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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동아리는 싫어(4) (23/115)



〈 23화 〉동아리는 싫어(4)

“...고마워.”

오늘 내가 눈물만 몇 번을 닦아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제논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이제는 후련해진 듯, 제논은 아까보다한결 나아진 얼굴로 내게 미소 지었다.

“그, 원래 그렇게  울어?”

저번에 A지구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렇게 감성이 풍부한 녀석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장난삼아 묻자 녀석은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자기는 운 적 없다며, 무슨 소리를 햐나고 따지길래 손에 묻은 물기를 보여줬더니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먼저 가. 나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어디를?”

...내가 화장실 간다는 걸 굳이 입으로 말해야 할까. 그런 의미를 담아 살짝 쏘아보자 그제서야 눈치를 챘는지 녀석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갈게.”
“그래, 빨리 가.”

뒤돌아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잠시. 녀석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졌을 때-

“으으으...!”

건물 안이라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나는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녀석을 이해한다곤 해도, 방금 한 행동은...너무 쪽팔리잖아. 누가 보면 여자친구로 보일 만큼,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의 행동에는 문제가 많았다. 얼굴을 잡아 시선을 마주치고- 눈물을 닦아주고...

쿵쿵-

가슴을 두드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잠시, 격해진 감정 탓에 주변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는 걸 느끼곤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관자놀이를 꾹, 하고 눌러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내가 했던 행동을 후회했다.

조금 다른 방법으로 대해볼 걸, 겉으로 불안감이 대놓고 드러나는  모습을 보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해버리고 말았다.

“후우...”

내가 생각해도 이건 플래그가 아닐까, 나름 조심하자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새 또 헤이해진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조심하자...”

아직, 나는 히로인이 되는 걸 받아들일  없으니까. 딱 친구까지가 적당했다.


#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다쳤어.
-...네가 문제야, 제논.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어온 말들, 모든 일의 책임을 내게 돌리고, 잘못을 회피해 내게 뒤집어 씌우는 사람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그렇게 몇 년을 듣자, 내 가슴 속에는 작은 의심 하나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나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거라면.

[빌런의 습격으로 한 유치원의 교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
[이능 사용 중 사고로 사망 사고가 발생...]

내게 유독 상냥했던 선생님이 어느 날 죽고, 나와 친했던 친구가, 어제까지만 해도 ‘내일 보자.’라며 인사했던 녀석이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아니 아닐 거야. 정말 사고일 뿐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기도 잠시, 겨우 마음을 추스렸을 때쯤, 다시 나와 가까운 이가 죽고, 종국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때문에 누군가 다친다. 어린 시절을 지배해온 그 생각 덕에, 나는 일부러 사람들을 멀리했다.그저 숨을 죽인 채, 눈에 띄지 않게. 혹여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지 않도록.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옅어진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무수한 영향을 끼친 만큼 아직까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아이샤가 다친 걸 봤을 때, 묻혀있던 기억의 언저리에서 다시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샤가 다친 것도, 빌런에게 습격당한 것도. 전부  탓이다.

목에 있는 상처를 보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가. 허나 이젠 멀어질 수조차 없었다. 헤라 카르멘이 직접  입으로 다시 보자고 했으니. 이제 그녀가 표적이 되는  기정사실이겠지.

그녀를 업고 달리면서도, 휘청이는 것을 부축해 함께 걸으면서도, 지하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아이샤를 바라보면서도, 불안감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헤라 카르멘이 너무나도 쉽사리 물러났다는 점에서. 자기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불안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누웠음에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주먹을 허공에 대고 쥐었다 펴기를 몇 번. 배게에 머리를 박은 채 고요한 외침을 내뱉어도, 자꾸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이 떠올라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닐 터였다. 아니- 그녀가 옥상에서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라 했으니 아마 친구 정도는 되겠지.

씨익.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다시 한 번 어이없다는 감정을 느낀다. 친구, 한 때는 그리도 피하려 했던 존재인데도.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며 넘실거리는 이 감정은 분명히 기쁨, 아니 희열에 가까웠다.

-네가 처음이야.
-업어줘.

별 의미 없는 말 들을 떠올림에도 끓어오르는 감정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말 한마디에 이상한 망상을 떠올리고, 함께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며, 더 나아가 아이샤라는 한 사람을, 여자로. 내게 소중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뒷걸음질 치던 그 모습을, 나와 카이사가 싸우던 것을 말리고- 양호실에서 했던 대화를, 자고 있으면 다가와 깨우던 그 얼굴을, 내게 업어달라며, 진지한 얼굴로 말하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몸을 돌돌 말은 이불을 부여잡으며, 이 이름 모를 감정에 휘둘리기도 잠시. 이내 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아이샤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


눈을 떴을 때 보이는 하늘이란,  인생에 걸쳐 몇 번 보지 못했을, 그런 청명한 하늘이었다. 비록 비가 하늘을 부수기라도 할 듯 세차게 내리며, 습한 공기가 몸을 감싸고-꽃잎들이 떨어져 지저분한 바닥이었건만. 그 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 이 상태에 나는 다시금 어제 했던 생각들을 떠올렸다.

아이샤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탁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나는 고심에 빠졌다. 한 번도 이 다음을 겪어보지 못한 탓이겠지.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평소처럼 다가갈 수 있으려나?

“차라리 아버지랑 대화하는 게 낫겠네.”

마음을 자각한 순간, 평소처럼 대하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입을 꾹 닫고 있을까. 혹여나 실수하진 않을까. 그런 생각에 몸부림치기도 잠시, 오늘이 아카데미에 가야하는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

이제는 수업도 좀 열심히 듣고, 시험도 열심히 봐야겠지. 입학한  한 달, 그동안 지켜본 아이샤의 모습은 우등생에 가까웠으니. 어울리려면, 나도 공부를 좀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언제쯤출발할지 정하려 시계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9시.

그 순간, 나는 우산조차 챙기지 않은 채 뛰고 있었다. 일어났을 때는 분명 7시였는데, 씻고, 옷을 갈아입고 생각 좀  그 순간이 그렇게도 길었던가?

세차게 내리는 빗 속을 거닐며, 이렇게 한심한 자신을 욕했다. 지각은 여지껏  적이 없었는데. 지각이라니- 또 한숨을 쉬며 실망할 아이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모습마저도 이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저 멀리서 우산을 쓰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치렁이는 백금발, 그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아이샤를 떠올린 것은, 내가 중증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인 걸까. 홀린 그 인영을 따라 뛰어가기를 잠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나는 그 인영이 아이샤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가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지나쳐?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이 기회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그런 고민을 하며 따라가던 나는 주먹을꽉 쥐었다. 딱 한 번, 용기를 내보자.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아이샤에 곁에 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아이샤.”

아이샤가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이 영원과도 같아서, 마치 주마등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왜 대답이 들리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그 때에, 그늘진 우산 아래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제논?”
“그...우산 좀 같이 써도 될까?”

방금 내가 뭐라고 말했지? 무어라 말하긴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애져서- 무언가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차차, 하는 사이에 우산이 내게 건네지고, 어느새 나와 아이샤는, 우산이라는 공간 아래에 함께 있었다.

...가깝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심장소리가 혹여나 들릴까 일부러 거리를 벌렸다. 어깨가 젖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아이샤에게 물방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척-우산을 아이샤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비가 오는 날엔 향이 더 잘 맡아진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 아이샤의 샴푸향이  어느 때보다 짙게 느껴졌다.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이나 달콤한 체리향, 일부러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누가 보면 기겁할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저 좋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내가 느리게 걸으면 아이샤도 느리게 걷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늦춘다. 이미 지각이니까, 조금 더 늦더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며- 일부러 아무말이나 꺼내며, 그렇게 나는 이 시간을 만끽한다.

“야, 너 어깨.”

아이샤의 말을 듣고 순간 지어질 뻔한 미소를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응? 아, 괜찮아. 머리만 안 젖으면 됐지.”

날 뻔히 쳐다보는 아이샤에 눈빛에 시선을 슬쩍 피한다. 도저히, 평범하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 뒤-

스윽-

 몸에 붙어오는 따스한 체온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아이샤?”
“어깨 젖잖아. 그냥...있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면서 내가 걱정된다는 듯 안쓰럽게 보는 그 시선에서. 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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