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전학생은 싫어(5)
아이샤가 오늘 보여준 모습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파격적이었다.
분명 어젯밤에 고백한 걸로 기억하는데,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정말 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손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왔던 것 같은데.
“..아이샤?”
“쉿, 가만히 있어.”
검지를 입가에 댄 채, 슬쩍 미소 짓는 아이샤의 얼굴을 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저번에 허락도 없이 입 맞춘 것에 대한 복수 인 걸까?
머리가 새하얗게 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 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내 품에 안긴 아이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몸에 눌리며, 그 체온이 한없이 전해져왔다.
단지 손을 잡고 있는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온 몸으로, 그래. 온 몸이 닿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내가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인지, 뇌가 이제야 인식하고 반응을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팍에서 유독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이샤는 여자였다, 나는 남자였고. 몸이 반응하려는 것을 최대한 억누르며,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쩌면 호들갑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샴푸향이 코앞에서 전해져 오는 것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고백을 몇 번 더 하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손을 잡는 것보다 몸이 조금 많이 닿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전해주는 충격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진도가 너무 빨랐다.
“자, 이제 됐다.”
그렇게 너무도 긴 시간이끝나고, 아이샤가 내 몸에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쿵쾅대는 심장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아이샤가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라며 속삭였다.
“...아니야.”
고마운 건 오히려 내 쪽이 아닐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와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손을 잡고, 음.
생각해보면 입을 맞추긴 했는데.
그래도 그건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거였으니까.
갑자기 이렇게 끌어안을 줄은 몰랐다.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는 뺨을 문지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더워서.”
“하긴, 이제 여름이니까.”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시선을 돌리자 끝이 붉게 물든 귀가 보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래, 여름이니까.”
그러니까 더운 거겠지. 사실은 너 때문이지만.
뒷말을 그렇게 삼킨 채, 교실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도 미행을 많이 다닌 탓에 이런 기척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누구려나, 내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진 않아 뒤를 돌아보자 아까 한 번 보았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마 성국에서 왔던 전학생이라고 했나.
“음, 안녕?”
“왜.”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그 모습이, 영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초면,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인데 무어라 할 수는 없었으니.
한숨을 내뱉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내 이름은 알지? 네 이름 좀 알려줄...”
“네 이름 몰라.”
아까 소개할 때 성국에서 왔다는 건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이샤를 쳐다보느라 이어지는 말을 듣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리디아라고 해. 성국에서 왔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곤 성국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샤가 나를 끌어안아 달아올랐던 열기는 그 덕에 순식간에 사라지긴 했는데.
“별로 안 궁금해.”
솔직하게 내 심정을 말해주자, 리디아의 얼굴에 자리 잡은 미소가 사라졌다.
“뭐라고...?”
“나 가볼게, 네 이름이 리디...뭐 아무튼. 안 까먹을 테니까.”
손을 휘휘 젓자, 그 여자는 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휙 돌아섰다.
이제 화장실에 갈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반으로 들어가자 한 쪽에 프레이와 함께 있는 아이샤가 보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 아까 내게미소 짓던 성국에서 왔다는 여자가 보여줬던 표정과는 달리 꽤나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뭐, 그게 아이샤의 매력이 아닐까.
다시금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렇게 아이샤에게 다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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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제논이 반에서 사라지고, 그제서야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리디아한테 선을 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그런 의미를 담아 한 행동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포옹이라니.
몸을 감쌌던 그 감촉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흠칫, 하고 몸이 떨렸다.
“단단했지.”
제논의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예전에 배를 조금 만져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닿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렇게 먹고도 그런 몸을 유지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 낫지.
나중에 내가 일일이 식단 관리까지 하려면 빠듯할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샐러드 같은 걸 먹어야 한다면 그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제논이 먹는 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양배추만 한 끼에 한 박스씩 써야 할 게 뻔했다.
그럼 식비는 누가 벌지, 뭐...히어로가 돈을 잘 벌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식비로 왕창 써버린다면 생활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흠.”
아이샤의 삶을 살게 된 이후로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피부가 상하는 일도 없었고, 심지어 머리카락도 항상 일정한 길이를 유지했다.
혹시나 싶어 잘라봤지만, 다음 날이 되자 곧바로 길어지는 게 아무래도 내 모습은 이 상태로 평생 가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늙는 게 아니라면 아마 얼굴이 변하는 일은 없겠지.
그런 거면 그냥 내가 먹는 양을 줄여볼까.
먹어도 살이 안찌니 최근에는 들어가는 대로 먹긴 했다.
프레이가 그래도 되는 거냐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눈에 선했다.
제논한테 먹는 양을 줄이라고 말 하자니,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안 그래도 밥 먹기 전에는 항상 배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앤데.
“무슨 생각해? 아니, 대충 알 것 같네.”
“...아, 프레이!”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리자, 상당히 언짢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프레이가 서있었다.
얘는 또 표정이 왜 그럴까, 늘 그렇듯 프레이를 꼭 껴안자 어째서인지 내 몸을 밀치며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 어제 고백 받았고. 이제 사귀니까 좋아 죽겠다는 건 알겠는데.”
“별로 좋아 죽는 건 아니거든.”
이게 다 리디아를 견제하려고 하는 건데, 딱히 좋아 죽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뭐, 제논이 해달라고 하면 포옹 정도야 해줄 수는 있겠지만.
아니, 뭐...버드 키스 정도는 어떻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한 번 해봤으니까.
그 기억을 떠올리자 또 얼굴이 붉어졌다.
“...봐봐, 너 중증이라니까.”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대놓고 안아도 되는 거야? 여기 교실이잖아. 좋은 건 알겠는데, 조금 자제하는 건 어때.”
“그게 다 사정이 있어.”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트는 프레이에게 리디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성녀라는 얘기랑, 원래 성격을 뺀 나머지만.
그 얘기를 들은 프레이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더니,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샤, 너 왜 이렇게 귀여워.”
갑자기 몸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벼대는 프레이를 멍하니 쳐다보자, 프레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벌써 질투하는 거야? 어? 진짜...내가 남자였으면 벌써 뺏었을 텐데. 제논은 맹해서 이런 거 모른단 말이야.”
“걔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 수업을 안 들어서 그렇지, 알려주면 시험은 어떻게 잘 본단 말이야.”
“벌써 편드는 거야?서운하다.”
“아, 아니. 편드는 건 아닌데.”
멍청하다고 하니까 그렇지, 그 말을 덧붙이자 어쩐지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딱히 편을 든 건 아닌데, 그냥 걔가 멍청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알려줄 때는 안 자고 잘 듣는단 말이지.
그렇게 프레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 지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 아까 보니까 전학생이 제논하고 뭐 얘기하던데.”
“...뭐?”
“대충 보니까 관심 있어 보이던...괜찮아?”
“안 괜찮아.”
리디아가 제논을 만났다, 라.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일부러 껴안기까지 했는데, 기어코 제논하고 말을 하려고 하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선을 넘으려고 하는 걸까.
그 여자의 추잡한 욕망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저런 여자를 갱생시켜 히로인으로 받아들인 원작의 제논은, 도대체 어떻게 갱생 시킬 생각은 할 수 있던 걸까.
“제논은 어떻게 했는데.”
“몰라, 말 좀 듣더니 혼자 휙 가더라.”
“...음.”
그런 대처는 마음에 들었다.
딱 선을 그어야지. 나는 여자 친구가 있다.
음, 칭찬해줘야겠다.
마침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논이 보이길래, 나는 총총거리며 다가가 제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했어. 진짜 잘했어.”
“...어, 뭘?”
의아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나를 제논이 빤히 쳐다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풍성한 백발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마음 같아선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그건 조금...많이 부끄러우니까.
지금은 딱 이 정도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