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전학생은 싫어(4)
고백이란, 그 사람이 일평생 지닐 용기를 전부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단 한번, 내가 품고 있던 마음을 그저 말로 표현해내는 것과 다름없을 터인데. 왜 그리 진이 빠지는건지.
하지만 분명히 얻은 것들이 있었기에, 몸에 힘은 빠졌어도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다.
아이샤라는 사람을 얻었다. 그 입술이 맞닿는 감각을 생각하면, 행복감으로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으면, 일순간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현상을 겪는다던데.
지금 내 상태가 꼭 그랬다.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세상이 반짝였다.
하늘 위에 걸려 반짝이는 별무리도, 태양빛을 흠뻑 머금어 빛을 발하는 달빛마저도 이리 반짝이진 않을 터였다.
몇 없던 광원의 빛깔은 모두 흐려져, 내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은 단 한 사람이 되었다.
“...아이샤.”
처음에는, 그저 이름을 알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 다음에는 번호를 얻었다는 것에, 그 다음에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너를 구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살아서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에서는 신음과도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오늘은 잘 수 없으리라.
집에 데려다주면서도 놓지 않았던 손이, 거기서 전해져오던 따스한 체온이. 아직까지 심장을 달구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았다.
물론 이제 막 사귀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몇 개나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그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마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보면, 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입꼬리가 쉴 새 없이 씰룩였다.
-좋아해.
아이샤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니,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 혼자 품은 일방적인 마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고백을 하면서도, 거절 당할 각오까지 분명히 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나 보류가 아닌, 머뭇거리면서도 마음을 허락해준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쩌면 내가 고백을 하게 된 이 상황마저도, 처음부터 꿈이었던 게 아닐까.
뺨을 스쳐가는 바람도, 나를 바라보며 일렁이는 저 붉은 색의 눈동자도.
사실 그렇지 않은가, 아이샤와 이 공원에서 만난 것도 어쩌면 내 상상이 빚어낸 산물일 수도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만날 리가 없지 않은가.
마치 운명처럼.
나는 운명이라는 말이 싫었다. 마치 사람의 인생을 정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꼭 그렇게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말, 순응해라.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감정이 격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샤와 만나, 고백을 듣게 되는 이 우연이 운명이라면.
나는 처음으로 운명을 믿어보고 싶었다.
겨우 잠에 들어 눈을 떴을 때, 그제서야 나는 내가 거닐었던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이샤의 손은 따듯했고, 입술을 부드러웠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어쩌면 그 시간이 평생이 될지언정.
내가 아이샤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오딘 형한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사실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맨날 너는 안될 거라며, 아이샤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거라며 저주하던 그 얼굴이 눈에 선했다.
뭐,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연락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이제 슬슬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었으니까. 직접 가서 말하는 게 조금 더 재밌지 않을까.
수업 시간에는 자지 않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는 제적 따위 당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랬던 건데.
이래저래 사건을 겪으며 제적과 멀어지자 금세 또 헤이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자면 아이샤가 수업 내용을 알려줬으니까.
어쩌면 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조금 괘씸하게 생각하려나.
그런 생각에 슬쩍 웃으며 교실에 들어가자, 이상하게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시간이 7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문이 열려있던 게 다행이었네. 어쩐지 하늘이 어둑하더라니.
그 어이 없는 상황에 웃기도 잠시, 내 몸은 홀린 듯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느새 나는 한 자리 앞에 서있었다.
여기가 아이샤의 자리였던가.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음습한 욕망을, 나는 무시하지 못했다.
의자는 차가웠다.사람이 앉은 지 꽤 됐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생각해보면, 저번에 이 자리에서 아이샤가 울었던가.
내 잘못이었다. 내가 약해서, 그래서 다쳤다. 원래라면 다치지 않았어야 했다.
그까짓 불에 휩싸인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화상을 입더라도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로밀려오는 쓴 맛에 입맛을 다시며,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아이샤를 걱정하는 건 단지 나 혼자의 감정이라 생각했다.
아이샤는 나를 그리 신경 쓰지도 않을 거라며 남의 마음을 쉽사리 단정지어버렸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이 자리를 볼 때면, 얼굴이 망가질 만큼이나 울었던 그 때의 기억이 생각났다.
너의 그런 행동이 싫다며, 네가 밉다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던 그런 모습에 실소가 지어졌다.
입맛이 썼다.
의자는 내가 앉는 의자보다 훨씬 높았다.
아마 키차이 때문인 걸까. 의자에서 살짝 내려와 무릎을 굽히자, 그제서야 아이샤가 보는 눈높이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이런 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있던 걸까.
고개를 돌리면, 옆자리에 있는 사람의 몸도 보일 법했다.
옆자리, 옆자리라.
아이샤의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던 것쯤은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도 남자였던가.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제는 연인 사이인데, 그리 쉽게 옆을 허락해도 되는 지 진지하게 고민되었다.
아무리 여기가 아카데미고, 수업을 위한 장이 교실이었지만.
“흠.”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조금 추잡한 욕망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아이샤의 곁에 있고 싶었다.
이제는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기이한 욕망.
다시는 그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다시는 저번처럼 혼자 다른 이와 맞서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 옆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는 아이샤 하나였지만, 아이샤는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항상 아는 사람만 지킨다고 말하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봤을 때 아이샤는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끔찍이 꺼려하는 게 눈에 보였다.
언제나, 사람이 있다면 이능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사용하고 공세대신 방어적인 태세를 취했다.
‘지킨다’라는 것이 머릿속에 깔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샤 만큼 히어로에 어울리는 이가 있을까.
그렇게 떠올릴 때면, 내가 그녀의 곁에 있어도 될지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비록 아이샤와 있을 때면 종종 잊곤 하지만, 내가 끝에 추구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던가.
어둡고 암울한 단어였다.
그 과정이 어떻든, 그 것이 이뤄졌을 때의 결과가 결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이대로, 이대로 아이샤와의 관계가 이어진다면.
아이샤도 그 과정에 엮이게 될까.
헤라 카르멘과 엮이긴 했지만, 애초에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을 그리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번에 빌런으로 잡혀 들어가 엮인 것에 사과는 하겠지만,
그저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하지 딱히 신경을 쓰지도 않을 터였다.
그가 빌런을 끔찍하게도 싫어한다는 건 그저 대외적인 이미지에 불과했으니까.
필요하면 타협한다. 설령 그게 빌런일지라도.
사람들이 그런 가능성에 일말의 의심조차 품지 않도록 관리한 게 현재 그의 이미지였으니.
그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 지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일에 아이샤가 엮이게 된다면, 내가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역시 안 돼.”
어디까지나 연인으로만 끝나야하는 관계다.
자신 집안과 엮인, 그런 질척한 관계까지 아이샤가 알게 되길 원치 않았다.
헤라 카르멘, 부디그녀가 엮이는 것이 그 선까지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어...거기 아이샤 자리 아닌가?”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래, 아마도 아이샤 옆자리가 이 사람이었던가.
아이샤를 떠올리며 생겨났던 훈훈한 감정은 사라지고, 다시 지독하게 차가운 감정들이 자리 잡는다.
호의를 보여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샤까지만, 다른 이들에게 구태여 친절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딱히 노려보지는 않았지만, 눈매가 좁아지자 앞에 서있던 녀석이 흠칫, 하고 놀랐다.
“...그래서?”
“어? 아, 아니. 거기 아이샤 자리라고.”
“알아.”
알고 있으니까 앉아 있지.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녀석은 어쩐지 나를 계속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앉아있는 게 아이샤에게 껄끄러운 일 일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런 녀석에게 나는 넌지시 말을 던졌다.
“나랑 자리 바꾸자.”
“자리를...?”
“싫어?”
입가에 미소를 지우며 묻자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자리가 원래 어디였는지도 몰랐으면서, 빈자리를 찾아 앉는 꼴이 퍽 우스웠다.
그렇게 아이샤의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하곤, 다시 교실 밖으로 나왔다.
아마 조금기다리면 아이샤가 오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내 발걸음은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