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단 둘이는 싫어(1) (35/115)



〈 35화 〉단 둘이는 싫어(1)

차갑다.

그런 감각을 느꼈을  나는  폐허 속에 서있었다.
성한 건물 하나 없이, 모조리 무너져 생명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폐허.

여기가 어디지?

그런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내는 것을 포기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라, 오랜만에 보는  모습을 둘러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돌의 파편,한 때 밤을 빛냈던 네온사인 간판의 조각, 저 멀리 돌무더기에 살짝 튀어나온 사람의 손.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났던 것처럼, 주변은 처참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여기가 내가 알던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눈높이가 낮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샤의 눈높이에 익숙해졌음에도 낮아진  체감될 만큼이나 낮아진 시야.

어린 아이?

깨진 거울 조각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잔뜩 헝클어진 백금발, 검댕이 묻어 더러워진 얼굴에 붉은 눈이 반짝였다.
찢어져 속살이 드러나는 누더기만 겨우 걸친 소녀.

어린 아이샤가,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꿈, 작금의 상황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려 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헤라 카르멘을 탈락 시킨 뒤 공중에 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 뒤로 기절했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는 이 장면은 꿈일 것이었다.

고통마저 생생한, 자기 스스로 꿈속에 있다는 걸 깨달을 만큼이나 생생한 꿈.

...과연 꿈일까.

걸을 때마다 돌이 발바닥을 긁어 따끔거렸다.
거대한 파편에 걸터앉아 발을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수많은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는 발이었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걷고 있던 걸까.
그런 의문에 답하는 건 주변의 폐허였다.
끝이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듯, 어느 쪽에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것은 황폐함 뿐 이었다.

땅은 생기를 잃어 가루처럼 부서졌고, 주변의 물은 피가 고여 썩어버린 갈색의 액체 뿐이었다.
피가 묻은 건물의 파편, 무언가에 의해 순식간에 부서진  골격조차 남기지 않은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도시의 불빛에 가려 숨겨져 있던 찬란한 별빛이 보였다.

아-

눈이 순간 크게 뜨이며, 나는 무언가 홀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을 쥐듯, 차가운 별빛에 손을 뻗었을 때.

쩌저적-

손을 중심으로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익숙한 이능, 허나 제어되지 않는 그 이능에 당황하기도 잠시-
얼음은 건물의 파편을, 죽어버린 땅을 얼리고 있었다. 겨우 남은 골격을 따라 솟구치는 얼음이 보였다.
어린 몸을 따라 이능의 총량 또한 떨어진 건지 잠깐 사용했음에도 몸에 힘이 없어져 그대로 철푸덕,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거대한 돌무더기에 누운 채, 이능이 스스로 만들어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나무, 수십개의 가로수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푸른색의 나무. 그리고 그 위로 작게 만들어진 둥근 구.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떠오른 것이 있다면, 이건 아이샤의 기억이 아닐까.
아이샤의 몸으로 빙의하며 완전히 소실되어 버린  전의 기억.

만약 이것이 그 편린이라면...

아이샤가 이능으로 만들어낸 것은, 이 건물들이 무너지기 전에 이루었던 세상의 풍경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기에 섣불리 이것이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다.

쿠웅-

얼음이 바스라진다.
이능을 너무나도 사용한 탓일까, 비록 그것이 자의가 아니었음에도.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꿈에서도 다시 잠드는 건가.
눈을 꿈뻑이며, 얼음이 바스라져 허공에 반짝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처럼, 은하수를 채우는 그 별무리처럼 반짝이는 얼음의 티끌들.
뺨에 닿은 얼음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다.

만약 이게 아이샤의 기억이라면, 이걸 지금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지금에서야 기억이 떠오른 이유가 뭘까.

“...아이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픔에 잠겨, 살짝 떨리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나와 똑같은 백금발을 지닌 여자가 서있었다.

마치 내가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이나 나를 닮은 얼굴.

“내 딸.”

딸? 그 목소리에 무어라 반응하려 했지만, 내 몸은 망부석마냥  자리에 딱 굳어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커튼이 닫히듯, 시야가 암전되고- 그렇게 나는 꿈에서조차 눈을 감았다.

#

삐-삐-

익숙한 신호음, 그것이 병원에서 들리는 심박 측정기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병원, 아마기절하고 여기까지 온 걸까. 도대체 얼마나 다쳤길래.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확인 했을 때, 의외로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약간 피곤했을 뿐, 그것도 결국 이능을 한계까지 사용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아-

숨을 내쉬자 차가운 숨결이 터져 나왔다. 이능의 부작용으로 체온이 낮아진 건지,
아직 여름일 터인데 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린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천장.
회색의 타일이 깔려있는 그 것의 패턴을 보며, 이내 여기가 병원이 아닌 학교의 양호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몸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느낀다.
살짝 고개를 들자, 침대에 퍼져있는 흰 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제논?”

완전히 잠든 듯, 침대에 엎드려 내  위에 팔이 올라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엎어져 자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 이능으로 기절한 거니, 제전이 끝나고 하루 이상 지났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데.

...설마 여태 여기 있었던 건가.

제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었다.
창문을 바라보자 저 멀리 달이 휘영청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전은 낮에 끝났을텐데, 벌써 밤인 건가. 주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호 선생님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집에갔을테니까.

그런데도 여기 제논이 있는 걸 보면. 아마 내가 깨어날 때까지기다리려 했던 것 같았다.

“흠...”

그러고 보니 제전이 시작하기 전에 다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기절까지 해버렸으니 일어나면 아마 한 소리 들을 같았다.

“에휴.”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헤라 카르멘을 이제는 온전히 내 힘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3번 검을 꺼낼 수 있다는 것.
솔직히 3번 검을 목표로 훈련에 임하긴 했지만, 꺼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단 일격, 그 정도로 힘을 다 써버리는 수준이긴 해도...내가 꽤나 성장했음은 변하지 않으리라.

문득 내가 땅으로 떨어지던 그 때가 떠올랐다.
힘없이, 분명 땅에 부딪혀 너덜너덜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떨어지기 직전에 누군가 나를 붙잡았었지.

눈을 감아 비록 누구인지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지 금방  수 있었다.
아직까지 라벤더향이 코에 남아 살랑였기에, 나는 살짝 미소지은 얼굴로 제논을 바라보았다.

붕대에 감싸진 녀석의 손, 이렇게 다쳤는데도  구해준 건가.
붕대 위로 피가 살짝 묻어있었다.  기억으로는 없던 상처였는데, 아마 오딘과 싸우면서 다친 거겠지.

툭-

잠들어 있는 하얀 머리 위로 내 손이 올라갔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짝 젖어있는 제논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부모님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고마워, 제논.”

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전해주고 싶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달빛이비치며, 녀석의 머리카락은 은빛을 띄었다.
한 가닥, 한 가닥.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넣어 부드럽게 흝는다.
오딘에게 이겼을까? 나를 구하러 왔다는 건, 오딘에게 벗어났다는 소리였으니까.

스륵,

머리를 매만지던 손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단단한 팔의 감촉을 느끼며, 팔뚝을, 팔꿈치를 따라 손은 결국 제논의 손에 닿았다.

“까칠까칠해.”

첫 감상은 그런 느낌이었다.
손을 살짝 들어 손바닥을 만지며,  속에 잔뜩 박혀있는 굳은살을 톡톡, 건드렸다.
이렇게 굳은살이 박히려면 얼마나 칼을 휘둘렀어야 했을까.
제논의 과거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음에도,그것을 직접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이란 전혀 새로웠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이런 사람을 만들어내고 방치한 에드윈카르멘에게 분노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녀석을 동정했다.

그렇기에 밀어낼 수 없었다 이대로, 내가 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 끝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제논이라는 사람을 심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예정된 아픈 미래를 바꿔주고 싶었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
더 이상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며 다짐하던  때의 기억을 되새긴다.

그저 소설을 보고 있던, 독자의 시점이 아니었다.
녀석의 곁에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녀석의 친구가 되었고, 같은 조가 되어 제전에서 싸웠다.

이제는, 완전히 녀석과의 인연에 포함된 사람이 되었다.

“...흐으.”

한숨이 터져 나오고, 다시금 시선이 녀석의 손으로 향했다.
적당히 감겨진 붕대를조이며 조심스레 그 손을 쓰다듬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힘내줬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지금처럼만 모든 일이잘 풀리기를 기원하며. 나는 조심스레  손을 제논의 손 아래에 포개었다. 마치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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