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후회는 싫어(1) (40/115)



〈 40화 〉후회는 싫어(1)

“...근데, 교복 입은 거야?”

이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건지, 한참을 벤치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던 제논이 나를 향해 물었다.
당연히 교복입고 올  알았는데, 제논이 이렇게 챙겨 입을지 몰랐던 나로써는 조금 미안할 따름이었다.

입고 있던 블라우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프레이...가 시우 자일의 딸이라고?”
“자기 입으로 직접 아버지라고 했으니까.”
“사이가 안 좋다고 느낀 건 어떤 점에서 그랬던 건데.”
“그건 프레이가 직접 언급한 부분이 아니야, 다만 레스토랑이랑 자기 아버지를 얘기할 때면 묘하게, 얼굴이 일그러져서.”

요컨대 여자의 감-이라는 얘기였다. 이전 같았으면 그냥 농담이라 생각했겠지만,
아이샤의 몸에 빙의한 뒤 그것을 몇  직접 체감한 뒤로는 그저 가벼이 넘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나  감이라는 것은 위험하고 불길한 것에는 거의 대부분 맞아 떨어졌으니.

벤치에 앉아있던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음울하고 그늘진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있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일단 가봐야 알  같아, 여기서 이렇게 말만해서는 아무것도 못 알아낼 걸. 평판도 좋은 사람이라 검색해봐야 나올 것도 없고. ”
“그건 맞아. 그리고  마루더즈라는 것도-”
“그건.”

제논의 말이 멈추고, 녀석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악몽을   마냥 괴롭게 떨리던 눈동자가 서서히 멎고, 이내 온전한 상태로 돌아온 제논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식을 먹어 보면, 알아.”
“...그래.”

잠시 흔들렸던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한참을 걷자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적했던 공원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
과연 자일 레스토랑 같은 유명 식당이 위치한 곳인 듯 온갖 고급져 보이는 식당과 건물들이 즐비했다.

“와.”
“이런 곳 처음이야?”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제논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사람이 많은 곳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 생이나, 전생이나. 홍대, 명동 같은 곳은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단순히 걷기만 해도 내겐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바닥을 보며, 온갖 화려한 이능이 거리에서 공연하듯 쏟아지는 것을 보며 입을 벌리기도 잠시.

지금까지 봐왔던 것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거리의 중앙에서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한 식당을  순간 나는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거대한 성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벽에 들어서자 그 안에는 해자와작게 만들어진 강이 있었고, 해자를 넘어서면 타지마할을 본따 만든 듯 순백의 성곽이 드러났다.


이런 것을 식당으로 칭해도 될까,  건물이 식당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성 위에 거대한 글씨로 적힌 ‘자일 레스토랑’이라는 글씨 덕이었다.

“그냥 요새잖아...”
“처음 보면 원래 다들 놀라지. 나도 사실 여기 와서 밥을 먹어보는 건 처음이야.”
“오는 건 처음이 아니고?”

그렇게 묻자, 제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먹는 걸 지켜본 적이 있긴 했지.”
“...미안.”
“됐어, 어쨌든 이제야 자일레스토랑의 음식을 먹어 보는 건가.”

괜찮다며,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친 제논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삐걱- 밟을 때마다 나무 특유의 소리를 내는 해자를 건너 마침내 성의 정문에 도달하자,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입장하시기 전에, 예약하신 손님입니까?”

절도 있는 모습, 마치 중세의 기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날이 서있지 않은 뭉특한 창을 들고 각도기로  듯이  서있는 그 모습에 감탄하기도 잠시,
제논이 내민 주황색 티켓을 확인한 기사가 창을 바닥에 쿵쿵, 내려찍으며 입을 열었다.

“자일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쿠우웅-

그 말과 동시에, 언뜻봐도 3m의 키를 지닌 오딘보다도 커 보이는 성의 정문이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끌며 문이 거의 열리자,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얼핏 보이는  같았다.

“누구지?”
“시우 자일.”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저 사람이 누군지 안다는 듯 뱉은 말에 시선을 돌리자, 제논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이 레스토랑의 규칙이야, 일반 손님이 아닌 티켓을 지닌 손님이면 직접 와서 환영해주는 거지.”
“티켓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가?”
“정확히 말하면, 이 주황색 티켓이.”

무언가를 아는 듯, 주황색 티켓을 힐끔 살펴본 제논이 완전히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제논의 등을 따라 걷자, 먼저 다가오던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푸근한 인상, 이상하리만치 큰 코가 특징인 그 남자는 우리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갑다, 프레이의 친구들이니?”
“그걸 어떻게 아셨죠?”

내가 되묻자,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티켓은 내가 준 거니까. 주황색 티켓은 레스토랑의 vip들에게만  수 있는 티켓이거든!”
“vip...”
“프레이가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너희들한테 갔구나. 아무튼 들어오렴, 오늘은 조금 한적해서 너희들에게 많은  대접해도 좋을 것 같아!”
하하!

그렇게 웃어 보인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 대한 것을 물어왔다.
아카데미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이능이 어떤 건지, 거기 밥은 맛있는지.
그렇게 계속 질문을 답하면서도 느낀 위화감은, 그가 프레이에 대한 질문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찾아왔다.

자신의 딸이면서도, 하나도 궁금해 하지 않는 건가.

내 의문을 같이 느낀 건지, 제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프레이에 대한 것은 안 물어보시나요?”
“프레이?”

그 이름이 나오자, 계속해서 쾌활하게 웃던 그의 표정에 약간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어느새 수평을 이룬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프레이, 그래. 프레이가 있었지.”

읊조리듯, 그 이름을 몇 차례 중얼거린 시우 자일은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일그러진 그의 눈매에서는, 어렴풋이 슬픈 감정이 맺혀있었다.

“그건 조금 나중에 얘기해도 되겠니? 조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말이다.”

어떻게 할까, 제논을 힐끔 쳐다보자 녀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지금 당장 들으려고  건 아니니까.

“네, 그럼 조금 이따가 찾아 뵈도 될까요?”
“그러렴, 다 먹고  윗 층으로 오면 된단다.”

여전히 슬픈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그는 조용히 우리를 한 쪽으로 안내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마저도.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논에게 툴툴 거리는 것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러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확실한 건, 연기하는 것 같진 않아.”
“그나저나 윗 층으로 오라고 할 줄이야. 위험하진 않겠지?”

물론  층으로 오라고  말은 자신과 프레이에 대한 얘기를 한 거겠지만, 자일 레스토랑이 마루더즈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쉽사리 안심할 수 없었다.

“위험하진 않을 걸.”
“...그런가.”
“우린 초대받은 입장이고, 티켓까지 들고 왔는데 갑자기 위협할 리가 없지. 자일 레스토랑이란 이름값이 건재한 이상 대놓고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진 않을 거야.”
“하기야, 애초에 우리가 그냥  먹으려고 온 줄 알 테니까.”

마루더즈와 자일 레스토랑간의 관계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레이 마이어 뿐이었다.
설마 시우 자일이 그걸 먼저 알아채고 도청 같은 걸 했을 리가 없으니, 그의 이능은 보관 이었지 미래예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나는 지금 레스토랑에 와있었다.
그것도 단순하고 평범한 곳이 아닌, 세계최고라 일컬어지는 그 ‘자일 레스토랑’에.
음식 맛을 음미하는 데에 불길한 생각은 필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제논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여기 와서 음식을 먹어보는  처음이라고 했었던가, 아무래도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 같았다.
남들이 먹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건, 결코 유쾌한 기억이라 할 순 없을테니까.

그리고 드디어 음식을 먹게 되었어도, 여기 온 목적이 순수하게 식사가 아니라는 점은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한 번 가자고 할까.

미안한 것도 있고, 기대한 것을 내가 깨트린 것만 같아 그런 방식으로라도 사과하는  나을 것 같았다.
툭툭, 책상을 두드리자 허공을 쳐다보던 제논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논, 이번 일은 미안해.”
“...왜 미안한지는 알고?”
“네가 레스토랑에 가는 걸 그렇게 기대할 줄은 몰랐어.”

하아-

제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라, 이게 아니었나? 조심스레 제논을 쳐다보자, 제논은 아까보다 더욱 우울한 얼굴로 하얀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다음에 같이 식당에라도 가자고. 여기 다시 올 돈은 없어서...”

내가 무슨 말 실수를 했나 고민하면서 말을 이어가자, 제논의 귀가 순간 쫑긋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음에?”
“어, 다음에는 정말 밥 먹으러 가는 거야.”
“......”

침울해졌던 제논의 표정이 서서히 펴지며, 이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단둘이?”
“그래, 프레이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너한테 사과하는 거니까.”
“맘에 들어.”

그렇게 말하는 제논의 표정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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