서 사라진지 오래.
...누군가 내게 이기적이라 한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곳에 온 것도, 결국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결국 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 된다.
아마도 아이샤가 싸우고 있을 B지구로 향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뿐이었다.
타닷-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범람하며 휘몰아쳐지기 시작했다. 빌런, 나타날 수야 있다고는 생각했다. 허나 아이샤의 실력이라면 어지간한 빌런 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음에도 솟아오른 얼음기둥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그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얼굴이 있었다. 얼마 전, 옥상에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
“헤라...”
차라리 대놓고 싫어하는 카이사가 낫지, 헤라 같은 성격은 도무지 그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는 편이었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하면서도, 뒤로는 독이 묻은 칼을 쥐고 찌르려하는. 만약 그녀의 관심이 아이샤에게 향한 거라면.
애초에 옥상에서 둘이 얘기하는 것부터 꺼림칙했었다. 아이샤가 한 말 탓에 며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람에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긴 했지만...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드득-
정신을 빨리 차렸더라면,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허나 속으로 나를 자책한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하는 건, 조금이나마 빨리, 아이샤에게 도달해야한다는 사실.
허리춤에 걸린 검을 꺼내어 달리는 방향 반대쪽을 폭발시켰다. 폭발에 휩쓸려 몸이 쓸려나감에도, 지금은 이 방법뿐이었다. 더 빠르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어느덧 얼음 기둥이 사라지고, 그보다 작은 얼음 장벽이 생겨나있었다. 이능을 사용하다 지친 걸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야가 좁아지고, 내가 보는 것은 오직 얼음 뿐이었다. 그 것을 이정표삼아 달리길 잠시,
저 멀리- 얼음이 솟아있지 않은 곳에서. 길을 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헤라를 발견했다.
“...오랜만이야 제논.”
“비켜.”
“비킬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니고, 흠. 근데 어디가? 바빠 보이네.”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구역질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전부 알고 있으면서, 내가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저 내가 할 일을 방해하기 위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 아니던가.
“...긴 말 안할게. 나와, 헤라.”
“이제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는구나. 조금 섭섭한 걸. 어릴 때는 누나, 누나 하면서 잘 붙었는데 말이야-.”
“......”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쥐었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도 나를 막을 생각이라는 게 분명했다. 만약 정말로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다면.
쉬이익-
애초에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겠지.
“동생이랑 싸우고 싶진 않아. 아버지가 뭐라 한들, 넌 내 소중한 동생인걸 제논.”
눈물을 흘리는 척, 슬퍼하는 척, 마치 내가 정말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저 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콰앙-
느린 검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력은 약하더라도 빠른 검을.
헤라의 이능은 어쩌면 아이샤와 비슷했다. ‘물’, 그 자체를 다룬다는 단순한 이능. 얼음이 날카롭고 둔중하다면, 물은 부드럽고 가벼웠다. 부수고 쪼갠다, 라는 개념이 통하지 않기에 어쩌면 내게 상극이나 다름없는 이능.
물과 직접 붙으며 싸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노려야 하는 건 본체. 내게 쏘아지는 물줄기를 베어 가르며, 천천히-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접근한다.
진각을 밟고 전해지는 힘, 발을 타고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다시 다리로, 그렇게 시작되는 가속은 어느덧 물줄기의 속도를 상회한다. 다섯 발자국, 세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어느덧 검을 내리치면 그대로 베일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헤라가 입을 열었다.
“아, 아이샤가 지금 몇 명이랑 싸우고 있는지 알아?”
그리고 내 움직임이 멈췄다. 몇 명? 눈동자가 흔들리며, 검을 쥔 손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헤라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갈수록, 내 수명도 접혀가는 기분이었다. 다섯, 여섯, 그리고 모든 손가락이 접혔을 때. 그녀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와, 10명이네.”
“...거짓말 하지마.”
아이샤는 고작해야 학생이었다. 학생을 상대하려고 10명을? 그리고, 애초에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름 그런 악의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음에도, 저 미소 뒤에 있는 섬찟한 악의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헤라는, 아이샤를 죽이려 한다.
콰아앙-
생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헤라도, 그 무엇도 중요치 않았다. 순간적인 폭발, 자욱해진 운무가 주변을 덮은 틈을 타 얼음 기둥이 솟아있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턱에 힘을 준 나머지 얼굴에서 쥐가 났다.
그녀가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째서 아이샤를 노리는지는 몰라도, 그 이유가 내게 있다는 것만큼은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려 한다.
설령 그게 카르멘과 아무 연관 없는 사람이더라도,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단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 것으로 내가 상처받는다는 이유로.
뛰고, 대기를 폭발시키고, 그 폭발에 휩쓸리며 반동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겨우 붙든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널부러져 있는 선혈, 깨져있는 얼음 조각. 누군가의 잘린 손목까지. 아무리-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내가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에 가까웠다.
“...안돼.”
힘없이, 바닥에 차갑게 굳은 피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또, 또 나는. 어째서,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릿속, 어지러운 시야를 겨우 바로잡아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 그녀가 죽었다고 할 순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피가 그녀의 것이라, 저 손목이 그녀의 것이라 단정 짓기엔 아직 일렀다. 나와 카이사를 얼렸던 그 이능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녀가 10명을 모두 제압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능 경보가 울렸으니, 아마 히어로가 와서 같이 싸웠을 터였다.
“...차분히생각하자.”
마음이 너무 급했다. 어째선지, 아이샤를 생각할 때 마다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빨리 차렸더라면, 계속해서 그녀와 붙어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얼굴을 마른 손으로 한번 쓸어내린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무언가가 ‘운반’ 된 흔적이 있었다. 그 것을 따라가면 아마 닿지 않을까.
그 흔적을 따라 뛰어가면서 이 답답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말 한 마디에 휘둘리고, 잠시간의 공백에 허전해하며, 단순히 떠올릴 뿐이었음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병?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단순히 병이라 하기에, 이런 느낌은 아이샤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들지 않았다.
하아-
다시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이름 모를 감정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려 할 때마다 망설여졌다.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그녀가 어찌 되었는 지가 훨씬 중요했다.
흔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마 이능으로 만들어진 흔적, 무언가 몸부림치거나, 싸움이 벌어졌다거나 하는 흔적은 없었다. 깔끔히 제압된 상태로 운반된 건가. 도무지 끝을 보이지 않는 흔적에 나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콰아아-
그리고 들려오는 굉음, 마치 얼음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뱀,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뱀이 그 몸을 부풀리며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혀를 휘두를 때마다 사방이 얼어붙는다. 봄이 한참을 지났건만, 그 뱀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김서린 숨결이 새어나왔다.
“...아이샤.”
어느 순간, 나는 폭발을 일으키며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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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은 히어로 사무소 쪽, 왜아이샤가 거기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거대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뱀이, 그녀가 아직 살아있음을알게 해줬으니까.
저 뱀을 휘감는 또 다른 거대한 물줄기는 아마 헤라의 것이겠지. 빠드득, 이가 갈렸다. 빌런으로 안되니까 직접 나선 건가. 헤라의 강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조급함은 더욱 커져갔다.
조금 더, 조금 더 빠르게.
폐가 터질 듯한 감각을 억누르며 달려갔을 때, 마침내 아이샤를 볼 수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그녀를.
무어라 말해야하지? 뭐라고, 뭐라고 사과해야 할까. 그녀가 저렇게까지 내몰린 이유는 자신의 탓이었다. 내가 에드윈 카르멘의 아들이라서, 정략혼으로 태어난, 거슬리는 녀석이라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아이샤를 향해 다가가던 그 때에,
“...야.”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언제 다친 건지 이곳저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쳤어?”
“...조금.”
조금이 아니잖아. 마음 같아선 뭐라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 무어라 따질 시간도 없다는 걸 알기에 입을 닫았다.
“...미안해.”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내게 사과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다가, 그게 옥상에서 했던말에 대한 사과라는 걸 깨달았다. 한동안 그 말을 듣고 힘들어했던 걸 생각하자, 괜스레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만, 지금 궁금한 건 딱 하나였다.
“그거...진심으로 한 말이었어?”
어느 때보다도, 빌런들과 대면해 싸울 때보다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몸이 긴장되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기를 잠시, 아이샤는 잠시 귀를 툭툭, 두드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됐어.”
“...정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샤가 쳐다봤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