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제전은 싫어(5) (34/115)



〈 34화 〉제전은 싫어(5)

카이사가 쓰러진 뒤,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리 1학년이었지만, 그렇다한들 카르멘가의 자식이었다.
엘리트, 유망주, 미래의 탑히어로 같은 온갖 수식어와 미사여구가 붙어온 그런 사람이 순식간에.
그것도 잠깐새에 쓰러진 것을 본 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작은 감정의 씨앗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안, 초조, 두려움, 그리고 의문.

승산이 없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들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분명 카이사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제논 카르멘은 이전의 카이사와 호각이었으니, 이능을 강화하다 못해 혁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카이사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허나 결과는 참혹했다.
압도적, 제논이 끼어든 것은 카이사의 경화조차 부수지 못한 미미한 폭발   뿐.
제논과 같은 팀인 아이샤 이리안이라는 여학생은, 카이사를 단 일격에 제압했다.

호흡도 거칠어지지 않은 채,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여 그 시선에 자신이 닿을까, 지켜보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비록 그들의 수가  둘인 저들에 비하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이샤 이리안이 들고 있는 푸른색의 검이, 카이사를  일합에 쓰러트린 그 무위가, 감히 다가설  없게 하는 위압감을 만들어냈다.

“푸흐.”

순간, 누군가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긴장으로 가득한 적막, 답답하리만치 심장을 옥죄여 오던 고요는, 그 웃음소리에 단번에 깨져 나갔다.

푸른 머리카락이 젖지 않는 물결을 타고 일렁였다.
그녀는 물이었다. 설령 상대가 어떻다 한들, 그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까지고 나아가는 물이었다.
앞에 태양이 있다 해도, 앞에 무엇이 있다 해도 결국 물은 흘렀다.

뜨거운 열에 증발되더라도, 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종래엔 다시 내려와 흐른다. 그렇기에 그녀는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런 이능이 그녀에게 주어졌던것일지도 몰랐다.

퐁,

그녀의 손에 있던 작은 물병의 뚜껑이 열리며, 그 속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이 따르는 지휘에 맞춰가듯, 손을 따라 궤적을 그리며 햇빛을 찬란히 담아냈다.

물은 퍼져나간다.
두려움으로 물들었던 마음을 다시 적시고, 얼음으로 얼려진 듯 움직이지 않았던 발을 다시 녹여 그들을 나아가게 만들었다.

썰물이 있으면 밀물이 오듯, 그들은 물을 따라나아갔다.
하나의 물줄기가 흘러 하나의 점에서 만난다. 일점으로 이어진 물들은, 이내 파도가 되어 기세를 키워갔다.

“이길  있어!”

사라졌던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들의 곁에는 카르멘가가 둘이나 있었다.
이제 고작 1학년인 카이사가 쓰러졌을 뿐이었다.
아직 헤라 카르멘이, 오딘 카르멘이 남아있었다. 설령 카이사를 쓰러트린 아이샤 이리안이라 한들  둘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파도의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그 둘을 집어 삼켜 흔적조차 지우려는 듯, 40명에 다다르는 이들이 한 번에 진격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허나 그들이 잊은  있다면,

물은 결국 얼어붙기 마련이었다.

#

2번 검은 대검이었다. 한 번을 휘두르는데에도 많은 체력을소모해야 하며,
단순히 소환으로만 끝나는 월야와는 달리 휘두르는데에도 이능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그로 얻을  있는 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파괴력. 검이 닿는 한, 앞에 있는 그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다.

검이 닿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했으나, 증강계가 아닌 이상 내가 직접 휘두르는 검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샤는 이능보다도, 검술의 천재였으니까.

36명, 나와 제논을 제외한 그 인원이 한 번에 몰려올 때 든 생각은 단순했다.
역시 그랬구나. 카이사가 단신으로 나왔음에도, 주변에 아무도 없던 이유.
아마 숨어서 기회를 노릴 거라 생각했다. 헤라 카르멘은 그런 여자였으니.

마치 뱀처럼, 상대가 약해질 때까지 숨어 기다린다.
독니를 몸속에 쑤셔 박고,  독이 몸에 퍼져 먹잇감이 비틀거릴 때 그녀는 나섰다.

제논이 움직이려는 듯 검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나서려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얼굴, 오딘 카르멘이 제논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헤라 카르멘과 같은 조였구나. 그의 얼굴은 씁쓸해보였다.
원치 않는 구도였다는 듯, 수많은 이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에도 그는 뒤에서 그저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오딘을 맡아.”

내가 제논에게 한 말은 그게 끝이었다.
제논은 힘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아직 내게는 남은 수가 있었고, 당장 36명을 제압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충분 했으니까.

쩌저적-

월야가 허공에서 흩어지며 재구축된다.
달빛을 머금은 검신이 쪼개지고, 그 자리에 태양빛이 스며든다.
생명의 기운을 담은 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시 내주는 자애로움을 상징하는 검. 그렇기에 검신은 넓고, 날은 뭉특했다.

베는 검이 아닌, 부수는 검.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를 잃고 공포에 흩어지게 만든다.
단순히 만들어냈음에도 주변에 얼음이 꿈틀거리며 피어난다. 마치 꽃처럼, 뾰족히 피어나는 얼음이 퍼져나가며 몰려오는 사람들을 덮쳤다.

마치 파도와 같았다. 헤라 카르멘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일까. 그녀의 이능은 물이었으니.
녹색 눈동자와 마주치며 검을 치켜들었다. 육중한 무게와 함께, 곧이어 이어질 일격이 만들어낼 피해를 계산한다.

...헤라 카르멘까지 닿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인원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검이 하늘로 솟았다.
파도가 흝뿌리는 물결이 사방을 적시며, 땅을 부수며 몰려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기세에 몸이 저릿했다.

확실히, 그녀의 계획은 꽤 괜찮았다.
이렇게 다수가 단 번에 다가온다면, 아마 상당히 강한 사람이더라도 상대하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2번 검을 뽑아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기에, 이 계획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하늘에 솟은 검이 선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갔다.
둔검, 느리지만-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태동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닿는다.

파도의 편린에 닿는 그 순간, 파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콰아앙-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36명, 언뜻 보면 많은 수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그저 헤라 카르멘이라는 사람의 명령에 따른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묶어놓은 결속은 약하다 못해 없는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조금만 대처를 빨리했더라면, 그들이 한 마음으로 공격을 방어했더라면.
나를 공격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오는 공격을 분쇄한다는 목적으로 왔더라면.

이리 쉽게 끝나진 않았을텐데.

바닥에 힘없이 퍼진파도, 탈락한 사람들이 가루로 사라지며 하늘에 흩날리는 광경을 바라보았을   앞에 남은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콰아앙-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아마 제논과 오딘이 싸우는 소리겠지.
 소리에 주의를 지우며, 헤라 카르멘을 향해 조소를 지어보였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그녀의 얼굴은 처참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일격에 탈락했다.

그들을 포섭하느라 꽤 돈을 썼던 걸까.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예전의 그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태동을 거두며, 월야를 들었다.
밤이 지닌 서늘함이 주위를 감싸며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들이 하늘을 장식했다.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그녀를 겨눈 창을 보며 헤라 카르멘이 입을 열었다.

“...좋아, 아이샤. 네가 전보다  나아졌다는 걸 인정할게. 장난을 치려했던 것도, 사과할게. 그러니까.”

드드드-

땅에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서있기 조차 힘들만큼의 진동, 월야를 땅에 꽂은 채 버티고 있을 때.
헤라 카르멘의 아래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직접, 죽여줄게.”

녹음을 상징하는 녹 빛의 눈동자는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솟구쳐 오른 물이 이내 형태를 갖추며, 그녀를 하늘 위로 들어올렸다.

용(龍). 물로 이루어진 그 것이, 내게 시선을 보내었다.
몸이 저릿할 만큼의 위압감. 헤라 카르멘의 전력(全力)은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 것이었다.

월야도, 그렇다 한들 태동이어도. 저 것을 벨 수 있을까.
생각을 지웠다. 그런 의문을 품기보다는, 지금은 그저 본능에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발판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한없이 높은 위치에 있는 그녀를 베려면 일단 닿아야 했기에, 허나 그녀는 너무도 높이 있었다.
태동을 있는 힘껏 휘둘러 얼음의 창을 쏘아보낸다 한들 닿지 않을 높이에 그녀는 서있었다.

오만하고, 또한 고고한 시선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마치 비웃듯 보는 그 시선에 마음은 더욱 차분해졌다.

3번 검을, 뽑는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레이 마이어의 훈련을 병행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이능을 강화하면서도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에 의문이 일었다.
만약 뽑더라도, 몸이 버틸 수 있을까?

허나 닿지 않는 이 거리에서, 용과 헤라 카르멘을 베려면  방법뿐이었다.

이능을 쥐어짜낸다. 머리에 고통이 일고, 칼로 째는 듯한 격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하늘을 올라갈  만든 발판을 서서히 지우며, 그 것마저도 검을 뽑아내는 데에 사용한다.

길고, 마치 뱀처럼 하늘거리는 검신이 드러난다.
월야 정도의 적당한 길이의 검을 본 헤라 카르멘의 얼굴에 조소가 다시금 피어났다.
용의 아가리에서 빛이 일렁였다. 이윽고 그 곳에서 물이 작렬하며 내게 쏟아졌다.
노도처럼, 내 몸을 부수고 찢을 것만 같은 그 물을 가만히 지켜보며, 자세를 잡는다.

이제는 겨우 발을 지탱할 만큼만 남은 발판을 밟은 채, 검 끝이 헤라 카르멘을 향했다.
그리고 휘두른다. 푸른 선을 그리며, 내게 쏟아지는 물을 가르며 얼음의 파편이 비산했다.

피익-

검은 분명 내게 있었다.
허나, 헤라 카르멘의 가슴팍에 실선이 그어진다. 붉은 핏방울이 맺히고,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3번 검, 수라(修羅).

사복검의 형태를 지녔기에, 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닿을 수 있었다.
노도처럼 작렬하던 물을 가르고, 위압감을 내뿜던 용을 베고, 헤라 카르멘을 상처 입혔다.

“...흐으.”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능을 쥐어짜내 만들어냈기에,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흔들리는 몸을 겨우 붙든 채, 고개를 들어 헤라 카르멘을 바라보았다.

물이 쏟아지며 용의 형상이 무너져 내린다.
그와 함께, 헤라 카르멘 또한 몸의 일부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탈락...시켰구나...”

긴장이 풀렸다.
밟고 있던 얼음이 사라지며, 내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꽤나 높은 높이까지 올라갔기에 한참을, 세찬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한참을 떨어진다.

제논은 오딘을 이겼을까? 내가 탈락하면 대타로 들어갈 사람도 없을 텐데.
이능을 사용해 발판을 만들어 보려했지만, 3번 검을 꺼낸 반동 탓인지 몸을 까딱이기도 힘들었다.

퍼어엉-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싸우고 있구나.

...이겼으면 좋겠네.

눈이 천천히 감겼다.
 이상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볼 힘 조차 없기에. 그저 다가올 추락의 충격을 머릿 속으로 애써 그리지 않고자 준비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땅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터업-

 몸을 누군가 붙잡는 듯  감촉이 느껴졌다.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다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며.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붙잡았다.

누군지 보려고 했지만, 이미 희미해진 정신을 다시 일깨울 수는 없었다.
몽롱해진 정신,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 기억나는 것은.

싱그러운, 라벤더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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