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친구 이상은...싫어(6)
원피스는, 그러니까 교복치마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교복보다 훨씬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재질에, 팔이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걸치는 건 순전히 어깨에 있는 끈 하나 였기 때문에 몸놀림도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다.
단 한 벌, 속옷을 제외하면 그 한 장의 옷으로 몸이 가려졌다는 생각에 괜스레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도 같고.
다른 옷도 있기야 했지만, 프레이의 반응이 그랬던 것처럼 제논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하는 궁금증에 일부러 챙겨 입었다.
가운데에 푸른 리본이 달린 페도라까지 들고, 거기에 프레이에게 온 문자까지 답장하며 그렇게 바쁘게 집 앞을 나선다.
평소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가는 편이라 이른 아침에 나가자 갑작스레 햇빛이 눈을 찔러오기 시작했다.
6월, 그래도 아직 아침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라 햇빛만 가린다면 땀을 흘릴 만큼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귓가를 어지럽히는 매미 소리인 건데.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장난 아니게 커지는 탓에 소리만 들어도 점점 짜증이 쌓이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러다가 문득,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살랑이는 선선한 바람을 느낀다.
몸을 덮고 있는 열기를 단번에 날리는 느낌. 머리 위로 붕뜨는 모자를 손으로 짚으며, 그렇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나무 아래, 그늘인 터라 나뭇잎 사이로 새어오는 빛을 제외하면 누군가를 기다리기엔 딱 좋은 자리 같았다.
세상에, 내가 원피스를 입게 될 줄이야.
약간 충동이 섞인 결정이긴 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수치심이 살금살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 팔이 드러난 게, 팔을 들면 가려져 있어야 할 부분까지 다 보일 테니까.
괜히 입었나, 라고 생각하면서 샌들이 신겨진 발을 꼼지락 거렸다.
프레이는 굽 높은 구두를 신으라고 하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간 바닥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일 것 같아서 최대한 타협한 뒤 결정한 것이 샌들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아이샤의 일러스트와 차이점을 고른다면 아마 신발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조금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평소에 씻는 거 외에는 관리를 일절 하지 않는데다, 다른 사람들처럼 화장이라던지, 그렇다고 손톱이나 발톱은 손질한다거나 애초에 로션같은 것도 잘 바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깔끔한 상태가 유지된다는 건, 마치 보정이라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하기야, 내가 들어와 있는 곳도 소설 속 세계였으니, 그런 게 있다한들 더 이상 놀랄 것 같지도 않고.
하아암- 조금 일찍 일어난 탓일까, 터져 나오는 하품을 조심스레 집어넣으며, 저 멀리에 시선을 두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언제쯤 오려나.
그렇게 한참을, 약속시간이 다 되어갈 때 까지 기다렸을 때쯤.
저 멀리서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뛰어오기라도 하는 걸까, 고개를 돌릴 때 모자가 떨어질까 모자를 잡은 채로 한참 멀리서 뛰어오는 제논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늦진 않았네.
입고 있는 린넨 긴팔의 카라가 슬쩍 젖을 만큼이나 뛴 건지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다.
뭐, 조금 늦어도 화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쪽이 나은 건가.
뛰어오던 제논이 날 봤는지 손을 흔들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 주변을 슬쩍 살펴보고,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사람 놀라게 왜 그러는 거야.
‘빨리 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손짓해도, 제논은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야.”
“...어.”
대답하는 걸 보면 정신을 차려져 있는데, 뭐에 홀린 듯 아직까지 얼떨떨한 녀석에게 다가가자 제논은 그제서야 흠칫, 하고 놀라며 손을 흔들었다.
“왜 그래? 왜 갑자기 멍 때리고 그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묻자 제논은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그냥.”
얼굴이 붉게 물드는 건 덤, 뭐 오다가 숨이라도 찬 건가.
어휴, 한숨을 내쉬자 제논이 슬쩍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일단 밥부터 먹을래?”
“...아직 시간은 좀 이른데.”
아침은 먹었고, 점심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 아닐까.
아직 10시를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며 말하자 제논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가고 싶은 곳이라, 딱히 생각하고 있던 곳은 없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어제 프레이가 줬던 영화 티켓이 떠올랐다. 그거 아침 시간대 아니었나?
“영화 볼래?”
“...영화?”
갑자기 영화? 그러면서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던 제논은 이내 내가 꺼내는 표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언제 예약했어?”
“프레이가 줬어. 근데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겠네. 아직 확인을 안 해가지고.”
“시간도 11시면, 보고 밥 먹으면 되겠다.”
“그렇네.”
이런 걸 예상한 걸까. 프레이가 준 티켓을 보며 올라오는 소름을 잠시 진정 시킨 뒤, 근처에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빙의한 뒤로 문화 생활이라는 걸 딱히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막 빙의하고 나서는 이 세상에 대한 걸 찾아보고, 이능에 익숙해지느라 시간을 썼고.
최근에는 헤라 카르멘이니 마루더즈니 뭐니 해서 딱히 관심을 쏟을만한 여유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집에 tv가 없는 것도...한몫 했다.
스마트 워치로 확인하면 된다지만, 사실상 스마트폰과 사용법이 근본자체가 틀려서,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힘들고.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은, 이 세상의 영화였다.
이능이 있는 세계의 영화도 히어로물이라던가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해보면, 원래 살던 세상에서도 아무 이능 없이 신체 능력으로만 액션 영화 찍던 게 자주 나왔으니까.
뭐 경찰이나 군인을 다룬 영화도 나왔으니 이 세상에도 히어로 영화가 있긴 하겠지.
그렇게 영화관에 들어서자, 살짝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은 순식간에 풍선처럼 꺼졌다.
“뭐 특별할 게 없네.”
“기대했던 거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 상상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22세기 sf 식의 영화관을 기대했던 건 역시 무리였을까.
홀로그램도 상용화 되어있는 시대라 내심 기대했건만.
평범한 영화관의 모습을 보자 살짝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뭐야?”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건, 아마도 음식을 주문하는 곳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혼자 타오르는 남자였다.
온 몸에 불을 붙인 채 옥수수로 둘러 쌓인 투명한 방안 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남자.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제논에게 묻자, 제논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팝콘 튀기는 사람이잖아.”
“...기계 쓰지 않아 보통?”
“종종 저런 알바 쓴다고 했어.”
“그럼 뭐, 카페에서 얼음 얼리는 알바도 있겠네.”
“...맞잖아?”
세상에, 이 세계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일면이 많았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티켓을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11시 정각 티켓인가.”
“어, 근데 볼 만한 영화가 있나.”
“몰라, 프레이가 예약해준 거니까. 잠자코 봐야지.”
그렇게 영화를 확인 했을 때, 떠오르는 영화의 장르에 순간 숨을 헛, 하고 삼켰다.
“...로맨스?”
“어...음.”
프레이가 분명 나랑 같이 보려고 사둔 표라 하지 않았나.
설마 나랑 로맨스 영화를 보려고 했던 건가? 여자애 둘이서?
순간 당황하긴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영화가 온전히 로맨스라는 장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액션도 있네.”
“그러게.”
이능력이 가득한 세상, 이능력 없이 태어난 소년이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나쁜 빌런들을 때려잡는다는.
어찌 보면 이 세계에서 왕도적인 내용을 가진 영화라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거 꽤 유명한 영화긴 해.”
“유명하다고?”
“응, 감독도 그렇고 영화 자체를 좀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
“...오.”
스마트 워치로 검색해보자 꽤 유명한 수준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인 것 같았다.
당장 배우들만 해도 내가 들어봤던 이름들이고, 별점이 4.7이라.
이렇게 별점이 높은 영화는 아마도 클레멘타인 같은 것 말고는 본 적이 없었는데.
리뷰도 하나같이 호평인 걸 보아 꽤나 괜찮은 영화인 것 같았다.
로맨스인게 조금 걸리지만, 뭐 전에도 종종 로맨스 영화 보고 그랬으니까.
티켓을 확인한 뒤, 팝콘을 사러 가 다시 그 불타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기도 잠시. 의자에 앉아 시간을 떼우다 보니 어느새 영화 입관 시간이 다가왔다.
“팝콘 무슨 맛 샀어?”
“카라멜.”
“2개 샀지? 아니, 왜 하나 샀어!”
자기 머리 만큼이나 큼지막한 팝콘통을 들고 오는 제논에게 무어라 하자,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 맨날 한 통만 사다 보니까. 다시 사 올게.”
“됐어, 나 어차피 많이 안 먹으니까.”
한 통만 샀다는 건 영화관 올 때 항상 혼자 왔다는 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더 이상 뭐라 하고 싶진 않아 다시 팝콘을 사오겠다는 제논을 잡아당겼다.
“그냥 영화관 들어가 있자.”
“...그래, 그럼.”
영화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가. 지루하리만치 긴 광고 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화재시 비상 대피구 위치를 알려주는 방송까지 전부 나온 뒤, 드디어 영화가시작되었다.
“오.”
와그작, 팝콘을 씹어 먹으며 영화의 퀄리티에 감탄하기도 잠시.
아마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했다.
피곤에 절은 눈빛, 딱봐도 어디서 한참 굴러먹었는지 반쯤 내려간 눈에서는 퇴폐미라 할만한 것이 잔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잘생겼지?”
제논의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멍하니 그 배우를 쳐다보았다.
분명,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배우 중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었고, 저 축 처진 머리나 균형 잡힌 외모를 봐서 잘생겼다고 할만 하긴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슬쩍 바라보자,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뭐, 저 배우가 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주인공보다 잘생겼을까. 졸린 듯 반 쯤 내려간 눈보다는 늘 둥글게 웃고 있는 제논의 눈이 낫지 않을까.
“그런가, 난 네가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어?”
무심코, 별 생각없이 던진 말에 제논이 놀란 듯 날 쳐다보았다가.
이내 시선이 추욱, 하고 내려갔다. 그렇게 영화가 전부 끝날 때까지, 제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