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동아리는 싫어(2) (21/115)



〈 21화 〉동아리는 싫어(2)

“왔습니까.”

교무실로 들어서자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사람이 우릴 맞이했다. 뒤로 길게 늘어지는 푸른색의 머리를 땋은 그녀의 모습에 움찔하기도 잠시, 베로니카가 소파 한 쪽에 앉으며 손을 휘저었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이샤 이리안, 제논. 여러분의 얘기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네.”

소파에 앉았음에도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아마 실기 시험 도중에 벌어진 사건을 얘기하려 부른 거겠지만. 오늘 지각한 사실과 더불어 그녀의 날카로운 인상은, 차라리 빌런들과 대치하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 만큼이나 긴장시키게 만들었다.

홀짝-

조용한 교무실,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그 때에,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허가 없는 이능 사용, 공공기관시설 파괴, 재물 손괴, 과도한 이능 사용으로 아예 이능 경보까지 울렸더군요.”
“...죄송합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베로니카가 조목조목,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내 대답도 기어가는 듯, 겨우 말한 거니까. 나와 제논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에 움추려들자, 제논이 입을 열었다.

“그건...다 사정이 있...”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죠. 설령 그것이 빌런을 마주쳤고, 그에 대응해야 하는 입장에서 싸웠음을 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일개 학생일 뿐입니다. 히어로였으면 건물이 무너지든, 누군가의 재산을 해하든, 이능을 사용하든 아무 말 안 했겠죠. 하지만 여러분의 신분은 뭐죠?”
“...학생이죠.”
“네,  알고 계시네요. 그럼 이제 제가 할 말이 뭔지 알겠죠.”

처벌이겠지, 베로니카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학생에 불과했다. 설령 미래에 탑히어로가 되는 재목이라 한들, 아직은 학생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했으리라.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찰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치진 않았나요?”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라 생각할 만큼,따듯한 목소리. 사람을 휘감듯이 감아오는 그 부드러움에 넋을 놓기도 잠시, 고개를 들어 베로니카를 바라보자 그녀는 후후, 하고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교수님?”
“말을 그렇게 하긴 했지만, 여러분을 탓하거나, 벌을 줄 생각은 없어요. 교칙이라는 게 있고, 법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런 게 있는 만큼 정상참작이란 것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그 전에, 제가 먼저 묻지 않았나요? 어디...다치진 않았죠?”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 첫인상이 그리 좋진 않았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깨에 손을 얹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동안에도, 그 상냥한 손길에 몸을 맡긴  멍을 때리는 게 다였다.

“하, 제가 뉴스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는 둘이 있는 곳인데, 하필이면 그런 사건이 터질 줄이야. 뉴스 보자마자 뛰어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없으면, 무슨 기분인지 알아요?”
“어...오셨어요?”
“네. 물론 여러분을 찾다가 무너진 건물을 조금 수습하고 오긴 했는데. 으,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베로니카는 이마를 짚었다. 그냥 늘 힘없고, 화나면 좀 무서운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모습에 긴장이 풀려 나도 그냥 헤헤, 하고 웃어보였다.

“그으...어쨌든 칭찬할  칭찬해야겠죠. 아이샤, 빌런 10명을 제압했다고 A지구의 제이스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  CCTV 영상도 확보했고, 확인하니 정말 혼자서 전부 처리했더군요? 물론...손목이 다친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정도는 눈 감아주기로 했어요.”
“아하하...”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거긴 한데. 아무튼 그에 대해  말 안 한다고 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실기 시험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의문을 눈치챈 듯, 베로니카가 종이 두 장을 꺼내 보였다.

간단하게 알파벳 A가 적혀있는 1개의 종이와 C가 적힌 종이. 하지만 C가 적힌 종이에는 F라 적혀 있다가 취소선이 그어진 듯 지워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중 깔끔하게 A만 적혀있는 종이를 내게 건네며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는 잘했어요. 음...6시간의 공백이 있긴 했지만, 그건 빌런과의 싸움이라는 증거물이 있었으니. 빌런과 싸우기 전에도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철근을 막아 사람을 구하고, 길 잃은 미아의 집을 찾아주고, 할머니를 도와주고...이것저것 많이 했으니까 A로 결정했고요.”


흐음-

제논을 바라보던 베로니카가 곤란하다는 듯 미소를 억지로 짓더니, 이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어떻게 기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죠? A지구에 히어로가 있다고 한들, 아무리 그래도 할 일이 아예 없지 않았을텐데...”

그 말을 듣는 나도 곤란했다. 설마 그 때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줄이야. 아마 내가 한 말을 듣고 멍하니 있던 것일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제논을 쳐다보자 녀석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F라는 점수를 받고,  학년 유급되는 거겠죠.”
“유급...”
“근데, 아까 전화가  통 왔어요.”

전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로니카는 나를 보곤 살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 꼬마 아이한테 온 전화였는데요. 길에서 울고 있던 형아가 자기 집까지 데려다 줬다...거의  앞까지 왔을 이능 경보를 듣고 뛰어가더라-. 이렇게 말이죠.”
“너 울었어?”
“아, 아니! 안 울었어. 정말, 진짜로.”

설마 울었을 줄이야. 얘 심성이 그렇게 여릴 줄 몰랐다. 설마 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당황한 듯 손사레를 치는 제논을 안쓰럽게 바라보자, 베로니카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사이가 좋네요.”
“...아니,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요.”

아니, 어찌 보면 사이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친구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제논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살짝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내 대답이 섭섭했는지 살짝 허탈한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왜.”
“아니...그냥.”

입맛을 다시며 다시 바닥을 바라보는 녀석, 아무튼놀리는 건 그만두고, 제논의 점수가 어떻게 됐는지 들을 차례였다. F라는 점수를 준다기엔, 실선이 그어져 있는  걸렸다. C라고 써져있는 것도 있고. 아마 아까 전화 왔다는 그 얘기가 영향을 준 건가.

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베로니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종이를 가리켰다.

“그래서 제논, 그 아이의 말을 우리는 믿기로 결정했어요. 사실 아무 증거도 없는데다 아이의 말이긴 하지만...그래도 직접 전화까지 온 경우는 처음이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주는 점수는 C. 유급은 피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열심히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C라, 설마 실기 시험 시간에 아무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에 울고 있을 줄이야...뭐, 자기는 아니라지만- 어린 애의 시선은 가끔 감정을 꿰뚫을 때가 있는 법이니.

“이제 실기 시험 얘기는 끝, 그나저나 두 사람. 동아리는 생각해봤나요?”

동아리? 우리 둘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묻자, 베로니카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뭔가 불안한데.

#


아카데미에서의 동아리 활동은 ‘필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중에 히어로가 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일종의 스펙, 그래서 아카데미 차원에서 굉장히 많은 지원을 하고 있었고, 나또한 그걸 알고 있어 언젠가는 동아리에 가입할까 생각중이었지만...

“...그래서 다른 동아리에 이미 생각이 있다구요?”
“넵...죄송합니...”

쾅-

찻잔이 탁자에 부서질  닿자, 그 굉음에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아니, 갑자기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한다한들, 바로 승낙할 수야 없지 않은가. 한 번 정해지면 졸업할 때까지 바꿀 수 없는 동아리. 조금 신중하게생각하고 결정하고 싶었다.

“그...조금 생각을...”
“아이샤, 우리 동아리는 명문이라고요. 졸업생중 유명한 히어로들은 저희 동아리를 전부 거쳐갔어요. 심지어 에드윈 카르멘도! 저희 동아리였다구요!”

어째 베로니카 교수님의 다른 모습을 오늘만 여럿 보는 것 같았다. 차갑고도 냉철한 모습에서, 자애롭고 상냥한 모습, 그리고 저렇게신경질적인 모습까지. 아까부터 나를 놓칠 수 없다며 동아리 가입하라고 하곤 있지만...왠지 그렇게 끌리진 않았다.

제논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고, 특히 아까 에드윈 카르멘 얘기가 나왔을  살짝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마  동아리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지.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제논 앞에서 그 사람 얘기를 계속하게 둘 없어 입을 열자, 베로니카도 자기가 무어라 한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음, 제논...미안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괜찮습니다 뭐...이름만 듣는다고 해서 그렇게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아무튼, 저희 동아리에서 반드시 아이샤와 제논을 데려가고 싶거든요. 시간을 준다면 하루,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저희보다- 더 완벽한 동아리는 없을테니까요. 네, 그건 자신 있어요.”
“아하하...”

이제는 이글거리다 못해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살살 피하며,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여기 있다간 억지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될 터, 눈치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제논의 등을 툭툭 건드리자 그제서야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저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네, 저희 이제 점심시간 이라서...”

이어지는 제논의 말을 듣던 베로니카가 시계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오래 붙잡아두었다는 걸 아는 걸까.

“음,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럼, 생각 잘 해보고 내일 봐요.”

그렇게 교무실을 빠져나오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고생했어.”
“아니야, 그냥 얘기가 그렇게 길게 이어질지 몰랐어.”
“...그나저나 내일 보자는 건.”
“그 때는 정말 동아리에 억지로라도 가입시키겠다는 거겠지.”

그건 싫은데, 솔직히 말해 히어로가 되기 위해 동아리에 가입하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소설 속 세상에 들어왔고, 이왕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 한 번 가입해보려는 거지. 철저히 흥미,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의 동아리는...우선 순위에서 많이 멀어졌다.

지원이 많은 것도 좋다. 장학금? 솔깃하긴 했다만, 당장 빌런을 퇴치했다는 명목으로 돈이 들어올 예정이라 돈이 급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철저히 히어로가 되기 위해 짜여지는 빡빡한 스케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왕 17살이 되었는데, 조금 놀아도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내 흥미를 끌만한 동아리.

“너는 동아리 생각해둔 건 있어?”
“...아니, 동아리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원작에서는 이 때쯤 교수님이 아까 얘기한 동아리에 들어갔을 텐데. 이런 대화를 하다보면 전개가 틀어지긴 틀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다치지도 않았고, 단순히 건물이 조금 많이 무너지는 걸로 끝나서 그런가. 제논에게서는 원작에서의 이맘때만큼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훨씬 낫네.

“아-너!”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누구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내 몸을 덮치는 무언가. 황당해 순간아무 말도 못한 채,  몸을 끌어안은 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샤?”

얼마나 울었는지 화장이 다 번져버린 흉측한 얼굴. 그래도 본판이 있으니 그리 못생기진 않았다만, 그럼에도 보기 좋은 얼굴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름 어른이라는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까.

“흐윽...흐아아앙...!”

일단...내 가슴팍에 머리를 박은  우는 그녀를 진정시키는  우선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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