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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화 〉너의 그 행동이 싫어(2) (57/115)



〈 57화 〉너의 그 행동이 싫어(2)

“아니, 갑자기 그렇게 되는 거에요?”
“...글쎄, 아무래도 네 전력을 가늠해보고 싶은 게 아닐까.”

전력을 가늠하다, 라.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역시 헤라 카르멘인가. 레이 마이어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중앙’이라 하는 것도 결국 히어로 총연이고, 거기 회장은 에드윈 카르멘이야. 헤라 카르멘이 빌런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에드윈 귀에 들어가지 않은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정도 요청쯤은 해줄  있지.”
“명분은요?”
“자신과 비등한 1학년이 있다. 차기 유망주 같은데, 이번 트라이앵글 친선전에서 실력 좀 보고 싶다.”

뻐끔, 담배 연기를 흘리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말하면, 못해줄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자기 딸의 부탁인데.”
“아카데미 3학년 탑이기도 하고요.”
“뭐, 아무튼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다시 헤라 카르멘과 싸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베가, 데네브, 알타이르의 수준이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아마 네가 싸우는 상대는 그 쪽 학년 탑일 거다.”

1학년 탑이면, 솔직히 말해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내 이능을 보여주는 게 싫은 건데.
헤라 카르멘과 싸운 이후로 질적이나 양적이나 어느정도 상승했으니까.
단순히 내 상승세를 그 쪽에 보여줘야 한다는 게 불편했다.

하지만 어쩔  없나. 결국 따지고 보면 아직 내가 헤라 카르멘에게 완벽하게 우위를 점할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니.
이능으로만 따지면 모를까, 그 외의 것들은 단순히 카르멘이라는 이름에 산산조각 나기 마련이었다.

이런 것을 일일히 따져 들었다간 이로울 게 없을 터.

“흐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만약 헤라 카르멘이 이상한 짓을 하려 하면 내가 곧바로 제지할 테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머릿속에 있는 것은, 단지 헤라 카르멘의 걱정  만이 아니었다.
기억을 되짚을수록, 원작의 내용을 떠올릴수록 제논이 문제였다.

“트라이앵글에는 카르멘이랑 연관 깊은 학생들이 많잖아요. 제논이...어떻게 대처할 지가 문제죠.”
“남자 친구 걱정이었구나.”
“아니, 남자 친구 걱정이 아니라!”

그러자 킬킬거리며 웃던 레이 마이어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아예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지. 다만 걔도 생각이 있고, 여태 겪은 게 많으니까. 아마  참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걔 옆에 있으면 싸울 일도 없을 거 아냐. 네가 말리면 되니까.”
“그렇긴 한데...그래도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논을 믿어. 네가 안 믿어주면 이 세상 누가 걔를 믿어주겠니.”
“하아...”

답답했다.
가뜩이나 제논이 품고 있는 마음을 자각한 뒤로 머리가 어지러워 죽겠는데, 이제는 강제로 같이 붙어있게 생겼으니.
이전에는 별 신경 안 썼지만, 자각한 뒤로는 그 차이가 극심했다.
걔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꼭 내게 구애 하는 것만 같아서, 어느샌가 슬쩍 떨어지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져 있으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학교 어딘가가 터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제 제논의 이능을다루는 실력은 입학 전과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지금은 어지간한 3학년도 쉽사리꺾을 만 했다.
만약 싸우는 것이 트라이앵글에 속한 3학년 상위권의 학생이라면.
학교가 터져나가는 것을 떠나 제논이 다칠 수도 있었다.

“뭐, 그래도 고작 일주일이니까. 어떻게 잘 데리고 돌아다녀봐. 학교도 평소보다 일찍 끝날테니 나쁘진 않잖아.”
“...네, 그래야죠.”
“여자 친구 씨 힘내. 항상 응원하고 있어.”
“아니, 여자 친구 같은 거 아니라니까요!”
“네가 여자 친구가 아니면, 도대체 이 세상에 연인이란 게 있긴 할까.”

능글맞게 웃는 레이 마이어를 쏘아보자, 그녀는  시선을 받아 넘기며 담배를 휘휘, 허공에 저었다.
이제 나가라는 건가. 어휴, 일부러 한숨을 토해내듯 뱉은 뒤 담당실을 빠져나오자,  쪽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뭐하다 왔어?”

네가 또 정신줄 놓고 누구랑 대판 싸울까  걱정 좀 하고 왔어,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친선전에 관한 얘기만털어놓았다. 트라이앵글의 학년대표와 싸우게 될 거라고, 아마도 헤라 카르멘의 개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헤라 카르멘의 이름이 나왔을 때 제논의 표정이 살짝 굳긴 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너무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을 거야, 설마 1학년을 3학년 탑이랑 붙이진 않을 거고. 게다가 넌 헤라도 이겨 봤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닌데.
아무 걱정 없다는 듯 환히 웃는 제논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너 때문에  머리가 얼마나 아픈지 너는 알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트라이앵글의 학생들이 전부 카르멘과 관련이 깊은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프레이가 친구라며 데려온 애가 있기도 했고.

“프레이, 옆엔 누구야?”

갑자기 친구랍시고 데려온 애도 똑같이 더듬이를 달고 있길래 물었더니, 프레이는 해맑게 웃으며 친구를 소개했다.

“얘 이름은 시온이야. 이능은 나랑 비슷하지만  껍질이 없어!”
“...아.”

그러니까 민달팽이라는 말인가.
둘이 붙어 생기는 끈적한 점액이 바닥에 흔적을 남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그 시온이라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축한 감각, 프레이를 만질 때보다도 훨씬 끈적이는 점액이 가득한 손이 맞닿자 나도 모르게 순간 흠칫했다.

“아, 미안. 내 생각보다 훨씬...느낌이 다르네.”
“괜찮아, 원래 민달팽이가 더 끈적이거든.”

그런 습성도 있었나. 그렇게 시종일관 나를 끈적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온을 어렵사리 보내고 나자, 프레이가 다가와 나를 덥썩 껴안았다.

“아이샤! 그래서 저번에 잘 갔다 왔어?”
“응, 근데 영화 그거 뭐야? 우리끼리 보려고 했던 거라며. 웬 로맨스?”
“나 사실 거기 남자 배우 좋아하거든, 진짜 잘생겼지 않아?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까...”
“있잖아.”
“누구? 우리 학교에 누가 그렇게 잘생겼는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당연하지 않냐는 듯 제논을 쳐다봤다.
영화까지 직접 보고 왔지만, 계속 봐도 제논이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제논?”

하지만 프레이가 보인 반응은 내 생각과 꽤 차이가 있었다.
갑자기 주춤거리더니, 이내 입을 손으로 가리며 더듬이가 하늘을 뚫을 듯 쫑긋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샤가 드디어...”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급히 무어라 했지만, 이제는 완벽히 끈적해진 점액이 내 몸을 꽁꽁 묶어 팔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야, 잠깐 프레이? 너 또 이상한 상상하지.”
“제논이 도대체 뭐라 말한 거야. 어? 뭐라고 말했길래 이렇게 콩깍지까지 씌워진 거야.”
“아니, 딱히 들은 말은 없는데?”
“...아이샤, 힘내?”

그렇게 프레이를 바라보던 내 표정은 이내 딱딱히 굳었다.
저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어째 아까 레이 마이어가 지었던 표정이랑 똑같지 않은가.

“아, 됐어. 나 갈 거야. 제논 찾으러 가야 돼.”

또 언제 떨어진 건지, 잠깐 프레이랑 얘기하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제논을 타박하자 프레이가 또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프레이, 그만해. 나 진짜 진지 하니까.”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제논이랑 잘 있어!”

마지막 까지도 그 음흉한 미소를 잃지 않는 프레이를 보내며, 나는 다시 제논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갔을-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기도 한참, 어째서 인지 저 복도끝에 사람이 가득한 게 보였다.
막 큰 소리도 나오는  보면, 아마 싸움이라도 난 걸까.

그렇게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가자, 이내 그 목소리가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  있었다.

“아, 미안해. 근데 이게 내가 잘못한 건가? 나랑 시선이 마주친 것도,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결국 네가 먼저 잘못한 거잖아.”
“......”

누군지는 몰라도화를 내는 포인트가 이상하네.
게다가 거기에 가만히 있는 한 쪽도 그렇고.
호기심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 고개를 내밀자, 거기에 서있는  사람이 꽤나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익숙한 걸 넘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제논?”

순간 제논의 이름을 부르자, 싸움을 구경하던 이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제논이 멱살을 잡혀 있고,  얼굴에 멍이 있고, 왜.

네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듣고 만 있는 지가.

지금의 내겐 더 중요했다.

“설명해.”
“......”
“설명하라고 이 멍청아.”

아무  없이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제논을 바라보며,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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