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수련은 싫어(3)
미로 안에 있는 괴수들은 대부분 내 약점과 호응하는 녀석들이었다. 얼음을 녹여버릴 만큼이나 뜨거운 불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것, 검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내게 접근하는 것, 그리고 나보다도 더욱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을 사용하는 것까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돌파해가며 느끼는 것은, 내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도, 화력, 그리고 상상력까지. 이전의 아이샤가 이능을 어떻게 다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것을 형태로 현현시킬 수 있는 내 이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상상력이었다.
단순히 얼음으로 창 형태를 만든다하더라도, 형태에 따라 그 활용은 무궁무진해진다. 그 의외에도 내가 모른 형태를 알게 되고, 또다른 활용이 가능해진다. 단순히 가지고 있는 지식만으로 이능을 강화할 수 있다면, 당연히 지식을 습득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 점을 말하자 레이 마이어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이 줄곧 생각하고 있던 점이라고, 마법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내 이능은 역시 지식의 유무가 컸다. 그녀가 지적한 점은 내 얼음의 경도를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과학 지식과, 여러 물건들의 구조였다.
그냥 겉모양만 유지해서는 안된다며,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루었을 때 완전한 경도를 가질 수 있다는 말에,
“...도서관에 있는 거구나.”
“응...”
도서관에 가는 것도 벌써 며칠 째인지, 실기 시험이후로는 쪽지 시험도 사라져 공부에 대한 압박이 덜어지나 했더니. 설마 내 자의로 도서관에 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확실히...더 이상 내 상상만으로 얼음을 강화하는 건 힘들어 보였으니까.
옛날 옛적에 끝내버린 과학 공부를 다시 하다니, 그래도 조금 씩 떠오르는 기억에 어찌어찌 따라잡고 있었다.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왜 제논이 여기 있냐는 건데.
책을 보는 건지 안 보는 건지.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를 펴 놓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게 영 거슬린다. 애초에 얘 공부도 안 하지 않나?
“넌 왜 여깄어?”
“...널 혼자 둘 순 없잖아.”
헤라 때문에, 그렇게 덧붙이며 녀석은 아예 책에 고개를 박았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 거겠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자 옆쪽에 있던 한 여학생이 우릴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주먹도 불끈, 쥐어 보이고. 뭐 어쩌라는 걸까.
그렇게 당부했건만, 제논은 어지간해서 나를 혼자 두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교수님이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더라도, 녀석은 기어코 따라오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위험하다고, 요즘 들어 헤라 카르멘이 조용한 게 심상치 않다고.
내가 그 때 살짝 다친 게 녀석에겐 좀 충격이었는지, 약간 상처만 보여도 얼굴이 팍, 굳으며 상처의 출처를 물어왔다. 심지어 종이에 베인 것도, 이쯤 되면 집착이 아닌가 싶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친구니까.’. 딱히 부정하기도 뭐해서 같이 다니고 있긴 한데...
주변 시선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 사귀었냐며, 요즘 들어 둘이서 엄청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심지어 프레이도 자기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냐며 엉겨 붙고. 나중에 놀이동산 같이 한 번 가는 걸 약속해서 좀 풀린 것 같긴 하지만...
신경쓰이는 건 매한가지 였다.
내가 행동하는 것이 묘하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때가 있었다. 히로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제논과 완전히 남남 사이가 되려 할 때, 행동이 어딘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상한 감각을 받긴 했는데, 지금 느끼는 건 그 것과 달랐다.
지금 내 상태는 완전히 아이샤와, 그러니까 완벽한 여자아이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취향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예전처럼 마음과 행동이 따로 놀진 않았다.
주변에서 들리는 건 나와 제논이 무슨무슨 사이라는 얘기,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얘기뿐이니. 가만히 멍때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생각이 그리로 흐를 뿐이었다. 뭐, 얘가 이제 특별히 막 싫은 것도 아니고, 성격도 특별히 모난 데는 없지만. 딱 친구로써의 호감이라 해야 할까.
더 이상의 관계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아무튼 근래에 자꾸 신경쓰이는 부분이 생겨서 약간 불만이 있을 뿐, 그 것 외에는 별 특이한 일이 없었다. 도서관에 꾸준히 들러 공부하는 것도 그런 잡념을 지우려 하는 행동의 일환이었으니.
“...잘 자네.”
상념을 지우며 옆을 바라보자, 제논이 책 위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아까 머리를 박더니 그대로 잠든 걸까. 열심히 하겠다더니, 저러고 자는 게 약간 괘씸하긴 했지만.
“훈련 때문에 힘들었을 테니까.”
미로를 탈출하는 훈련도 어느덧 3시간 정도로 늘어났고, 시간만큼이나 방대해진 미로를 탈출하며 괴수를 처리하는 것이 안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논이 하는 훈련에 강도에 비하면 내가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기엔, 너무도 편한 훈련이지 않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를 폭발 시키고, 극한의 환경이 이루어진 환상 속에 들어가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채찍질한다. 왜 이렇게 강도가 심하냐고 물어봤을 때 레이 마이어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녀석은 저래도 되니까.
그 말을 듣고 순간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그 훈련에 대해 불만하나 표하지 않는 제논을 보며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원동력 삼아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저런 훈련을 하면서도, 녀석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받아들인다. 묵묵히, 그렇게 나아간다. 그러니까 주인공이겠지.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야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걸 일주일, 이주일 계속 반복한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걱정하고, 혼자 두려 하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약간 부담스럽긴 해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걱정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으니. 내가 다치든, 어디 가서 맞고 오든, 설령 이가 부러져 입에서 피가 흘러도.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고마워.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다시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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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네 방향에서 솟아나온 얼음이 불을 속박한다. 그 기둥을 감는 사슬, 이제는 녹지도- 아주 약간의 물기조차 없이 불을 견뎌내는 얼음을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
이제는 녹지 않는 얼음이 완성되었다. 물론 저것보다 더 뜨겁거나, 아예 레이저로 지지는 수준이면 녹기야 하겠다만. 어지간한 불과 고온에는 녹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이제 마음에 드는 수준까지 왔네.”
“오늘은 직접 들어오셨네요.”
“슬슬 미로를 파괴할까, 생각 중이었거든. 너희에게 전할 말도 있고.”
전할 말이라,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 마이어가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동안 고생많았어, 책 읽고 미로 도느라 힘들었을 텐데. 묵묵히 해줘서 고맙네.”
“뭘요, 결국 다 절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하, 너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결혼할 상대가 없긴 했지, 그렇게 입맛을 다시던 레이 마이어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검게 물들은 천장이 일그러지며, 시야가 뒤집힌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처음에 있었던 공터. 저 멀리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논이 보였다.
“제논도 끝난 건가요?”
“음, 대충 그렇지. 아직 너랑 비교하면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야.”
“아하하...”
원래도 어디 가서 맞을 것 같진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쓰러져 있는 제논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차가워.”
목에 얼음을 대자 바로 반응하는 녀석, 기절하진 않았나 보다. 매일 훈련이 끝나면 기절해 있어 옮기기 힘들었는데, 하기야 버텨냈으니 훈련을 끝내준 거겠지만.
“할만 해?”
“아니, 죽을 것 같아...”
생각도 하기 싫은 지, 몸을 부르르 떨며 하늘을 쳐다보던 제논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넌 어때, 생각하던 대로 됐어?”
“...뭐, 어느 정도는.”
“다행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녀석은 이내 일어나려는지 으그극,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 잡아줘?”
“...내가 왜?”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미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뻘쭘 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 있으면서, 손은 왜 잡아달라는 건지. 녀석을 살짝 흘겨보고 있을 때 쯤, 레이 마이어가우리에게 다가왔다.
“음, 한 2주 정도 이렇게 했나. 이제 당분간 너희랑 할 훈련은 없을 거야.”
“...그럼 이제 방과후에 안 나와도 되는 건가요?”
“아니, 훈련이 끝이라고 했지. 아직 너희가 해야 할게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이 마이어는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그 위로 떠오르는 건 한 홀로그램.
[동아리 제전]
이라는 글씨와 함께 그 아래에는,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는 모든 학생이 필수적으로 참가할 것.’ 이렇게 적혀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동아리 활동을 안 하는 사람은 없으니, 아마 전교생이 참가하는 행사겠지.
원작에서도 한 번 나왔던 유일한 동아리 활동이었다. 나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데다, 제전에서 녹화되는 영상들이 히어로들에게 전해져 나중에 길드에 스카우트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그만큼 학생들 사이에서 열심히 준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러고보니 이게 일주일 뒤였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을 때, 레이 마이어가 입을 열었다.
“올해 제전 내용은 간단해. 2인 1조로 팀을 나누고, 후보 선수는 총 3명까지 둘 수 있다. 2인 1조로 짜진 팀 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다른 팀을 제친 뒤 중앙에 있는 코어를 부수는 게 이번 제전이야.”
“1등을 하라는 겁니까?”
제논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 얘기를 왜 꺼낸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레이 마이어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제전의 보상이 조금 특이하거든.”
“보상이라면...”
그 순간, 너무 초반부였기에 떠오르지 않았던 한 기억이 떠올랐다. 동아리 제전, 제논이 참가해 우승을 이끌었던 그 에피소드. 그 곳의 보상이 다른 해와는 달리, 너무도 파격적이었기에 아카데미에 한동안 파문이 일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서포트 아이템.”
틱,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1위부터, 3위까지의 보상이 서포트 아이템이다.”
그 말도 안 되는 보상에 일어날 사건들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가 다시금 지끈거려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