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네가 좋아(5)
찰팍거리는 바닥이, 찰랑거리는 물웅덩이를 피해 길을 걸었다.
아스팔트와 철로 가득한 삭막한 도시, 그 속에서 유일하게나마 살아 숨 쉬는 곳이 있다면 아마 공원이 아닐까. 젖은 잎사귀, 까맣게 물든 나무들.
이제는 꽃 하나 없이 초록빛으로 물든, 가로등 아래 벌레와 함께 빛나는 그 것들을 보며 걷는 사이 어느덧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게 있었다면.
역시 제논이었다.
도무지, 아무리, 계속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더라도. 어떻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장 이틀 뒷면 얼굴을 볼 사이였지만, 그 이틀 뒤에 얼굴을 보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프레이가 문제였다. 그래, 프레이가 한 말 때문에.
생각해보면 우습지 않은가, 내가 제논을 좋아한다니.
어깨를 으쓱이며 제논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스마트 워치도 모르던 그 시절, 내가 떨어트린 스마트 박스를 주운 제논과 만난 내 표정을 그야말로 썩어 있었다.
그토록 피하려 했건만, 어째서인지 이렇게 엮여버렸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겪는 제논을 그렇게 돕고.
결국엔 B지구에서 나 홀로 빌런들을 상대해 전개를 비틀었다.
원래의 제논이 겪었어야 할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지우고, 그 자리에는 조금이나마 더 밝게 웃는 제논이 자리잡았다.
뿌듯했다. 내가 한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한 때 소설을 읽으며 슬퍼했던 그 장면이 사라지고, 밝은 장면들이 그 자리에 채워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다시 그렇게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 때까지는, 제논이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그런 넋두리를 중얼거리며, 공원에 한 쪽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시간도 제대로 보지 않은 터라,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몰라도 꽤 한적했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을 정도 였으니.
그렇게 고개를 숙인다. 몸은 그리 움직이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에 이미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아까 끊겼던 상념을 끄집어내어, 다시 과거를 돌아본다.
제전,
헤라 카르멘과 처음 엮인 뒤, 갑작스레 내게 놓인 큰 사건이었다.
동아리는 생각도 안 해봤고, 그렇다고 제전에서 주는 서포트 아이템을 생각해보자니 포기하기엔 애매한.
그런 상황에서 레이마이어를 만났다.
아마 레이 마이어를 몰랐더라면, 지금 쯤 나는 무덤 속에나 있지 않았을까?
제논이 그 많은 위협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의심스러울 만큼이나, 나는 꽤나 힘겨운 싸움을 거듭해왔다.
제전 이후로는 한 번도 널널하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한계까지 힘을 쏟아 붓고, 또다시 한계를 뛰어 넘어 몸을 불태웠다.
그렇게 싸워서 이기거나, 어쩔 때는 진 적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 모든 때에는 항상. 제논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루더즈와 싸우고, 브루노의 불길에 몸이 불타올랐을 때.
제전에서 헤라 카르멘을 베고 땅으로 추락했을 때,
심지어 이번에 마루더즈와 헤라 카르멘이 아카데미를 습격했을 때도.
만약 제논이 없었더라면.
아찔한 상상이 뇌리를 타고 흘렀다.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마 진작에 죽어 있었겠지. 원작의 전개를 비튼다, 같은 상상은 꿈에도 못하고. 지금처럼 프레이와 자일씨의 사이가 원만한 것도 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문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걷는 것이 꽤나 오랜만이라 그런 것 같았다.
늘 걸을 때면, 옆에 제논이나 프레이가 있었으니까.
무거운 짐을 들면 제논이 다가와 들어주고,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제논이 사줬다.
그런 부탁 할 생각도, 한 적도 없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면 제논은 시간이 흘러도 그걸 기억해주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그 외의 모든 것들. 어쩌면 제논은, 항상 내게 모든 것을 맞춰주고 있던 게 아닐까.
“바보 같이.”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제논이 싫어하는 것도 있을 터였다.
제논은 단 걸 싫어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제논은 맛있게 먹었다. 나랑 있을 때라면 언제든지. 웃어주었다.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그런 우습지도 않은 상상을 하면서,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아-
제논.
무슨 생각을 하려 해도, 화제를 애써 돌려 다른 상상을 해보려고 해도.
결국 생각이 그 이름에 닿는다.
뺨이 달아오르고,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몸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자꾸만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끊임없이 피어올라, 귓가에 그 나른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여졌다.
흰 색의 머리카락에 햇빛이 부서져 살랑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곤 옅게 미소짓는 그 장면이.
“...뭘 좋아해야, 좋아해는.”
그냥 대놓고 말하지, 하필이면 자는 척하고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어 심란한 것은 오직 나 하나였다.
제논은 늘 그렇듯, 뇌를 텅 비운 채 별 생각 없이 살고 있겠지.
만약 내가 그 말을 대놓고, 눈앞에서 들었더라면...
뭐, 어쩔 수 없이 받아주지 않았을까.
아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다는 말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
세상에 어쩔 수 없이 히로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모르긴 했지만, 그 것이 양 쪽 간에 모두 존재할 때 성립되는 감정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고백을 받아준다면, 나도, 제논을...
“아이샤?”
이마를 짚은 채 걷고 있던 내 생각을 깬 것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여지고, 나는 눈 앞에 서있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리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
우연이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다.
그냥 날이 좋아서 나온 게 아니던가.
늘 하던 산책, 한 번도 만나본 적니 없어 아예 배제했던 가능성인데.
만난 뒤 그저 놀란 표정을 짓던 아이샤는, 어느새 내 곁에 와 함께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 지, 왜 나왔는 지 일체 묻지 않은 채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걸으며, 나는 아이샤를 힐끔 바라봤다.
얼굴에 깔린 짙은 수심, 무슨 고민 거리라도 있는 걸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어서, 축 처진 눈썹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 보더라도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좋지 않은 기분이 풀어지고, 아무리 화가 나있어도 쉽사리 화가 풀릴 만큼이나.
아이샤를 볼 때면 늘 그랬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주책을 부릴 뿐, 혹여나 이 소리가 들릴까 조심스레 거리를 벌리자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제논, 그 때 병실에서.”
“병실에서?”
“...아니야, 됐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병실이란 단어가 걸렸다.
병실이라, 저번에 무심코 중얼거렸던 말.
너를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을.
혹시 네가 듣기라도 한 걸까.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휘몰아쳤다. 만약 그 말을 들었더라면, 아이샤가 그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더라면.
얼굴이 무너지려는 것을 최대한 막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만약 아이샤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터벅, 터벅.
불규칙한 소리와 함께 이어지던 발걸음 소리는 어느덧 균일하게 맞춰진다. 꼭 서로 짜고 맞추는 것처럼.
터벅.
한 박자에 맞춰지는 발걸음 소리, 균일한 박자가 오선지를 타고 흐르듯 한참 동안 이어졌을 때, 비로소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항상, 생각이 많을 때면 찾아왔던 언덕.
사방이 탁 트여 주변이 훤히 보이고, 하늘을 가리는 나무 없이 오롯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언덕의 끝자락.
울타리를 경계로 도시와 자연이 나뉜 그 곳에서, 나와 아이샤는 서 있었다.
하늘은 흐렸다.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처럼, 찬란히 빛나던 별무리가 그 자리를 잃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은은하게 몰려오는 구름이 달을 가려 우리를 비추던 빛마저 희미해졌을 때, 아이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는 붉은색의 눈이 떨렸다.
파르르, 평소답지 않게 떨리는 그 눈동자를 보며, 그 열리는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일지 깨달았다.
“병실에서...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 정말이야?”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안타까움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 더 멋있게, 조금 더 차려입고, 조금 더 좋은 분위기에서 내뱉고 싶은 말이었다.
비겁하게, 자고 있는 사람을 향해 뱉은 말을 이렇게 듣고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이샤의 눈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내게 대답을 바라며, 이제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도 않은 그 자리에서 아이샤는 서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텐데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부터 할 말이 어떤 결과를 빚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 병실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만약 고백을 한다면 오늘 해야 할 거라고.
만약 오늘 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영 고백할 날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이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나 좋아해?”
“응.”
“...모르겠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이게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고마워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아이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망설임이 묻어나오는 태도, 그 태도에 나는 약간이나마 안심했다.
아예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구나.
그 모습에 용기를 얻는다. 앞으로 평생을,
그리고 평생을 끝내고 다시 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용기를.
나는 지금 가슴 속에 품었다.
단순했다. 나는 아이샤를 좋아했다.
아이샤의 곁에 서서,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었다.
내게만 웃어줬으면 했고, 내게만 약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마음을 표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너를 보면서 무슨 마음을 품는지, 어떤 상상을 하는지, 내가 너에게 무슨 존재였으면 하는지,
그렇게 말하는 게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서서히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거리가 좁혀진다. 천천히, 한 발자국을 내딛어 아이샤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소보다 더욱 반짝이는 아이샤의 눈은, 어쩐지 흐려보였다.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좋아해, 아이샤.”
그 말을 다시 내뱉는다. 처음에는 혼자서 중얼거렸고, 나중엔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 아이샤에게 내뱉은 말을. 이제는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 말한다.
더 이상 망설이지않았음 했다. 그 마음이 오롯이 나를 향했으면 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늘 별을 좋아했다.
하늘에 떠있는 별이, 무수한 어둠 속에 갇혀서도 홀로 찬란히 빛나는 저 별이 좋았다.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특별한 사람들 사이에서 껴서도 그 빛을 발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게는 너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수많은 위험들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게 너였다.
그런 너를, 나는 좋아한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이 말보다 내 마음을 더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게. 너에게 조금이라도 더 와 닿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게.”
하지만 나는 그런 말 따위는 몰랐다.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은 탓일까,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한 마디, 세 음절의 말 뿐이었다.
“너를 좋아해. 정말로.”
흐려졌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새하얗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는 지, 아이샤의 입이 끊임없이 달싹 거렸다.
“어, 어...”
무슨 말을 할까, 그 입에서 나올 말이 신경 쓰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이 분위기에 젖어, 계속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이기적이라 할지도 몰랐다. 상대의 의사는 신경 쓰지도 않는 일방적인 고백이 아니던가.
“자, 잠깐만 제논.”
손을 휘저으며, 아이샤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갑작스런 고백이었으니,
이런 반응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다만 불만스러울 뿐.
“야...!”
뒷걸음질 치는 아이샤의 팔을 잡아당겨 내 앞으로 끌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대답해줬으면 하는 내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 거리, 내가 왜 이렇게 용감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없을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떨리는 호흡이 얼굴에 닿았다.
한껏 커진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기도 잠시, 가까워진 얼굴의 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마가,
콧잔등이,
그리고 마지막엔,
그 입술이 닿는다.
나를 밀치려는 듯, 가슴팍에 아이샤의 손이 닿았다.
밀면 밀려날 생각이었다. 억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차갑고도, 따듯한. 미칠 듯이 쿵쾅대는 심장끼리가 맞닿아 서로의 진동을 전했다.
너도 떨고 있었구나.
부드럽게, 아이샤의 머릿칼을 쓸어내리자 아이샤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서서히. 가슴팍에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조금 씩, 떨어지는 서로의 간격.
막혀있던 숨이 트이고, 그제서야 붉어진 얼굴을 마주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이나 붉어진 얼굴.
방금 자기가 한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지, 입술을 매만지며 멍하니 허공을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 수치심은 온 몸을 타고 순식간에 얼굴로 몰려왔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감돌았다.
열기를 식히고자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아까 보였던 구름도 사라져, 이제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별무리들.
하지만 내가 보았던 것만큼 찬란하다는 생각이들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점 하나처럼, 그렇게 사소하게 보일 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내게 있어 가장 반짝이는 것은, 아이샤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