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1)
“그만해...”
“이제 끝.”
제논이 툴툴 거리며 나를 흘겨봤을 때, 그제서야 나는 제논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여기서 더 한다면 진짜 싫어하겠지.
“도대체 뭘 잘했다는 거야?”
“리디아가 말 건 거 무시했다며. 그거 말하는 거야.”
옆에서 프레이가 대꾸하자 제논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무시한 게 왜 칭찬받을 일인 건지 모르겠다는 듯 내가 한껏 쓰다듬었던 머리를 정리하며, 제논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잘한 건가?”
“잘했지, 걔 뭔가 이상해보이니까.”
“너도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구나?”
나야 원작을 읽었으니까, 리디아가 뭐하던 사람이고 무슨 생각하는 지 대충 알지.
프레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프레이는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걔 눈이 이상해. 뭐라 해야 할까. 꼭 예전 아빠 보는 것 같아.”
“자일씨?”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프레이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사람이 뭔가에 미쳐 있으면 그런 눈빛이 나오거든. 한 몇 년 질리게 봤더니 이제는 보면 딱 견적이 나와. 어떤 사람이 미쳤는지, 아님 평범한지.”
“...날카롭네.”
하기야, 자일씨가 요 몇 년 간 해온 건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업적이었으니까.
그걸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프레이의 눈이 제일 정확하지 않을까.
미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갱생이 가능한 광인이라는 거겠지.
제논이 어떻게 저걸 갱생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정신 상태를 지닌 사람을 구제하려면 정말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고서야 힘들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쳐낼까.”
에드윈 카르멘을 상대하기 위한 전력이고 뭐고 그냥 미리 싹을 잘라두는 게 맞을까.
저런 타입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예, 올라올 생각조차 못하도록 밟아 놓는 것.
앞으로도 리디아 외의 히로인들은 계속 나올 터, 하지만 그중에서 유독 파탄난 성격을 지닌 것은 리디아 하나 뿐이었다.
그녀의 이능인 가호가 탁월하기는 한데...구태여 끝까지 함께 갈 이유가 있을까.
볼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해봤지만 당장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애매했다, 에드윈 카르멘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봤던 마지막편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
다만 그 힘이 레이 마이어를 상회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마이어씨...라.”
생각해보면 이능의 강화도 어서 빨리 진행해야 할텐데.
여신의 눈물을 흡수한 뒤로 이능을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영구적인 강화도 진행됐을 터, 한 번 쯤 실험해보고 싶긴 한데 말이야.
“무슨 고민있어?”
“아니, 이제 이능을 좀 다루는 걸 연습해야하지 않나 싶어서.”
“아이샤, 이미 넌 프로 히어로 급이잖아. 이제 1학년인데 너무 급한 거 아냐?”
마치 누군가한테 쫓기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는 프레이의 말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나는 쫓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결말, 에드윈 카르멘과의 싸움에서 누가 어떻게, 얼마나 다칠지. 또 누가 죽을지 나는 하나도 몰랐다.
그나마 가진 장점이라고는 원작의 전개를 아는 거였는데,
이제는 너무도 틀어져 버린 전개 탓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마루더즈가 트라이앵글 행사때 아카데미를 습격한 일도, 원작에서는 없던 일이 아닌가.
덕분에 헤라 카르멘을 조금 빨리 잡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라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역시 내가 강해지는 수 밖에 없었다.
7번 검.
그 경지를 떠올리며, 에드윈 카르멘을 상대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닿아야할 경지임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제논, 마이어씨한테 갈래?”
“...뭐, 나도 갈 생각이었으니까.”
“나도 갈게.”
프레이가 던진 말에 나와 제논은 눈을 크게 뜬 채 프레이를 바라봤다.
갑자기 너는 왜?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프레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소와 별 다를 바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동아리 탈퇴했거든.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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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렇게 오랜만에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이 동아리에 받아달라는 말인가.”
치이익-
얼마남지 않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비며, 마이어씨는 실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어이가 없겠지. 당장 방금까지만 해도 우리가 저런 표정을 지었는데.
아카데미에서 동아리 탈퇴란 그리 간단히 여겨지는 행위가 아니었다.
들어가는 것 자체는 자유로웠지만, 나가는 절차는 무척이나 까다로운데다 나중에 낙인처럼 남을 수도 있었기에 쉽사리 선택하기엔 너무리스크가 컸다.
그럼에도 선택했다는 건, 프레이 만의 이유가 있겠지.
마이어씨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먼저 나가버린 프레이를 생각하는 지, 문 쪽을 바라보던 마이어씨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아. 받아 줄수는 있지. 일단...그 친구가 가입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아이샤, 축하한다?”
“네?”
축하한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마이어씨가 나와 제논을 힐끔 살피며 입을 열었다.
“사귄다며.”
“아.”
“알고 계셨네요.”
“뭐, 이제 아주 대놓고 ‘저희 사귀어요.’하고 다닌다니까. 교수 귀로 들어올 수밖에 없지. 덕분에 10만원 벌었어.”
갑자기 10만원을 벌었다면, 뭐 내기라도 한 걸까.
자랑스럽다는 듯 품 속에서 지폐를 꺼내 흔들던 마이어씨는 이내 턱을 매만지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 일단 축하는 축하고. 사귀는 너희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내가 예전에 알던 어떤 사람들이 떠올라서 말이야.”
“어떤 사람들이요?”
“...뭐, 그건 말해줄 수 없긴 한데. 너희랑 비슷한 사람들이었거든. 아주 서로 좋아 죽고 못 살던 애들이라, 옆에서 보다가 내가 뛰쳐나올 정도로.”
막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닌데, 입술을 삐죽 내밀자 마이어씨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나저나 옆에서 봤을 정도면, 마이어씨의 친구라도 되는 걸까.
레이 마이어의 과거는 원작에서도 나온 적이 없어서 꽤 관심이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 마이어씨를 바라보자 그녀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었지. 내가 탑히어로가 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사이였어.”
“엄청 오래 전이네요.”
“그렇지, 한 30년 전인가. 둘 다 이능을 다루는 실력이 뛰어났지. 나만큼은 아니었어도, 둘 다 내가 없었으면 학년 탑쯤이야 거뜬히 차지할 만큼이나.”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알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점이 있다면 마이어씨가 말하는 저 친구들이, 지금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
“둘은 친했어. 한 쪽은 틱틱 거리면서도 다른 한 쪽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대놓고 좋아했지. 언제 사귀는지가 학교 전체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이어졌을 때는 모두가 축복했어.”
어쩐지 나랑 제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걸까.
다시 한 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마이어씨는 피어오르는 연기에 시선을 두었다.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연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프로 히어로가 되고, 두 사람은 결혼까지 했지. 아주 좋아 죽더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진짜 사람이 너무 기쁘면 반쯤 미치는 것도 알게 됐어.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지, 둘이 물고 빨고,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어.”
“...그럼.”
“여명 전투.”
그 단어를 언급한 순간 나를 제외한 프레이와 제논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뭐지? 이 세상의 자세한 것을 정확히 몰랐기에, 그저 수업시간에 배웠던, 아주 큰 전투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에드윈한테 탑히어로 자리를 넘겨줄 때 있었던 전투. 그 둘은 여명 전투에서 선봉을 맡았지.”
“선봉이라면...”
“그 둘이라면 살아남을 거란 판단이었겠지. 충분히 강했고, 여태껏 나왔던 탑히어로들과 비견될 정도로 이능을 다뤘으니까. 내가 상부였어도 그런 판단을 내렸을 거야.”
“그럼 두 사람은...”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마이어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눈이었지만, 오늘 따라 그 눈동자가 유독 떨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도대체 왜? 어째서 나에게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비눗방울처럼.
마이어씨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염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젖어들 것만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이어씨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아이샤.”
“정말로요.”
“두 사람은...죽었어. 내 실수였지. 상대의 이능력자들이 전부 제압된 것이라 판단했어. 하지만 아니었고, 지친 두 사람은 이능이 폭주한 것에 휩쓸려 그대로...”
“그래서 그 근방이 폐허가 됐구나.”
제논이 입을 열자, 마이어씨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였어, 여러 의미로. 잃고 싶지 않았고, 늘 내 곁에서 행복했기를 바라던 사람이었지.”
어두웠던 표정이 살짝 풀리고, 마이어씨는 나와 제논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희를 보면 그 사람들이 떠올라. 서로 죽고 못 사는 것도, 서로를 지켜주려 그 난리를 피우는 것도. 자꾸만 겹쳐 보여서, 마음이 늘 좋지 않아. 너희들이 입원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 앉는기분이야. 수명이 깎인다는 게 이런 걸까 싶어."
후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허공을 바라본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죽지 마라. 적어도 내가 살아있을 때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일만 겪고 살았으면 좋겠어. 이제 시대 뒤편으로 넘어가는 늙은이의 주책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너희를 보며 사는 나로썬 늘 걱정이다.”
그런 말을 내뱉은 마이어씨는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 아까부터 그랬지만, 나를 볼 때마다 왜 저 눈동자가 일렁이는 걸까.
마치 내게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녀가 말한 부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마이어씨는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아이샤. 너한테 해줘야 하는 말이 있어.”
“저한테요?”
“아까 여명 전투에서 죽었다는 두 사람."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마이어씨가 이어서 내뱉은 말은.
내 표정을 딱딱히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두 사람은, 아마도 너의 부모님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