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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 〉제전은 싫어(4) (33/115)



〈 33화 〉제전은 싫어(4)

도시락을 모두 먹어치운 녀석은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수북히 쌓인 도시락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제 슬슬 코어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기에 움직여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30분 정도.”

하늘에 떠오른 해가 어느새 꼭대기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정오에 다다르면 코어가 나타나니, 이제 정말 출발해야겠지.
2번 검을 꺼내어 소모한 정신력도 어느새 전부 회복된 시점이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아까 잠깐 여기에 왔던 오딘 카르멘.

그는제논과 마치 친형제 같은 사이처럼 보였다.
하기야, 원작에서도 종종 등장해 제논을 도와주었으니까.
카르멘가에서 유일하게 선역을 맡고 있는 그는 언뜻 봐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비 오는 날의 프레이처럼 텐션이 높다는 건데.

그런 점을 생각해봐도 결코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드윈 카르멘의 자식이면서도 저런 성격을 지닐 수가 있던 거였구나.
게다가 찾아와 싸움을 걸 줄 알았는데, 싸움도 안 걸고 그냥 물러나는 걸 보니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아까있었던 오딘과의 만남을 떠올리던 그 때에, 곁에 있던 제논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지, 약간 얼굴을 찌푸린 녀석을 바라보며 별 생각 없이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다.

“오딘 카르멘.”
“형은 왜?”
“아니, 생각보다 착한 사람이다 싶어서. 와서 싸우자는 건 줄 알았는데.”
“...착하기만 한 사람이야.”

순간, 제논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그늘이 졌다.
착하기만  사람, 제논은 오딘을 그렇게 평하며 말을 이어갔다.

“키도 너무 크고, 음...솔직히 말해서 키는 딱 나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어휴.”

힐끔, 제논은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원래 나도 180 넘었거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누가 믿어주랴.
이제는 163정도 키가 되어버렸으니, 다시 같은 높이의 공기를 느끼는 건 힘들 터였다.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 나는 옆에서 무어라 조잘거리는 제논을 무시한 채 그대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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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어가 나올 때가 되자 얼추 남은 동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반만 하더라도 끊임없이 습격해오던 녀석들이 조용해진 것도 그렇고, 스마트 워치에 남은 인원 수가 표시되기 시작된 것도 있고.

“42명...”

코어가 나오기까지 앞으로 10분, 그걸 감안하면 충분히 많은 수였다.
동아리로 따지면 21개나 남은 건가. 하지만 원작에서도 코어가 나온 직후에 순식간에 쓸려나갔지.
우리는 그걸 대비해야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공터, 사실 지금도 육안으로 공터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혹여나 헤라 카르멘과 마주치게 될까 최대한 신경을 집중했다.
만약 마주치게 된다면 곱게 끝날 일은 없을테니. 지금은 힘을 비축해야 할 때였다.

제논이 숲에서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단순히 검을 뽑아 휘두른다는, 그런 실용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싸워도 충분히 제전 진행 중에 정신력을 회복할  있었다.
게다가 잘못하면 숲이 불타 위치가 드러나니, 그런이유도 있었고.

적어도 인원수가 줄었을 때까지는, 힘을 아껴야 했다.

“...후우.”

일부러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긴장으로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리라.
몸 구석구석 퍼진 호흡이 빠져나가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내가 모르는 전개, 원작처럼 그저 그런 마음으로 임하는 헤라 카르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력(全力).

할 수 있어. 그렇게 읊조린다.
의문은 지금 필요치 않았다. 그저 가진 것으로 맞붙을 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움직인다.
마치 바둑을 두듯, 정오라는 화점(花點)에  돌이 놓아진다.
툭, 마침내 돌이 닿았을 때- 공터에 순간 굉음이 일었다.

푸른색의 보옥(寶玉),
잘 세공된 보석을 보듯 섬세히 조각된 그 보석은, 철로 만들어진 관으로 뒤덮여 있었다.
땅이 갈라지며, 보석의 중심에서 순간 섬광이솟구쳐 나왔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섬광은 이내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쪼개져 주변으로 퍼졌다.
하나의 장막, 공터 인근을 감싸는 푸른 장벽이 생겨나고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42명이었던 인원수가 40명으로 줄어든다.
파지직- 등 뒤에 놓여진 장막에서 섬뜩한 전류가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쪽으로 가자.”

장막은 경기장을 제한하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코어를 파괴하려 도달하기 위해 긴 시간동안 지루한 게릴라전만 거듭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자기장.
닿으면 순식간에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곧바로 탈락이었다.
은신, 은폐 등에 특화된 이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유리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자기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제논, 이제 이능 써도 돼.”
“...벌써 준비 해뒀어.”

뛰고 있는 와중에도 제논은 허리춤에 들린 검을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미소 지을 만큼이나 여유가 있는 건가. 그래, 구태여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카르멘가를 제외하면 전부 잔챙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얼음 기둥이 솟아남과 동시에, 길쭉한  형태의 검이 드러난다.

다수가 아닌 소수를 상대할 때는 월야가 훨씬 편하니까,
2번 검을 뽑아낸 지금에 와서 월야를 만드는 데 소모되는 정신력은 극히 미량에 가까웠다.

타다닥-

그렇게 무릎까지 오는 풀을 밟아 다다른 곳은 코어가 바로 보이는 공터.
나무에 가려져 있어 신경쓰이지 않았던 태양이 눈을 찔러 순간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주위에 누가 있나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도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아마 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제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헤라 카르멘과 카이사, 오딘 같은 이들은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터였다.
특히 C구역에 사람이 제일 많았던  생각해보면, 아마 무언가를 꾸며두지 않았을까.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얼음 송곳을 만들어가던  때에, 저 멀리 숲에서  인영이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카이사.”

입학식 날 보았던, 제논과 싸웠던  사람이었나.
제논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앞에 다가오는 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 제논. 그리고 거기 너.”

보랏빛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금처럼,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듯 그녀의 기세가 단번에 주위를 삼켜나갔다.
2인 1조로 맺어진 팀, 그녀와 팀을 맺은 이를 찾기 위해 눈을 돌리자 저 멀리 나무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쩌저적-

허공에 생겨난 얼음의 방패, 곧이어 무언가가 방패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격?”
“하, 쓸모없는 녀석.”

카이사는 혀를 차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저격을 그만두라는 신호였을까, 하기야 일반적인 총탄으로는 내 얼음을 뚫을 수 없으니.
경지에 다다른 저격수가 아닌 이상 전투에 방해만  뿐이었다.

기기긱-

기괴한 소리가 나며, 카이사의 몸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돌 그자체로 변모하는 것처럼, 어깨, 등이 부풀어 오르며 이내 단단히 굳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가시, 회백색의 주먹을 거칠게 부딪히며, 그녀는 우리를 노려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내 그 모습이 이능이 강화한 것임을 깨닫는다.
내가 가진 이능이 7번 검까지 강화되는 것처럼, 그녀또한 자신의 이능을 강화시킨 것이리라.

“...꽤 흉측해졌어.”

제논이 비웃자, 카이사의 얼굴이 흉측하리만치 일그러졌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에 균열이 일고, 돌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저거, 진짜 돌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카이사는 주먹을 휘둘렀다.

“아이샤!”

제논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얼굴의 옆쪽에서 풍압이 느껴져 왔다. 분명 제논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날 노리는 구나.
아마 빈틈이라 생각한 거겠지. 까끌까끌한, 거친 감촉이 볼에 스쳐갔다.

그래, 단지 스쳐갈 뿐이었다.

풍압이 느껴진 순간, 나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머리보다도 몸이 더욱 빨리 인지했기에, 피한 순간부터 생각은 시작되었다.
월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는, 아마 베기 힘들겠지. 태동을 꺼내기엔 애매한 시간,

그렇다면-

주먹을 피한 자세 그대로, 몸을 내던져 카이사와 부딪혔다.
퍼억- 순간 흔들리는 몸, 얼음을 발 뒤편에 만들어 냈기에 생겨난 가속력은 카이사에게 틈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콰직-

분노에 가득 찬 카이사의 발이 땅을 부쉈다.
부서지는 땅의 파편이 공중에 휘날리고, 곧바로 카이사의 등에서 폭발이 일었다.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제논의 얼굴, 어느새 다가온 제논이 카이사의 등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쩌저적-

미로에서 거듭된 훈련으로 상승된 것은 단지 얼음이라는 이능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다루는 기술도, 따라서 내 신체능력도 이전에 비해 훨씬 향상되었다.
전에 B지구에서 10명을 베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이나.

월야를 든 손이 천천히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휘청이는 카이사의 가슴팍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나아간다.
마치 붓을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최선의 공격을 위해 그려지는 가장 아름답고도 효율적인 검로(檢路). 두 팔로 가슴팍을 가림에도, 그 방어마저 베어 가른다.

타악,

그리고 가슴에 검이 닿는 순간.

퍼어엉-! 굉음을 내며 대기가 터져나갔다.
그 진동이, 소리가, 주변을 터트리며 장막을 진동시켰다.
순간이나마 검이 소리를 뛰어넘었기에 나는 폭발.
흩날리는 먼지를 팔로 가리며 반응을 살폈지만, 월야에 닿은 카이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했어.”

제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먼지가 사라지자 보이는 건, 이미 초점을 잃은 채 방황하는 카이사의 동공.

부서진 월야를 거두었을 때, 카이사의 몸은 힘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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