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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네가 좋아(6) (72/115)



〈 72화 〉네가 좋아(6)

시야가 점멸한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라곤, 얼굴에 닿던 숨결과 입술에 맞닿던따스한 촉감뿐.
그 감각을 느끼면서도 나는 차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내가 들은 고백으로 가득 찼고, 몸은 주변을 둘러싼 몽환적인 분위기에 이끌렸다.

입술이 맞닿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아주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

입술을 살짝 매만지며, 제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둑한 하늘, 가로등 불빛에 은은히 비치는 얼굴은 분명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쭈뼛거리는, 그러면서도 해냈다는는 듯 묘하게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
“...나 처, 처음이었는데.”

그 말을 하는 와중에 내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정말로, 처음이었는데. 전생을, 그리고 이번 생을 통틀어서.
허락도 안 받고,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고백까지 듣고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답해주려고 조금 머리를 식히려고 했는데.

갑자기 끌어당겨서, 서로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그 거리에서, 입술을.

그냥,
그냥 막,
후,
말을 말자.

이미 치이익- 하고 새까맣게 타버린 사고회로 탓에 똑바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이었건만, 그 이후에 이어진 행동 탓에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서.
그저 손을 꼭   고개를 숙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였다.

열기로 가득 찬 머리는 마치 열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밤이 보내는 선선한 바람도, 나뭇잎에 고여  머리에 떨어지는 빗방울도, 되려 열기에 그 차가움을 잃을 뿐.


내게 그리 도움이 되는  같지는 않았다.

“...나도 처음이었어.”
“어쩌라고.”

괜스레 퉁명스런 대답이 튀어나온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제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혹시 마음이 상했을까, 딱히 상처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상에,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 내 모습이 퍽 우스웠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내뱉었을 말들을 지금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니.
볼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나도 대답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멍청이.”

일단 욕부터 하고 싶었다.
그나마 면전에 대고 할 수 있는 욕이란 게 고작해야 멍청이라는  우습긴 했지만,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다가와서...아무튼, 화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제논은 미안하다는  머리를 긁적이며고개를 숙였다.
충동적으로 그랬다며, 분위기가 너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까지 화를 내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은은한 달빛이 부숴지는 그 하얀 머리카락이, 어째선지 강아지의 털 같지 않은가.

“하아...”

그래,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제논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까지 듣고, 심지어 허락도 없이 입술을 훔친 제논을, 그럼에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를 위해서 밤을 지새우고,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요리 못하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밤을 지새워가며 도시락을 만들어주고, 죽을 뻔했던 나를 몸을 던져 구해주고.

거기에  잘생긴데다, 능력 좋고, 이 세상의 주인공인 제논이라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그 적은 사람들 중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늘 싫은  하나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미소 짓는 그 사람을,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맞춰주고 있던 그 사람을.

나는 좋아했다.

“...난 너 미워한 적 없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저번에 했던 말을 사과하는 것이, 항상 생각해 오던 것이었으니까.
네가 밉지 않았다고, 항상 고마웠다고.
저번에 그렇게 말한 것을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말을 꺼내는 것이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항상 고마웠어. 나 때문에 다치고, 죽을 뻔하고. 또 그런데도 내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고마웠어.”
“...알고 있었어?”
“그럼 몰랐겠어? 화상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약간  움직여도 상처가 벌어져서 맨날 앉아만 있는데도 나가서 편의점 갔다 온다 하고, 내가그걸 몰랐겠어?”

화내려 하던  아닌데, 또 높아진 목소리에 시무룩해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제논을 바라봤지만, 제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미소를 지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네.”
“...뭐, 그렇지. 네가 했던 것처럼.”
“나는 좋아서 그랬을 뿐이야.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말했잖아, 나는 너 좋아한다고.”

이제는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뱉는 제논을 보며 실소를 짓기도 잠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제논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도 좋아서 그랬어.”

그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있었다.
너를 볼 때면 가슴이 간질이고, 답답하고,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고, 네가 다치는 게 싫고 가슴 아팠던.
그 모든 감정들이 결국엔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네가 좋아서 그랬다는 말이야.”
“어?”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그렇게 지켜보지도 않았겠지.
그때는 단지 네가 다친 모습이 신경쓰였다는 이유를 핑계 삼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핑계  이유도 없었다.
마음이 가서, 단지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행동했던 거니까.

살짝 벙찐 얼굴의 제논을 바라보며, 그렇게 나는 말을이어갔다.

제논이 했던 고백의 답이자, 어쩌면 내가 하는 고백.

수려한 표현 따위는 몰랐다. 애초에 학교에 간 적도  번 없었으니, 오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는 경험만을 알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만 겨우 아는 수준이었다.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고, 말 보다 나은 표현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런 거는 알지 못해서.

내가 아는 최대한으로, 이 마음을 표현하는 게 전부였다.

“좋아해.”

이 사소하고도 가벼운 단어가, 어찌도 그리 큰 울림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과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아리송한 감정,  것을표현하는 아리송한 말.

내가  사람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지 정확히 콕 집을 수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가장 알기 힘든 감정이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제논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콕 집을 수 없었으니까.
그냥 그 사람의 모든 점을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향해 짓는그 미소가, 언제나 흘러나오는 그 나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그 하나하나가 전부 좋아서, 그렇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하는 건데도.

그렇게  의미를 지니는 말도 아니었다.
과일을 좋아한다, 새를 좋아한다 따위의 말처럼 단순히 무언가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사람을 향할 때면.

언제나 원래의 의미를 뛰어넘어 서로를 이어주는 말이 되었다.

“내가, 너를, 좋아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그 주체를 강조하는 말에 제논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어째 내 입술을 훔쳤던 그 모습과 비교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고백한 사람 민망하게.”
“아, 아니. 그러니까...”

아까 고백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제논은 심각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고백은 어떻게  걸까?
그 때는 나름...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좋아서 뭐라 해야할 지 모르겠어.”
“뭐라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생각했거든.”
“내가 도대체 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를 왜 싫어해.
혹시 내가 그런 행동을 했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막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음...그러니까, 그냥 그랬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막 착실한 그런 사람도 아니고, 수업 시간에는 맨날 자고,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싫어하는데도 맨날 다쳐서 오고, 네가 저번에 울었을 때는...아무것도 못해줬으니까.”

울었다는 그 말에 얼굴이 다시금 뜨거워졌다.
왜 또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지, 조금 잊고 싶은 기억이었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타박하기엔 제논의 얼굴이 너무도 침울 해서,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논, 난 그런 걸로 미워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알고 있어.”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단점까지 전부 좋아한다는 거니까. 나는 네가 겁쟁이어도, 찌질이어도, 외톨이어도, 상종 못 할 쓰레기...면 조금 고민해보겠지만, 네가 그런 사람이더라도 나는 좋아할 거야.”
“......”

애초에, 내가  좋아하게 된 건 너의 그런 점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제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나는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이 정리되면 어련히 따라오지 않을까,

이제는 슬슬 집에 갈 시간이었으니, 그렇게 천천히 걷자 과연 뒤에서 나를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져서는, 이제 내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듯 조금 후련해보이는 표정의 제논이 서있었다.

“미안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은 싫더라.
“...그럼?”

빤히 나를 쳐다보는 제논에게, 나는 텅 빈 손을 흔들어보였다.
이쯤 되면 뭘 원하는 지 눈치 챘겠지.

“...아.”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제논은,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부드럽게쥐었다.
커다란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어지는 그 미묘한 감촉에 흠칫 하기도 잠시, 전해져 오는 체온에 눈을 감았다.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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