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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전학생은 싫어(2) (74/115)



〈 74화 〉전학생은 싫어(2)

 소설 속 세상에 너무도 녹아든 나머지,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소설의 근간이 하렘물이었다는 것.
비록 아이샤의 비중이 굉장히 크고, 나머지 히로인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더블 주인공 장르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하렘물이라는 근간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200화쯤에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외도, 바람.

아이샤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생각하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는데,
막상  상황을 직접 겪을 위기에 처하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고백받고 사귀게 된 게 바로 어젯밤인데, 다음날 아침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만약 작가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이따구로 스토리를 짜니까 소설이 망하지 않냐며, 빨리 히로인이 되기 전에 쳐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소설을 봤던 유일한 독자가 나였고, 이제는 아이샤가 나였다.
게다가 아직 리디아가 제논에게 특별히 무슨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고.
가물가물한 원작의 기억을 조심스레 떠올려보자 리디아가 제논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한 것은 여름방학 즈음이었다.

한 2주 정도 뒤라는 건데, 아마 그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원작대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었다.

특별한 일이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무언가 탁 하고 떠오르진 않았다.

일단은 제논을 믿자, 설마 리디아 앞에서 헤벌레하고 웃겠어.
어제 고백하고 사귀었는데. 아직까지 리디아라는 여자애를 적대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이런저런 인간관계를  빼고 실력만 본다면, 에드윈 카르멘을 상대할 때 필요한  리디아였으니까.

“...이능이 치유계 쪽이었나, 아니. 복합 이능이었지.”

성국에서 온 학생, 그녀의 이능은 성녀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이나 특수했다.
공방일체, 단지 치유라는 방향으로만 치우쳐지지 않은 그녀의 이능은 단순히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이능이었다.

총 3가지의 가호. 복수, 보호, 그리고 희생.

단지 범용성만 따진다면  이능을 가뿐히 뛰어넘는 그런 사람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까.
위력을 떠나 치유하는 이능만 봐도 이 세상에 극히 소수만 지닌 이능이었으니.

반을 향해 인사를 마친 리디아는 쭈뼛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필이면, 그 빈자리가 제논의 뒷자리인 건 또 뭐람. 제논의 뒷자리에 앉으며 얼굴을 붉히는 게 영 거슬렸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저렇게 금방 반하면 마음이 금세 식어버리기 마련이었다.
나처럼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쌓은 마음이 오래 가는 거였고.
제논을 힐끔 쳐다봤지만, 아직 제논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을 뿐.

“왜?”
“...아니, 그냥.”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냥 웃는 것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몸은 꽤나 과하게 반응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시선을 돌리자 옆쪽에 있던 프레이가 쿡, 하고 웃어 보였다.

“그렇게 좋아?”
“...뭔 소리야.”

고작 웃어주는 걸로 기분이 좋아진다니, 나는 그렇게헤픈 여자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이자, 프레이는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한심하다는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칠판으로 시선을 향했다. 늘 듣는 수업, 하지만 이론 수업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들어온 내용이  귀로 빠져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여름 방학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에 수업 내용이 영양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듣기는 해야 했다.
의외로 나는 모범생에 가까웠기에,  맨날 수업 시간에 퍼자는 제논 때문이라도 내가 들어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수업시간에 그렇게 자는데 밤에도  수 있는 걸까.
옆에 엎드려 자는 제논을 힐끔 바라보며, 그 용기에 감탄했다.

입학식날 제적 당할  했으면서, 심지어 예전에 나한테 이제 수업 열심히 듣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뒤로 며칠 잠잠하더니 이제는 그냥 자기 멋대로 사는 것 같았다.
마루더즈가 학교를 습격했을  간부 몇 명을 제압했다고 추가 점수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걸 믿고 이러는 걸까.

“에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젯밤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심지어 그 고백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제논을 많이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제는 그게 당연한  마냥 머릿속에 그 생각이 가득 들어찼다.

“너는 알까.”

내가 이렇게나 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자고 있는 제논의 머리카락을 주욱 잡아당기며, 나는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

수업이 모두 끝나자, 제논은 그제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멍하고, 나른한 얼굴.
아직 눈꺼풀이 무거운지 반만 눈을 뜬 채로 두리번거리던 제논은 이내 나를 보더니 시선을 멈추었다.

“...아.”
“왜 그래?”
“또 자버렸네, 미안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무어라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아까 잠도 제대로 못잤다고 했으니, 뭐 수업이야 내가 들어서 알려주면 되는 거니까.

“미안하다고 안해도 돼. 잘 수도 있지.”
“...안 싫어?”

싫다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제논이 하는  중에서 딱히 싫은 것은 없었다.
설령 찌질하게 울더라도, 물론 제논이 그럴리야 없겠지만.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모든 모습을 좋아하겠다고 말하는 게 고백이었으니까.

자는 것도,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찾는 것도.

전부 좋았다.

직접 말로 꺼내기가 조금 그래서 그렇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제논을 바라보자 제논은 미안한지 은근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안 싫어.”

별 생각 없다는 듯 툭, 하고 내뱉은 말에 밝아지는 제논의 표정을 보자 입꼬리가 씰룩였다.
저렇게 표정 변화가 빨라도 되는 거야? 하지만 표정 변화가 빠르다는 건,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는 게 아닌가. 그런 면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씰룩이면서도,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여름방학이 끝나는 시점, 그러니까 원작에서 2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까지는 아무 걱정 없이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리디아라는 애가 나타나는 바람에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설마, 혹시, 이런 생각이긴 했지만.
원작에서의 제논은 아이샤랑 사귀는 와중에서도 다른 히로인들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았던가.

생각하다보니까  어이가 없었다.
아니,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도대체 왜 고백을 받아줬던 걸까?
만약에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아마 크게 상처받았을 것 같은데 원작의 아이샤는 또 그런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가 소설 속으로 빙의한 것보다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아닐까.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해봐도, 자꾸만 아까 리디아가 지었던 표정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얼굴을붉힌 채, 제논의 뒷자리에 앉았다고 잔뜩 기뻐하던  표정이.

그래, 아마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예 내 선에서 끊어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게 향하는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직 그 애정이 나만을 향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만약 제논이 다른 여자와 웃으며, 사랑을 속삭인다면.

 장면을 상상하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 것만 같아서,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역시나, 어릴 적의 기억 탓일까.
내게 향하는 애정에 대해 나는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고 있었다.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나만을 좋아해주었으면, 고백을 받는 그 순간부터 내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그 욕망이 쉴 새 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좋지 않은데.”

솔직히 좋은 감정이라고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이 감정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옳은 방향으로 이 마음을 풀어야 했다.

믿자.

그 말을 속으로 중얼 거리며, 내 옆에 앉은 제논을 바라봤다.
이렇게  옆에 있었다. 나를 좋아해준다고 말한 사람을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줄까.
멍하니 있는 제논의 손을 잡아 당겨 조심스레 내 손을 포개었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제논이 흠칫, 하고 놀라긴 했지만. 이내 볼을 붉힌 채 손을 내주었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손을 잡은 거라곤 기껏해야 몇 번 안됐지만, 체온이 맞닿는 그 미묘한 감각은 가슴 속에 있는 불안감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제논.”
“...왜?”
“너 나 좋아해?”

의미 없는 질문 이었다.
어제 그 답을 들었음에도, 또 그런 질문을 하다니.
어쩌면 제논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어쩌면 매일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몰랐다.
한마디, 말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 그 말이 주는 안정감은 마약과도 같았으니까.

내 질문에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제논은, 이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라도 잡으려는 건지, 괜히 허공을 쳐다보며 말하는 주제에 귀는 또 엄청 붉어져서.
그 모순적인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왜 웃어?”
“아니, 그냥.”

이제는 얼굴까지 완전히 붉어져 항의하듯 말하는  퍽 귀여워 보였다.
세상에,귀엽다니. 프레이가 이런 모습을 보면 내 앞에서 토악질을 할지도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내 마음을 의심했는데,  번 딱 정해지고 나니까 이렇게 대담해진  모습이 신기했다.

“...그래서 너는?”

당황하며 뭐라 하던 제논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인 걸까, 그런 마음에 나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해.”

내가 쥐고 있던 손이 순간 떨렸지만, 나는 무시한 채 계속 손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들었다간 제논과 시선을 마주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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