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친구 이상은...싫어(7) (55/115)



〈 55화 〉친구 이상은...싫어(7)

“흐으...재밌었다.”

장장 2시간을 내리 앉아 있느라 딱딱히 굳어버린 몸을 풀며, 아까 본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보이 미트 걸 순애물, 별 기대 없이 본 영화였는데 의외로 이능을 상당한 퀄리티까지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이게 감독의 역량인가 싶었다.
물론 돈의 힘이겠지만, 결국 cg를 어떻게  건지 정하는 건 감독의 재량이니까.

이능이 없는 남자주인공, 그리고 이능이란 세계 속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소녀.
그럼에도 소녀를 지키겠다며 발버둥치는 남자주인공의 그 애절한 마음이 여기까지 닿는  같아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쥔  영화에 몰입하고 말았다.
여자가 된 뒤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가, 종종 이런 영화를 보러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영화에 흠뻑 빠져있기도 잠시, 여전히 어딘가 맹한 얼굴로 허우적거리는 제논을 쿡쿡, 하고 찔렀다.

아까부터 영혼이 나간건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게 꼭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야, 야.”
“......”

와, 이제는 찔렀는데도 대답을 안 하네.
할 수 없이 얼음을 살짝 얼려 목에 가져다 대자 제논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아니, 아까부터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서. 무슨  있어? 영화가 재미 없던 건가?”
“...영화는 재미있었어. 그,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 구출하고.  장면이 좋더라.”

그런 장면은 없었는데, 영화 안 봤구나.
잔뜩 좁아진 내 눈매를 발견한 제논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혼자 웃으며 말을 돌리려 했다.

“아무튼, 이제  먹으러 가자.”
“...흐으, 그래.  먹자.”

조금 더 캐내고 싶긴 하지만, 자기가 말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고개를 주억거리자 제논은 그제서야 후련한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어디론가로 이끌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샤,   좋아하는 거 있어?”
“먹는 거면 글쎄...딱히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건 없는데.”

먹는 걸로 투정 부린 적이 없던 만큼, 아무래도 음식에 한해서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았다.
그냥 사주면 먹고, 안 사주면 대충 먹는다는 느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 떠올리자면, 역시 고기 종류가 아닐까.
굽든, 삶든, 튀기던 어느 방식으로도 즐길 수 있는 고기였으니까.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걸 꼽자면 역시.

“고기면 다 좋아.”
“고기? 애매하네. 워낙 종류가 많으니까.”
“네가 감당이 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제논이 먹는 양을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고기 전문점을 갔다간 한두푼으로 끝나진 않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뷔페라던지, 싸지만 양이 많은 곳으로 가야지 만약 조금 비싼 곳을 간다면...

아마 단순히 ‘무리했다’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거덜 나지 않을까.

제논도 그걸 아는 건지, 내가 말한 뒤로 계속 고민하더니 이내 결정했는지 한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적당한 무한 리필 집인가.
차라리 이런 게 나았다,  무리 한답시고 비싼 곳을 갔다가는 마음만 불편할 뿐 만족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을 테니.

저번에 자일 레스토랑에 갔을 때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제논이 딱히 배부르게 먹은 것 같진 않았다.

“...미안해.”

미안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을 여는 제논을 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 이런 걸로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돈 만 조금 여유가 있었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가도 됐을 텐데.”
“난 이런 곳이 더 좋아.”
“...고마워.”

입구에 서서 주춤거리는 제논의 등을 떠밀며,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자 제논이 고맙다며 입꼬리를 약간 끌어올렸다.
같이 먹는 건데, 어설프게 비싼 곳 가서 불편하게 먹는  보다야 마음 편하게 배불리 먹는  낫지.

그래도 조금 미안한 건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제논을 보며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걸로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

“...대단하긴 하네.”

아무리 무한 리필이라지만, 정말 무한대로 리필을 하려했던 제논을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제논은 부끄러운지 시선을 살살 피했다.

“어떻게 그렇게 먹는 거지?”
“아, 아니. 간지러운데.”
“신기하잖아. 분명 배는 이렇게 딱딱한데, 도대체 어디로 그렇게 들어가는 건지.”

폭발이라는 이능 탓에 신진 대사량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혼자 고기를 10근이 넘게 먹는  이해할 수는 없었다.
배를 찔러봐도 만져지는  온통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뿐인데, 그렇게 먹은 것들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제 밥도 먹었고, 집이나 갈까. 그런 생각으로 제논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찰나, 제논이 갑자기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갈래?”
“...뭔데, 오락실?”

이런 곳에도 오락실이 있었나. 발달한 문명과는 달리 고전적인 여가 시설을 바라보며 고민하기도 잠시, 어느덧 내 발걸음은 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잠깐은...괜찮지 않을까.

“오, 똑같네.”

그렇게 향한 오락실의 모습은, 영화관과는 달리 내 예상과  들어맞았다.
농구공 집어 던지는 것부터, 쓸데없이 많은 인형 뽑기, 간혹 보이는 오락기와 주먹으로 쳐서 점수를 얻는 샌드백까지.

딱 옛날에 홀로 갔던 그 곳이 아니던가.

“이거 점수 내기 할래?”

문득, 축구공을 차서 점수 내는 기계가 보였을 때.
나는 어느샌가  앞에 서있었다. 예전에 이 거 발로 차서 고장 내고 그랬는데.
내가 이런 거에 흥미를 보인다는 게 신기한 건지, 제논은 약간얼떨떨해
보이는 얼굴로 다가와 기계에 1000원을 스윽 집어넣었다.

“낮은 사람이 다음에  사기.”
“밥?”
“그래, 쫄?”

그 말에, 약간 놀란  눈을 크게 뜬 제논의 눈이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하고, 이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럴 리가.”

자신 만만해 보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있기도 했다.
직접 발로 차서 고장 냈을 만큼이나 이거 하나 만큼은 자신 있었으니.
다만 내가 하나 고려치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몸이 그 때와는 달리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터엉-

“...자, 잠깐만.”

900점은 너무하잖아. 제발  번만 기회를 달라며 제논을 조심스레 쳐다봤지만, 제논은 이내 싱긋 미소지으며 천천히 축구공을 향해 다가갔다.

퍼엉-!

공이 터졌다는 생각이  만큼이나 거대한 굉음.
간단히 999라는 숫자를 찍어 보인 기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논이 얄밉게 웃어보였다.

“...야,  판은 연습.”
“연습?”
“저거, 저걸로 다시 해.”

농구공을 던져서 넣는 거라면, 아무래도 여자의 몸이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무래도 자체적인 체술을 어느 정도 겸비한 몸이었으니. 그로 쌓인 센스라면,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휙-

그래, 분명히...이길 수 있을 게 분명했는데.
콰악, 나는 제논의 멱살을 잡았다. 또 1점 차이로 져버렸다.

원래 저렇게 날렵한 애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몸놀림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떠올려보니 폭발로 몸을 강화 시키는 방식도 있지 않던가.

“이능 쓰지 말라고 했지.”
“아, 아니. 나 이능  썼는데?”
“거짓말 하지 마. 너 이능 썼으니까, 네가 밥 사. 반칙패, 끝!”
“...알았어. 다음에 내가 사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논은 어째 억울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바라던 것처럼.
설마 자기가 돈 쓰는 걸 바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긴 하지만. 농구공을 한 쪽으로 던지며, 제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는 거니까 다음에, 올 거지?”
“그래야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제논은 뭐가 그리 좋은 건지 환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이제 슬슬 가야겠다.”
“...가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되려 딱딱히 굳어, 언뜻 보면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뭐  해야 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무언가 말 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제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흔들리는 눈동자에 시선이 닿았다.
하늘처럼 파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망설이는 입이  새 없이 달싹였다.
자신이 하려는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두려운 것처럼. 그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한껏 담겨 있었다.

뭐라 하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오락실에서 내기를 하고, 거기에 일부러 져준 것부터 의심스럽긴 했었다. 마치 꼭 다음의 만남을 유도하려는 것처럼 하는 행동이지 않은가.

항상 그랬다.

언제나 나를 걱정하는 것도, 늘 내게 모든 것을 맞춰 주려 하는 것도,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사과하는 것도.

처음엔 그저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그랬기에 고마워했다. 하지만 점차 그 감정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끈적거리고, 농밀한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면서.

도대체 제논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아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편하게 생각해보려 해도, 어느 순간이면 나를 바라보는 저 다정한 눈빛이 늘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차갑게 대하면서, 심지어 레이 마이어나 프레이한테도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저 달싹 거리는 입에서 나올 말이,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가 품고 있는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고민은, 그렇게 점점 깊어져 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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