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단 둘이는 싫어(4)
이것을 무어라 받아들여야 할까.
그저 내 앞에 놓인 티켓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머릿속의 색을 다시 칠하고, 멈춰버린 사고회로를 다시 돌리고, 빠져버린 나사를 끼우기를 한참.
비로소 생각이란 것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건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래, 아마도 집에 들어와서야-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여전히 손에 들린, 젖지 않는 종이로 만들어진 그 주황색의 티켓을 바라보며.내 시선은 한 글귀에 향했다.
‘2인용’
도대체 이걸 무어라 받아들여야 할까? 그 질문을 두 번째로 떠올리며,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쿵-
애꿎은 벽이 울리고, 잔뜩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머리를 조금이나마 식히려 했다.
이걸 도대체 왜 나한테?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시금 사고회로가 닫히고, 무수한 망상 속으로 빠지려는 그 찰나에.
띠링-
스마트 워치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오딘]
형의 문자, 어째서 지금 연락을 했을까-라는 의문도 잠시.
곧이어 보이는 문자의 내용에 나는 곧바로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이샤랑 데이트 간다며? 벌써 소문 쫙 퍼졌어.
“...미친-!”
쾅!
문이 거세게 열리고,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대문 만큼이나 거대한 몸집, 우락부락한 몸과 비슷한 험상궂은 얼굴은 짙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 제논. 데이트 준비는 잘 돼가?”
“아니- 형, 소문이 퍼졌다니 무슨 말이야.”
최대한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데이트-아니, 애초에 그걸 데이트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소문이 퍼졌다는 얘기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평소에도 자주 엮인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데이트라니. 주변에서 나와 아이샤를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화악-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자, 그 모습을 보며 오딘이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아주 좋아 죽어, 그냥 죽어버려.”
“...웃으면서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건데?”
“그냥 평범해, 드디어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 아주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아이샤가 티켓을 건넸다며? 영화관이야, 아니면 뭐. 식당?”
“...자일 레스토랑.”
자일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순간, 오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자일?
그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오딘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이 씨발...부러운 새끼. 여자친구가 자일 레스토랑에 같이 가자고 할 줄이야. 왜 하필 너지? 이참에 내가 한 번...”
“그건 안 돼, 그리고...아직 여자친구 아니야.”
“하하, 사귀지도 않으면서 지랄하기는. 괜찮아, 저번에 네가 등짝을 화려하게 날려준 덕에 당장 누군가와 사귀기엔 좀 무리니까.”
“그건...미안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자, 오딘은 내 등을 팡팡 두들기며 괜찮다고 웃어댔다.
그래도 아직 아프긴 할 텐데. 제전에서 오딘과 싸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저미안함 밖에 남지 않았다.
“...적당히 하자고 했더니,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 덮칠 줄이야.”
“그건 아이샤가 떨어지고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
“아무튼 다행이야, 헤라도 한 풀 꺾여서 당분간은 조용할테니까.”
당분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딘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헤라가이대로 가만히 있을까?”
그 물음에, 달아올라 있던 홍조가 사라졌다.
하기야, 그 사람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한 번 겪은 패배에 이를 갈며 다음 수를 준비 할 것이다. 자신을 패배케 한 사람에 대한 울분을, 증오를 갈면서.
“...그럴 리가.”
물론 계속해서 생각해오던 것 중 하나였다.
헤라 카르멘이 가만히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으니,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 없이도, 아이샤는 이미 한 번 헤라 카르멘을 꺾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보다도 더욱, 자신이 노력하는 것보다도 더욱 뛰어나고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달이라면 그녀는 태양. 재능을 빛으로 비유한다면,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그 만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오딘의 이런 염려가 의아했다.
이미 자신과 아이샤는 헤라 카르멘을 상대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의 걱정이 진심으로 보였기에, 내 표정도 함께 딱딱히 굳어갔다.
“최근에, 헤라가 마약상과 접근했다.”
“뭐라고?”
“꽤 큰 조직이야,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하지. 양지에서는 합법적인 이름으로, 음지에서는 마약상으로.”
“...마루더즈.”
“그래, 바로 거기야.”
결코,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사안이었다.
헤라 카르멘이 무슨 약을 찾는지는 몰라도, 그녀와 약이란 이름이 함께 있는 한 자신과 아이샤에게 좋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할 테니.
“...조심해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한도가 있어.”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으니, 오딘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괜찮아, 이렇게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어.”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처음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씨익, 아까 지었던 그 장난스러운 표정이 돌아오자 나는 무언가 섬뜩함을 느꼈다.
자리를 뜨자,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팔뚝을 붙잡은 뒤였다.
“어디 가, 네 데이트 얘기 해야지.”
“아-니, 그러니까 아직 데이트인지도 모른다고!”
“정말?”
“진짜.”
대충 티켓을 받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오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허공에 엄지를 척, 하고 들어올렸다.
“데이트잖아.”
“...어떤 부분이?”
“자고 있는 너를 굳이 깨워서, 2인용 레스토랑 식사권을 건넸어. 같이 가자는 소리겠지. 그렇지?”
“...그렇지.”
“아이샤 친구가 너 하나야? 그건 아닐 걸.”
확실히, 아이샤의 친구라면 오히려 나보다도 더 가까운 프레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굳이 콕 찝어 데려가려 한다.
문득 내 손이 귓가에 있단 것을 깨달았다. 뜨거워진 귀를 주무르며,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진짜 데이트인가?”
“평소 아이샤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남자랑 여자 단둘이 식사하러 가는 건 충분히 데이트라고 할 만하지.”
“...나 먼저 가볼게.”
“어디 가는데?”
갑자기 어디 가냐며,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오딘에게 나는 짧게, 그리고 단호히 대답했다.
“준비.”
#
촤악-
옷장 문을 열었을 때, 내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옷이 없어, 어째서? 눈앞에 있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많은 종류의 옷들이었지만, 눈에 차는 옷이 없었다.
무언가 조금 더 특별하고, 산뜻하고, 이 여름이란 계절과 어울리는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촤라락-
수많은 옷들이 헤엄치고, 손으로 끄집어져 밖으로 던져졌다.
이것도,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셔츠 하나를 꺼내 몸에 대보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아이샤는 어떻게 입었을까?
그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학교의 교복마저도 잘 소화해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샤의 사복차림을 본적이 있던가.
어쩌면 원피스도, 그게 아니라면 캐쥬얼하게 입은 것도 잘 어울릴 터였다.
오프숄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지나칠 만큼이나 붉어진 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망상에 자기도 모르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조절하려는 찰나,
레스토랑에 가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손목에 달린 과학기술의 집합체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잠긴다.
연락을 해볼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할 수 없을 테니.
그녀의 연락처를 받은 뒤로, 한 번도 문자가 오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전화도.
쿵,
애꿎은바닥을 한 번 내려치며, 조심스레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아이샤 이리안]
...역시 성만 있는 건 조금 딱딱한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뒷부분에 있는 성을 지웠다.
[아이샤]
그렇게 이름만 남은 연락처를 흡족한 듯 바라보곤, 흡족한 얼굴과는 달리 긴장으로 달달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떨지 말자, 그냥 물어보는 거야. 언제 가는지.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마치고, 손가락은 마침내 수신버튼에 닿았다.
틱,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이 영원과 같다는 말이 지금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신호음이 울린지 이제 고작 10여초가 지났을 뿐인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조하다 못해 손톱을 질겅질겅 물어뜯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다시 환히 빛난 것은, 신호음이 끊기고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제논?
“아...음, 어.”
-뭐라는 거야.
예의 그 퉁명스런 목소리에, 어느새 내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아니-내가 왜 전화했는지부터 떠올려야 했다.
그렇게 멍하니 있기를 잠시, 신경질 섞인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말 안하면 끊는다.
“아니, 그 레스토랑 언제 가는 거야?”
-아...그거? 내일 학교 끝나고 가자. 내일 다음엔 주말이니까.
“그래, 알았어. 그리고...”
툭-
무어라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여지조차 주지 않고 끊긴 전화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모든 것을, 그것이 아이샤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할 자신이 있었다.
그 행동이 무엇이던-내일 레스토랑에 ‘단 둘이’ 가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다시금 옷장을 헤집으며, 내일 입을 옷을 재빨리 정하는 데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