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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화 〉네가 좋아(4) (70/115)



〈 70화 〉네가 좋아(4)

“...내가 제논을?”

좋아한다니, 프레이의 말을 들은 내 표정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논을? 그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제논을 그토록 피하려 했는데, 어째서 제논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냥 단지 친구일 뿐, 그래. 친구였다. 친구.

...친구.

 말을 곱씹을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미약하게나마 불만이 치솟았다.
고작 그 정도의 관계로 만족하는 거냐고, 너는 진심으로 그 정도의 관계를 바라고 있는 거냐고 묻듯이.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스테이크를 칼로쑤셔댔다.
푹푹, 구멍이 나고 그 사이로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잠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네가  그렇게  감정을부정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제논을 좋아하고 있어. 조금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모르겠어. 이게 좋아한다는 건가.”

어째선지, 나는 내 감정을 인정하는 것을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저 시원하게 내가 제논을 좋아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도 있었지만,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 무언가가그 것을 쉽사리 인정하게 두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건 고마움일 뿐이라며, 내가 제논에게 품고 있는 동정심일 뿐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장막 속에 가리고, 또다시 가면을 쓰게 만들었다.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제논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그저 고맙거나, 동정심이 아니라는 것을.
얼굴을  때마다 뺨이 간질거리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증상이, 결코 그런 통상적인 감정에 속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아이샤의 몸에 들어왔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이 무엇이었던가.
히로인이 되지 않겠다고, 제논과 사귀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것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제논의 고백을 듣고, 내 마음을 정하는 단계.
제논과함께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홀로 남아 길을 열어갈지.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고기처럼, 내 상념 또한 그처럼 녹아 내려간다.
이제 고민의 답을 내리는 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아까보다는 조금이나마 편한 표정으로, 마저 식사를 즐길  있었다.

#

집에 도착한 뒤, 거울을 보며 옷을 한 꺼풀씩 벗어던졌다.
팔을 반 정도 가린, 얇은 교복이 내려가고, 속옷만 남은 상태로 거리낌 없이 옷장으로 향했다.
씻고 나서 입을 옷을 꺼내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언제부터 였을까,  옷장에 있는 옷들이 순전히 여자아이의 옷으로만 가득 차게 된 시점이.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부터,
예전 같았으면 바둑돌과 같은 색깔만 있을 터인 옷들은 전부 형형색색의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지보다 치마의 개수가 더 많은 옷장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완전한 여자 아이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가슴을 가린 브레지어도, 아랫도리를 가린 삼각모양의 팬티도, 이제는 자연스러워  이상 불편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내 몸은 너무도 여자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감성도 더욱 풍부해지고, 우는 일이 잦아졌다.
자그마한 일, 예전 같았으면 그저 웃어넘겼을 일도 마음속에 새겨져 자꾸만 떠올랐고, 로맨스 영화를 즐겨보고 있었다.
전에는 질색했던, 그런 로맨스영화 마저도.

남자 주인공보다는여자 주인공 시점이 훨씬 몰입하기 쉬웠고, 가끔은 산모의 고통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나중에는 내가 겪을 일이라 생각하면서.

놀라운 발전이 아니던가.
교복 치마를 불편해하던, 처음 신는 스타킹 감촉에 눈살을 찌푸리던 나는 사라지고, 어느덧 완전한 아이샤 이리안이 되어 있었다.

“...후회해?”

거울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에게 묻는다.
네가 여태껏 해온 행동들이, 제논을 위해 해왔던 행동들을, 후회하고 있느냐고.

고개를 젓는다.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샤에게 빙의하기 전부터, 제논이라는 한 소설의 주인공은 내게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지금처럼 연심을, 우정을 떠나 내 삶의 일부나 다름없었다는 것은, 전혀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수백  돌리고, 돌리다가 지칠 만큼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선택을 고수했을 테니까.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은 어느덧 흐려져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푸른 잎사귀에 빗방울이 튕기며, 마른 아스팔트 바닥에 자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토옥- 토옥-

창문 위에 맺힌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무언가 생각에 잠기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코를 간질이며, 이내 습기에 젖은 풀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뭘까. 살면서 겪어본 사랑이란, 내게 피로 이어진 존재에게 품은 그런 감정 말고는 없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

연인이란 것은 그저 말로만 들어봤을 뿐, 그저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는 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제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간질이고,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차오르고, 예전에 스쳐갔던 기억들이  다시 귓가를 붉게 물들게 하는.
이런 것들이 전부 사랑이란 것에서 기인하는 걸까.

“...하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보던가 해야지.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같았다.

툭툭,

마룻바닥을 손가락을 치며, 내가 평소보다 초조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보고  감정이 뭔지 알고 싶은데, 하필이면 이제 주말이라 만날 수 없어서 그런가.
하지만, 아카데미가 아니더라도 얼굴은 얼마든지 볼  있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스마트 워치를 작동시켜 주소록에 들어간다. 기껏해야 둘 있는 전화번호.
그중 가장 맨 위에 있는 이름을 바라보며, 나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떨었다.

[주인공]

이름도 써져 있지 않은, 처음에 품었던 변변치 않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이름.
이제는 내가 번호를 왜 줬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다가 줬던 것 같은데.
연락한 것도 딱 한 번. 그것도 제논 쪽에서 직접 연락한 것이 아니던가.

초록색의 전화 버튼을 누르려 한참을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펜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역시 딱딱하게 ‘주인공’이라고저장하는 건 조금 너무하니까.

[제논]

...뭔가 별론데. 조금 딱딱해 보이는 것만 같아 이것저것 붙여보려다가, 결국에는 제논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된다.
성을 붙이기엔 제논이 싫어할 거였고, 그렇다고 이모티콘 같은 걸 넣자니 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흐음...”

그렇게 또 다시 한참동안 스마트 워치를 노려보다가, 마침내 초록색의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도대체 뭐가 그리 오래 걸리는 건지, 분명 자주 잠깐 동안 울리는 신호음이었지만 내게는 그야말로  시간의 시간과도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질까, 조심스레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툭-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때와 다르지 않은, 나른하고도 감미로운 특유의 목소리.

-아이샤? 무슨 일 있어?
“......”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원래의 목적이 무엇인지 까먹은 채, 귓가를 타고 고막을 간질이는 목소리에 또다시 정신을 놓아버린다.
거울에 얼핏 비친  얼굴은, 그야말로 빨갛게 물들어 목까지 붉었다.

세상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무엇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내 깊은 곳에 숨겨둔 말까지 꺼내게 될까, 그런 두려움이 노도처럼 몰려오는 것만 같아 내가 선택한 것은.

-아이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툭-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손목에 자리 잡은 스마트 워치를 풀어 내던져 버리고, 다시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우우웅-

내게 전화를 다시 건  뒤집힌 스마트 워치가 바닥에서 떨렸지만, 차마 손을 뻗을  없었다,
아마 전화를 받더라도  어버버하고 끊을 게 분명할 테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비가 그친 하늘엔 별이 무수히 걸려 있었다.

산책이라도 할까, 머리를 식히는 데엔 그만한 게 없어보였다.

#

뚜르르-

걸리지 않는 전화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샤에게 걸려온 전화, 혹하는 마음에 곧바로 받았건만. 들려오는 거라곤 약간의 숨소리뿐.
잘못 걸은 것 같았다. 애초에 나한테 전화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기대한 자신이 바보같았다.

창문을 보자, 오늘따라 유난히 찬란한 별무리가 보였다.

이런 날에는 나가지 않으면 손해를 보겠지. 늘 그렇듯이, 적당히 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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