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습격은 싫어(5)
“...에반도 당한 건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자니까.”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듯 이제는 까맣게 타버린 마루더즈의 간부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의 이름이 에반이었던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나는 검을 다시 그에게 겨누었고, 그는 검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히 처음에 셋이서 덤빌 때면 모를까, 이렇게 혼자 남아서 어떻게 싸울까요.”
“...그럼 비키던가.”
아이샤한테 가봐야 했다.
조금도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력으로 부딪혔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그에게 넌지시 던지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가시죠. 정말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끝도 없이 의심하면 이 자리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어 일단 발걸음을 내딛었다.
검을 쥔 손을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한 채, 천천히.
그의 앞을 지나갈 때도, 심지어 그를 지나쳐 어느 정도 움직였을 때마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인가?”
“정말로요, 싸울 생각은 없다니까요.”
절그럭-
“싸울 생각은.”
차가운 무언가가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어 보였다.
꼭 그 미소가 뱀이 혀를 살랑이는 것만 같아, 어느새 찌푸려진 눈매가 그를 향했다.
“뭐하는 짓이지.”
“그냥 막는 거에요. 당신이 아이샤 이리안한테 도달하지 못하게 하라는 게 윗사람의 명령이었거든요.”
“싸울 생각은 없다면서.”
“싸울 생각은 정말 없어요! 그냥 막는 거지. 막는 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절그럭-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투명한 무언가를 만져보면서, 이것이 부서지는 것인지 파악했지만.
역시나, 그리 쉽게 부서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이능이겠지. 녀석의 충혈된 눈을 보면 분명히 이능 증폭제까지 먹은 게 확실해 보이니까.
원래 쥐고 있던 대검을 버리고, 허리춤에 있던 세검을 쥐었다.
아마도 저 사람의 이능은 공간을 제한하는데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까의 감촉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사슬이 아닐까.
그 사슬의 강도가 어느정도인지, 또한 범위나 길이, 뽑아낼 수 있는 개수가 어느정도인지 모르니.
당장은 좁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좋은 세검을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스릉-
내가 검을 뽑자, 그는 손사레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아, 정말 싸울 생각은 없다니까요! 그냥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세검을 휘두르며,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폭발을 응축시킨다.
설령 녀석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단 번에 뚫고 제압하기 위해서.
저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보면 신체적으로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사슬,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아 최대한 경계하며 접근해야 했다.
절그럭-
또,
아까 여기를 지나칠 때는 없었던 사슬이 발에 걸렸다.
무슨 동작을 트리거로 발동하는 거지?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수록,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사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5개.”
지금까지 5개, 그렇다면.
쐐애액-
뒤를 향해 세검을 던지자, 허공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 처음봤던 사슬이 있는 자리인가. 그렇다면, 녀석이 다룰 수 있는 사슬의 한계점은 아직 남았다는 거겠지.
까다로웠다. 보이지 않는 장애물에 동작이 막힌 다는 것 자체가, 어떤 큰 동작을 하는데에 방해가 되었다.
아무리 신체가 강화되었다한들, 보이지 않는 장애물까지 전부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속도에도 제동이 걸렸다.
“가만히 있어주시면 안되나요? 자꾸 그러면, 저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서요.”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쇠로 만든 기둥이 연쇄적으로 꽂히는 것만 같은, 그런 통증.
세검으로 앞을 내려치자, 쇠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이나 굵은 사슬이 느껴졌다.
이전의 사슬이 단 하나씩 나타났다면, 이번에는 그 사슬을 수십 다발 엮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여태껏 방어만 해오던 녀석이 갑자기 공격이라, 아까의 그 사슬부터 점차 사슬의 두께가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사슬의 간격도 이제는 점점 나를 조여오는 것처럼 변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 도핑하면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폭발을 내부에 일으켜 다시금 혈류를 조작한다.
미래의 내가 가질 활력, 그 힘을 다시금 몸에 불어넣으며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며, 사슬의 틈 사이로 세검을 찔러넣어 터트린다.
콰아앙-
강화된 이능을 통해 뿜어지는 폭발은 사슬을 터트리기엔 충분했고, 앞으로 2분 정도는 더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과 동시에 주변을 터트렸다.
2분 정도 움직일 수 있더라도, 1분 안에 끝내야 했다.
세검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베는 것보다 찌르는 것에 더 특화된 무기였기에,
제 아무리 좁은 공간이더라도 약간의 틈만 있다면 찌를 수 있는 것이 세검이었다.
사슬로 가려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틈이더라도.
찌를 수만 있다면.
사방에서 사슬이 덮쳐온다. 싸우기는 싫다더니, 이제는 완전히 나를 죽일 기세로 사슬을 쏘아대지 않는가.
하지만 알아낸 점이 하나 있다면, 녀석이 다룰 수 있는 사슬은 100개 정도라는 것이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아까 녀석이 만들었던 사슬이 사라져있는 걸 보면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사슬의 개수가 한정 되어 있다는 거겠지.
퍼어엉-
폭발을 일으키며, 사슬을 하나씩 부숴나간다.
연환되어 있는 사슬은 그저 흔들릴 뿐이지만, 심지어 사슬의 형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공기를 가르며 내게 향하는 사슬을 느낀다. 바람이 치솟아 볼을 간질이는 그감각을 느낀다.
피할 수 있다. 지금, 도핑으로 그 어느때보다 빨라진 지금이라면.
위, 아래, 오른쪽, 다시 오른쪽.
저 녀석이 이능을 발동하는 트리거는, 녀석의 시선이었다.
눈이 반짝이는 그 광채에 집중하며 보이지 않는 사슬을 하나씩 피한다.
콰아앙-
내 경로를 가리는 사슬을 부수고, 두꺼운 사슬을 응축시킨 폭발을 소모해 나아간다.
녀석에게 먹일 공격이 강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한 번, 단 한 번만 급소에 먹인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조금씩, 조금만 더.
녀석의 얼굴에 초조함이 생기고, 점점 그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급해져라, 빈틈이 생길 만큼.
일부러 좌우로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이 만드는 사슬에서 빈틈을 유도하기 위해. 지금 녀석이 설치한 사슬은 아마 중앙이 크게 비어있지 않을까.
앞으로 몇 번 더, 처음에 만들어냈던 사슬이 그 한계에 닿아 사라질 때 쯤.
그러니까-
지금.
계속해서 모아왔던 폭발을 순식간에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순간 조절치 못한 힘으로 입에서 피가 왈칵, 새어나오긴 했지만.
엄청난 속도와 함께 세검 끝에 모인 폭발은, 분명히 녀석에게 닿기 충분하리라.
당황으로 가득찬 눈이 중앙을 향한다.
녀석이 만들어둔 사슬은 전부 좌우로, 지그재그 형식으로 깔려있었고 그로 인해 중앙은 텅 비어있었으니,
이 돌격을 막아 세우기 위해서는 여태껏 깔아놓은 사슬을 전부 지워야 했다.
하지만 그 사슬을 지우고, 다시 중앙에 설치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판단은 내려졌다. 녀석은 못 막는다.
투쾅-
주변의 사슬을 모조리 부수며, 내 몸이 하나의 화살처럼 나아간다.
오로지 한 점에 모든 폭발을 모아서.
씨익,
순간 내 눈이 커졌다. 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감과 동시에,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초조함과 당황이 사라진다.
그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여유.
등골을 타고 무언가가 뇌리를 강타했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치솟을대로 치솟은 속도는, 더 이상 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부딪혀야만 멈출 것처럼.
기기긱-
세검에 무언가가 닿음과 동시에 몸에 둔탁한 충격이 밀려왔다.
이건 부술 수 없다. 마치 수백 개의 사슬을 이어 붙인 것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사슬.
세검이 부서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나를 꿰뚫고 지나가겠지.
폭발을 더욱 응축 시켜보아도, 되려 검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갈 뿐.
결국 손 끝에 뭉특한 감각이 닿았을 때, 나는 무심코 눈을 감았다. 앞으로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며.
허나, 충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쩌저적-
내 몸을 꿰뚫는 불쾌한 감각대신에, 뼈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마루더즈가 풍기는 더러운 피냄새 대신에,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달콤한 향이.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백금발이, 나를 바라보던, 노을을 닮은 붉은 색의 눈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제논.”
네가 어떻게, 라는 말은 입에서 새어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 얼굴이 그리 화난 것 같지 않아서. 아직 내게 미소를 지어주고 있다는 그사실이 안심되어서.
조용히, 내 앞에 서있는 아이샤를 끌어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