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단 둘이는 싫어(2)
-아이샤.
-내 딸.
기절했을 때, 꿈속에서 보았던 그 풍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이샤라는 인물의 과거는 원작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주제였다.
단순히 메인 히로인이고, 부모 없이 혼자 자라왔기에 당찬 성격을 지녔다, 라는 정도만 언급 되었을 뿐.
한 번도 아이샤의 부모에 대해 다뤄진 적은 없었다.
내가 보았던 것이 과연 정말로 아이샤가 지녔던 기억의 일부 일까, 아니면 그저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지금 당장 알아보기엔 추적할만한 단서도, 애초에 그 과거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거라곤 폐허라는 장소와, 나를 딸이라 불렀던 그 사람의 얼굴.
나랑 굉장히 비슷한 얼굴이었으니 아마 관련있는 사람은 분명할 텐데. 도대체 어디서 알아봐야 하는 걸까.
“...모르겠네.”
아무것도,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생각을 비우는 게 낫겠지.
이런 경험을 다시 한다면 모를까, 계속 그 꿈인지 기억인지도 모를 것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얜 언제 일어나려고.”
슬슬 몸이 불편했다.
혹시 깰까 봐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잠깐 자다 깰 줄 알았더니 계속 자고 있었다.
제전이 끝난 다음날은 학교 쉬는 날이니 슬슬 학교에서 나오긴 해야 하는데.
쿡쿡,
제논의 머리가 살짝 흔들릴 만큼 찌르자, 순간 녀석의 팔이 움찔 거렸다.
“이제 일어나.”
“......으응.”
잠꼬대라도 하는 건가, 머리를 찌른 부분을 긁던 녀석은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아니, 이제 슬슬 일어나서 집 가야하는데.
...어쩔 수 없지.
빠악-!
얼음을 살짝 만들어내 잠든 녀석의 머리를 내려치자, 그제야 제논이 눈을 뜨며 자리에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대로 양호실에서 쭉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 아이샤?”
“언제까지 자려고 그러는 거야? 다리 아프단 말야.”
“다리? 아...”
황망한 얼굴로 나와 내 손에 있는 얼음을 바라보던 제논은 이내 자기가 어떻게 자고 있었는지에 대해 떠올렸는지 금세 얼굴을 붉혔다.
“그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자, 잠깐 잠들은 거야.”
“그래, 그거 가지고 뭐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깨우려고 한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제논은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좀 괜찮아?”
“어, 그냥 잠깐 기절했던 거니까.”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잖아...진짜 있는 힘껏 싸운 거라고.”
그렇게 안했으면 아마 탈락한 건 내 쪽이었을 테니.
아니, 생각해보면 나도 탈락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말하자 제논이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걱정했어.”
“...알아.”
계속 양호실에 있었던 걸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도, 오딘과 싸우던 와중에도 나를 구해줬던 것만 보더라도.
과분할 만큼이나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건, 항상 고마워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만약에 제논이 그 때 구해주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 이렇게 멀쩡히 얘기하고 있긴 힘들겠지.
제논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퍽 애처로워 보여서, 나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으면 됐어.”
제논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한차례 쓸어 넘겼다.
후우, 한숨을 푸욱 내쉬던 제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옷을 건네 주었다.
“가디건?”
갑자기 이걸 왜 주는 거지, 그런 생각에 빤히 쳐다보자 제논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이능 써서 춥잖아. 밤엔 아직 추우니까, 입고 있으라고.”
또 금세 붉게 물드는 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으며 가디건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아직 춥긴 했으니까, 이런 걸 줄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셔츠 위에 가디건을 걸치자 나보다 몇 사이즈는 더 큰 건지 팔 아래로 가디건이 출렁였다.
“좀 크네."
"...그러게."
가디건을 바라보던 제논은 어째선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디가 이상한가? 고개를 돌려 몸 구석구석을 살펴도 딱히 이상한 점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논은 시선을 돌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가디건을 걸치자 한결 추위가 가셨다.
이제 남은 건 집까지 가는 것, 양호실 밖으로 먼저 나가려고 하자 제논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먼저 가게?”
“아니, 너 같이 안 갈 거야?”
“기다려. 금방 갈게.”
아무리 그래도 혼자 두고 갈 리가 없는데, 제논은 뭐가 그리 급한지 가지고 있던 짐을 그대로 가방에 우겨넣은 뒤 양호실 문을 닫으며 나왔다.
처음과는 달리 빵빵해진 가방을 빤히 쳐다보자, 제논은 가방을 뒤로 슥 넘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집까지 바래다 줄게.”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저으며 내 가방을 들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의지가 단단히 박힌 녀석의 눈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밤이잖아. 위험해서 안돼.”
“...나 그렇게 약하진 않은데?”
정말 빌런들이 작정하고 나를 다치게 하려 하거나, 헤라 카르멘보다 더욱 강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이제 헤라 카르멘도 이겼는데, 어지간한 빌런 들은 솔직히 말해 이런 몸 상태로도 제압할 수 있었고.
제논은 뭐가 그리 걱정인지 내 말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가방 두 개를 든 채 날 따라 걸었다.
어색한 침묵, 프레이가 있을 때면 몰라도 제논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아직 힘들었다.
분명 내 입으로 친구, 라 말했지만 묘하게 벽이 있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아무도 없는 거리, 깜빡이는 가로등만이 남은 골목을 걷는 우리에게 있는 건 어색한 침묵 뿐이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긴 해야 하는데. 저번에 지각했을 때는 제논 쪽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물어왔지만,
이번엔 녀석도 조용한 터라 벌써 10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나는 시선을 돌려 제논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옆을 살피지도 않고 앞만 보며 걷는 녀석.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모습에 떠오른 생각은, 혹시 화났나? 하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다친 걸 트집 잡아 계속 혼자 무언가를 떠들어댔을 텐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앞을 멍하니 바라보는 걸 보면,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시 시선을 돌리고, 나는 앞을 바라본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났어?”
“어?”
“화났냐고.”
“...조금.”
의외로 솔직히 답하는 모습에 눈을 살짝 크게 뜨자, 제논은 뺨을 긁적이며 아하하,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냥, 아까 제전 생각 좀 하느라.”
“제전은 왜.”
“내가 한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사실 코어까지 갈 때도 네가 전부 싸웠고. 내가 한 건 고작 형이랑 싸운 거니까.”
어휴, 순간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며 나는 녀석을 흘겨보았다.
제논은 이게 문제 였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책한다.
그것을 바라지 않기에 전개를 꽤나 틀었는데도, 제논은 늘 자기 자신이 한 행동을 부정하며 깔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어라 하려던 찰나, 이어지는 제논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
“어?”
“솔직히 말해서 화나는 건 사실이야.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했다면, 헤라랑 형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그렇게 무리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선 제논은 시선을 내린 채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자책이라도 하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헤라 카르멘하고 네가 싸웠을 때,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으니까.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더 빨리 갔으면 좀 더 상황이 나았겠지.”
푸른 눈이 슬픔에 일렁였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기라도 하듯, 제논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좀 더 강했으면, 네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레이 마이어를 찾아가서 훈련을 받은 이유도 그런 거야.”
처음으로, 제논은 직접 자기 얘기를 내게 꺼냈다.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멍하니 녀석을 쳐다보았을 때, 제논은 피식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항상 나 때문에 누군가가 다치고 죽었어.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나와 친했던 친구가, 그리고 어머니가. 그때는 내가 약했고, 여렸고, 미숙했지.”
네 탓이 아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제논의 표정이 그렇게 어둡지 않아서, 오히려 후련해보여서, 나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누군가를 구했어. 어쩌면 나 때문에 다친 거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을...내 힘으로 구했어.”
그 시선은 이내 내게 닿았다. 푸른 눈이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그래서 이젠 화나지 않아. 오히려 뿌듯해.”
“......”
“내가 해온 게, 아주 틀린 일은 아니었구나- 하고.”
찬란히 빛나는 달 아래,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녀석은 환히 웃었다.
어쩌면 달보다도, 저 별보다 밝은 그 미소에, 나는 한참동안 녀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째서 나를 이렇게 신경 쓰는지.
단지 나라는 사람을 구했을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