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네가 좋아(2)
창문을 타고, 따듯한 빛이 병실에 내려앉는다.
그 빛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내리며 조심스레 눈을 뜬다.
텅 빈 병실, 여기저기 찢어진 교복을 입은 채 하얀색의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며.
그제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는다.
“...아침이구나.”
몽롱한 정신 사이를 꿰뚫고 몰려오는 기억들, 그 중, 유난히도 강렬히 떠오르는 기억하나에.
“아...”
다시금 얼굴이 붉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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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받았다.
물론 고백한 사람은 내가 그걸 듣고 있는지 몰랐겠지만, 나는 그 때 깨어있었고.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그 말을 직접 들었다.
아-
머리카락을 살짝 쥐어뜯으며,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그냥 잘 걸, 잠이 안와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결국 고백까지 들어버렸다.
차라리 못 들었더라면 이렇게 있진 않았겠지.
심란하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아는 거랑. 그걸 아는 상태에서 고백까지 듣는 거랑 느낌이 달랐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사실 추측이 아니던가.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추측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만, 고백은 그 추측에 말뚝을 박는 행위였다.
...물론, 제논 입장에서는 고백이라기보다는 그냥 중얼거린 거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괜스레 나만 이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제논 입장에서는 그 전과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예전처럼 행동하자, 생각해보면 내가 들은 것만 티 안낸다면 그냥 예전과 같았으니.
그냥 나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제논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건 조금많이 생각한 뒤에 결론을 낼 필요가 있었을 것 같았다.
히로인 따위는 되지 않겠다며, 철저하게 제논을 피하려했던 예전과는 그 생각 자체가 많이 달라졌으니까.
지금이야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히로인 포지션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헤라 카르멘과 싸우고, 마루더즈와 싸우고, 제전에서 싸우고.
함께 빌런과 싸운 것들만 지금 몇 번째인데 이제 와서 그 인연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누가 억지로 협박해서 한 것도 아닌데다, 애초에 내가 나서서 하지 않았는가.
제논에게 동정심을 품은 것도 사실이었고,몇 없는 친구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그렇게 멀어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제논을 생각하는 감정이 평소와는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으니.
걔가 다치면 그저 불만스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무척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처럼. 걔가 웃을 때면 괜스레 얼굴이 간지러웠고,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늘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아무리 내쉬어도,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셔도. 제논을 볼 때면 어째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중에 프레이한테 물어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퇴원하면 물어보는 게 낫겠지.
“으...”
벌컥-
잠으로 찌뿌둥한 몸을 쭉, 펴기도 잠시.
갑작스레 열린 병실 문을 바라보자 이내 제논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일어났어?”
“어, 어? 어.”
갑자기 네가 왜 튀어나오는 거야.
안 그래도 아직 마음을 다 정리 못했는데, 당황한 얼굴로 제논을 쳐다봤지만,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병실로 들어왔다.
“어제 얼마나 무리했으면 이틀을 내리 자는 거야. 깜짝 놀랐다고.”
“...이틀?”
“어, 그날 기절한 뒤로 딱 이틀 지났어.”
세상에, 좀 오래 잠든 거라 생각했는데.
이틀씩이나 잠들었던 거구나. 어쩐지 몸이 너무 무겁더라니.
어깨를 으쓱이자, 제논이 어느새 다가와 내 옆에 와서 슬쩍 앉았다.
“일단 밥부터 먹어. 병원식은 맛없으니까 따로 사왔어.”
“자, 잠깐만.”
제논이 옆에 앉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제논에게 말했다.
“나 이틀이나 안 씻었단 말이야. 그냥 저기 앉아 있어.”
이틀이나 잠들어있으면, 그 동안 누가 씻겨주지 않은 한 냄새가 나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싸우느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으니.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진 않았다.
킁킁, 팔에 대고 냄새를 맡아봐도, 딱히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제논이 웃으며 내게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냄새 날 까봐 그래? 괜찮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괜찮다니까. 아무 냄새도 안 나.”
그렇게 말한 제논은 내 팔을 잡아 당겨서, 자기 옆에 앉혔다.
혹시 표정이 안 좋아질까 힐끔 쳐다봐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라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야 나야 다행이긴 한데.
“몸은 좀 어때?”
“그냥, 조금 오래 자니까 찌뿌둥한 게 끝이야.”
투랄리온과 헤라 카르멘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강하긴 했지만,
그렇다한들 서포트 아이템을 사용한 뒤로도 쭉 밀렸던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 게 도움이 되기도 했고, 조금 몸을 스쳐지나간 상처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단순히 약만 발라도 될 정도 였다.
이렇게 깊게 잠든 것은 순전히 여신의 눈물을 사용한 반동 탓이겠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제논의 몸상태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여기저기 화상 상처가 잔뜩 있었던 모습인데.
심지어 그 상태에서 날 업었으니, 혹여상처가 내게 눌려 짓물리진 않았을까, 그게 걱정될 뿐이었다.
내가 몸을 유심히 살피자, 제논이 소리내며 웃곤 입을 열었다.
“나 다 나았어. 네가 자는 동안 다 치료 받았거든.”
“...미안해. 내가 업어달라고 해서.”
마지막 간부까지 처리한 뒤로는 워낙몸에 힘이 없는데다, 반동이 찾아와 정신도 몽롱한 터라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은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말이 업어줘, 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거 겠지만.
사실 나는 내심 제논에게 업히는 걸 바라고 있던가.
...하긴, 묘하게 편하긴 했다.제논 등이 조금 넓은 편이니까, 승차감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나른해지니.
저번에 A지구에서도 그렇고 그 감각이 살짝 그립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막상 제논의 얼굴을 보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도 많아서,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데.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자, 제논이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분홍색으로 보일 만큼 달아오른 귀,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본 건가.
괜스레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사실 이럴 필요가 없을 텐데, 내가 너무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냥 평소처럼 하자, 라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행동이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툭툭, 이마를 몇 차례 건드리며 고민을 거듭한다.
내가 계속 생각하던 말 중에서, 제논에게 가장 먼저 꺼내야 하는 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했던 말이었다.
그 날, 교실에서 울며 내뱉었던 말. 사실 네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느라 자기 몸은 정작 챙기지 않는 것이 싫다고 하고 싶었을 뿐인데.
괜히 격해진 감정에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실은 밉지 않았어.
그 말이 목구멍에 또다시 턱, 하고 걸려 빠져 나오지 않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네가 하는 행동들이 나를 위한 것을 안다고.
그래서 늘 고마워하고 있다고,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조금은 너를 돌아봐줬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말하면 되면 끝나는 아주 간단한 것인데.
“하아...”
그렇게 멍하니 한 숨만 내쉬며, 제논이 들고 왔던 비닐 봉지를 조심스레 들췄다.
뭘 사왔으려나.
“...참.”
그리고 그 비닐봉지에 든 것을 보며, 한 번 실소를짓는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안 걸까. 딱히 내가 무얼 좋아한다고 특별히 티낸 적은 없었는데.
제논을 힐끔 바라보자, 녀석은 그저 옅게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다는 듯. 옅은 홍조를 띈 제논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무어라 하려다간, 감정이 북받혀서 제대로 말도 못할 것 같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