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친구 이상은...싫어(2) (50/115)



〈 50화 〉친구 이상은...싫어(2)

아그작-

씹는 동시에 혀를 타고 전해져 오는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맛, 다크 초콜렛을 씹으며 누워서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는 제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곤하다더니, 진짜 눕자마자 바로 잠드네.

이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
아까 한 번 더 치유 받아 이제는 화상 자국도 거의 사라진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불을 잡아 당겨 손을 덮어주었다.
앞으로 두어 번 더 받으면 퇴원이라고 했었나.
내가 빙의하기 전 세계 같았으면 화상 흉터가 평생 갔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수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이제 당분간은 조용하려나.

머릿속으로 천천히 원작의 내용을 되짚어 봤지만, 당장 2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일어날 사건들은 거진 일어난  같았다.
자일 레스토랑 폭발까지 일어난 지금이면, 사실 헤라 카르멘을 제외하면  위협이 될 것도 없었고.
특히나 마루더즈라면 간부 둘을 잃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무언가를  여지는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뭐...앞으로는 학교 행사 말고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겠지.

2학기가 되면 1학기 때와는 달리 행사 자체도 엄청 많아지고, 본격적으로 히어로들이 만드는 길드와 접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원작에서도 1부가 입학부터 2학기 시작까지, 그리고 2부가 2학기의 초반부만 다루는 것을 생각해보면 터지는 사건부터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유를 그나마 챙길 수 있는 시점은 지금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이렇게 있는 여유도,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이번에 마루더즈와 전투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것이 무엇이던가. 바로 이능의 활용이었다.
이능 자체의 출력은 이미 프로 히어로급이라 하더라도, 정작 그 출력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거라 말하기엔 아직 한참 모자랐다.

그나마 월야를 뽑았을 때면 모를까, 2번 검 태동이나 특히 3번 검 수라를 뽑으면 정신력자체가 고갈되기 일쑤였으니.
이번에 니플헤임을 현현 했을 때도 출력자체는 괜찮았지만, 결국 미세한 힘조정이 힘들어 3분 내에 둘을 제압하지 못했다.

“아직 행사 하나가 남긴 했는데...”

동아리 제전이후에 비중 있게 다뤄지는 행사라면, 근방에 있는 모든 학교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하나 있긴 했다.
그렇다고 제전처럼 치고 박을 일은 없긴 하지만...그래도 나름 학교의 명예가 달렸다고 열심히들 준비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동아리 제전때처럼 서포트 아이템을 주는 것도 아니고,
우승이라는 개념없이 상호 보완을 위해 만들어진 행사였기에 그 행사를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 순수하게, 이능을 완전히 다뤄내기 위한 훈련에만 집중해도 된다는 거겠지.

한동안 레이 마이어와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정말, 레이 마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당장 제전에서 3번 검을 뽑아내는 것부터 무리였을  같은데.
아마 마루더즈와 마주쳤을 때도 제대로 상대하기 어려웠을  분명했다.
그랬다면 프레이도, 자일씨도 구하지 못했겠지. 설령 제논이 왔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프레이.”

그제서야 나는 프레이를 떠올렸다.
어느샌가 제논에게만 신경을 썼더니, 그새 잊고 있던 건가.
어쩌면 이번에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프레이와 자일씨임이 분명했을 텐데도.

무너진 자일 레스토랑은, 어찌 보면 자일씨의 평생이 담겨 있는 장소였다.
이능을 강화하고, 그 강화된 이능으로 식당을 차려 번 돈으로 지은 곳.
아내에게 속죄한다며 요리를 이어갔던 그가 자일 레스토랑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레이랑 대화를 막 시작하려 하던 차에 벌여진 테러였으니.

“후우...”

이마에 손을 짚은 채 푸욱, 한숨을 내쉬며 누워 있는 제논의 상태를 확인했다.
뭐, 잠깐 어디 갔다온다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문까지 걸어간다.
문을 여닫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그렇게 문을 닫으며 문틈 새로 제논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음, 안 깼네.

쿵, 완전히 닫힌 문을 뒤로 하고, 이제 프레이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아마 지금 쯤이면 깨있지 않을까? 제논이야 치료 받았으니 잠든 거고,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 이었으니.

똑똑-

“프레이,  아이샤야.”
“들어와-.”

역시나, 하긴 이제 9시니까.
지금 잠을 자기엔 조금 그렇지. 빙긋 웃으며 병실 문을 열자 프레이가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샤, 제논 쪽에만 너무 있는 거 아니야?”
“다쳤으니까, 조금 더 신경 쓰는 거지.”
“...뭐, 어쩔 수 없지.”

약간 섭섭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프레이였지만 천장을 향해 꼿꼿이 서있는 더듬이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쿡쿡, 더듬이를 살짝 찌르자 삐죽이던 입술은 집어넣곤 헤실헤실 웃는 프레이를 보며 따라 웃었다.

“몸은 좀 어때? 머리가 어지럽진 않아?”

아마 기절했을  머리를 맞은 것 같았으니까.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프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병원에서도 딱히 치료 받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으니까. 그냥 혹시 모를 무언가가 있을까봐 입원해있는 거고.”
“하긴, 이렇게 끈적이니까.”

프레이의 몸에 있는 점액을 손에 묻히며, 나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끌거리지도 않고, 적당히 끈적이는 점액.
손가락 사이에서 은색의 실을 만들어내는 그 것을 봤을 때 프레이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보긴 힘들어 보였다.

다만   말고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아직까지도 아무 진전이 없는 프레이와 자일씨 사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진전이 생길 거라 생각했을 때 쯤 이런 일이 터져버렸으니.
게다가 자일 레스토랑이 완전히 박살나버리면서 받은 충격도 더해진 자일씨가 지금 어떤 상태일지는...뭐, 구태여 상상하지 않아도 알 법했다.

“그...프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프레이가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자일씨랑은 어떻게  거야? 저번에 얘기하기로 하긴 했는데, 결국 못했잖아.”
“아. 그거?”

의외로, 프레이는  얘기냐며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어깨만 한차례 으쓱이곤 말을 이어갔다.

“그건 뭐, 집에서 해도 되는 거니까.”
“집에서?”
“응, 사실 아까 아빠가 왔다갔거든.”
“자일씨가?”

의외였다. 병실에 틀어박혀 망연자실해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심경에 변화가 있던 걸까.
그가 요리에 대해 보이던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쯤 좌절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아무튼 프레이를 직접 찾아올 정도면 그리 실망하진 않은 듯 했다.

“...아빠는 레스토랑이 무너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나봐. 그 동안 신경쓰지 못해서 미안하다- 어쩐다 하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갔어. 집에서 보자더라.”
“진짜?”

이건 조금 의외인데. 제논과 함께 갔을 때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영 딴판이 아니던가.
요리를 아내에 대한 속죄라 칭하며 포기할 수 없단 식으로 얘기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때 얘기한 뒤로 이래저래 생각이 많이 변한 듯 했다.

하기야, 그 바로 다음날에 프레이하고 얘기하자 했으니.

“다행이네, 프레이.”
“얘기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있을까 싶긴 한데...”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지겠지.”
“...그렇겠지.”

이 둘 사이의 거리가 생겼던 원인을 생각해보면, 아마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태도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 거리가 좁혀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뭐,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결된다 하니 고민거리가 해결 되는 것도 같고.
신경 쓸 게 하나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는 듯 했다.

이제 정말 헤라 카르멘 말고는, 당분간 신경쓸 게 없구나.

그러고보면 빙의하고 나서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던 같다.
이제 와서 보면 B지구와 A지구에서 빌런들하고 싸웠던 것도, 헤라 카르멘과 맞닥트려 도망치던 것도.
거기에 제전에서 싸웠던 것도, 심지어 마루더즈와 맞붙었던 것도, 전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제 6월, 빙의한지 3달이 넘어가는 시점에 뭔 일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다.

큰 것만 따져도 이정도인데, 단순히 사소하리만치 스쳐간 인연까지 따진다면 이젠 완전히 이 세상의 사람이 된  아닐까.

이제는, 나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준다하더라도 여기 남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젠 평생을 아이샤 이리안으로 살게 되지 않을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게 천천히 변해가면서 말이다.

“아이샤, 계속 병원에 있을 거면 나랑 같이 잘래?”
“아니, 안그래도 침대 좁은데 같이 어떻게 자.”

제논만 한  더 확인하고 집에 가야겠지.
고개를 저어보이자 프레이의 더듬이가 실망했다는  추욱 늘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병실에서 잠을  수는 없었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레이도 마지못해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잘자, 프레이.”
“내일  거지?”
“내일 제논 퇴원이니까. 와야지.”

그러자 프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맨날 제논만 신경 쓴다며, 어떻게 자기랑 만났으면서도 제논, 제논 그러냐고.

“내가?”
“어, 솔직히 말해. 병원 오는 것도 제논 때문에 오는 거지?”
“맞긴 한데, 프레이 너도 여기 있잖아.”
“봐봐, 우선순위는 결국 제논이잖아.”
“...그런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내가   있는 건 고작해야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제논만 신경 쓴다고?

그럴 리가.

그냥, 걔가 많이 다쳤으니까. 그냥 그런 것뿐이었다.

“그럼 나 이만 갈게?”

쿵, 투덜거리는 프레이를 뒤로 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제논 보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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