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2)
“...잠깐만요.”
갑자기 나온 충격적인 말은,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치 태엽이 돌아가다가 멈춘 인형처럼 휘청이던 몸을 잡아준 건 제논이었다.
“부모님이요?”
생각했다. 원래, 그러니까 전생의 부모님은 아닐 거라고.
아마 이번 생에서 아이샤 이리안의 부모님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두 사람은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태어난 거지? 여명 전투가 딱 내가 태어난 때 쯤에 일어난 전투긴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그 때 딱 태어났다 하더라도 갓난아기의 몸이었다. 누가 나를 돌본 거지.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던 과거, 아이샤는 어렸을 때부터 쭉 혼자였다.
누구의 지원도, 그렇다고 돌봄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왔던 게 아이샤의 어릴 적이었는데.
부모님이 여명 전투에서 죽었다니. 다시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제가 여명 전투 전에 태어났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여명 전투 전에 태어난 게 아니니까.”
“그럼 더 말이 안 되잖아요. 부모를 잃은 갓난아기가 어떻게 혼자서 살아남아요!”
“여명 전투 직후에, 아마 네 부모님은 살아있던 거겠지.”
“방금은 죽었다고...”
“어디까지나 추측이야. 그래서 나도 확답을 내리지 못해. 하지만 네 성씨가 계속 걸려. 이리안이라는 성을 가졌으면서, 그 시기에 아이를 낳은 사람. 몇 달 동안 찾아봤지만, 그 두 사람 밖에 없었으니까.”
그 두 사람이 도대체 뭐길래. 전생에도, 그리고 이번 생에도.
내게 부모라는 이름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그게 운명이었고 그냥 순응하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면,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힘이 닿는 대로 알고 싶었다. 살아 있는지, 아니면 정말 죽어버린 건지.
나를 낳아주었다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건 너무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죠?”
“여자는 샤론, 남자는 아이크. 성씨는 둘 다 이리안이야.”
결혼했으니까, 그렇게 덧붙인 마이어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책임하시네요.”
“...그래도 너한테는 알려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네 성씨가 정말로 ‘이리안’이라면 그 두 사람이 부모님인건 거의 확실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요?”
“없어. 다른 차원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하기야, 그녀는 전대 탑히어로였다.
히어로 총연의 꼭대기에 있었던 그녀가 얻지 못한 정보라면 아마 이 세상에 없는 정보가 맞을 터.
“혹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단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없어요.”
예전에, 아마도 제전이 끝나고 꿨던 꿈이 얼핏 떠오르긴 했지만 그게 어렸을 적의 기억이라고 확신을 가지긴 힘들어서 그저 고개를 저었다.
폐허에 앉아있던 어린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부르던 한 여자.
그 사람이 내 엄마라도 되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자기 받아들여진 정보들이, 여태껏 내가 겪어왔던 기억들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미안해, 아이샤.”
“...탓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말대로, 마이어씨한테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걸 알려줬다는 거에 고마워해도 모자를 판에, 구태여 욕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무언가였다.
그저 이름만 들어봤던, 남들이 해봤다던 그런 경험은 겪지도 못한 채 내게는 단지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그런 기억.
아직도 불길에 휩싸이는 그 표정이 눈에 선했다.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리라,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 그렇게 결심했건만.
다시 내 삶에 나타난부모님은 또 이름만 달랑 남긴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번엔 손조차 뻗지 못했다.
이능이 폭주한 것에 휩쓸렸다니, 내가 태어났다는 건 그 이후로 살아있었다는 얘기겠지만. 지금도 살아있긴 할까.
힘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담당실 문 밖으로 나섰다.
머리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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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저 편에 있는 어둠에 삼켜져, 이제는 희미한 빛만을 남긴 채 사라진 태양.
희끄무리한 별무리가 보이는 하늘은 퍽 예뻐 보였다.
하루에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기기는 힘든데, 리디아가 전학온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건만.
마이어씨가 던진 ‘부모’라는 말은 아프다 못해 머리를 칼로 쑤셔대는 것만 같은 통증을 전해주었다.
어릴 적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 자그마한 잔재조차 없이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그야, 나는 그저 빙의했을 뿐이 아닌가.
빙의 이후의 기억이라면 모를까, 그 이전의 기억은 원작에서 보았던 몇몇 말고는 아예 비어있었다.
애초에 내가 꿈에서 봤던 것이 기억인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하아...”
차라리 그런 꿈을 몇 번 더 꾼다면, 그리고 그 꿈들에서연관점을 찾게 된다면.
무언가 추측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 한 번의 꿈. 어쩌면 내 환상이나 다름없을 그 꿈을 가지고 추측을 할 수는 없었다.
막막했다. 차라리 헤라 카르멘같은 빌런이 덤벼든다면 마음이 편할 터였다.
고작해야 기억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무려 부모와 관련된 기억이라니.
단서도, 그렇다고 추측을 해볼만한 일말의 무언가도 없는 이 상황이, 마치 처음 빙의됐을 때처럼 답답했다.
지직, 직-
전기가 흐르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혼자 이렇게 가는 것도 오랜만인가. 제논이랑 늘 함께 있었으니까.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감정은 느끼지도 못했을텐데.
나를 좋아해주고, 친애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요 몇 달은 그런 감정을 익히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제논.
지금은 여기 없는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렀어?”
“...깜짝아.”
이름을 불렀다고 진짜 나타나면 어떡하라는 건지, 하지만내 얼굴은 기쁨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혼자 다니면 위험해. 아무리 너라도.”
그렇게 말한 제논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잡으라는 듯, 내 앞에서 살살 흔드는 그 손을 바라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내가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생각에 손을 툭, 쳐내자 제논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설마 손 안잡아줬다고 그런건가? 무시하려 했지만, 그 우울한 특유의 표정이 마치 물에 젖은 강아지 같아서...
“...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환해지는 얼굴, 참. 저렇게 표정관리를 못해서야.
그냥 걱정만 될 따름이었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도 이런 얼굴을 보여줄까.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저 얼굴에 혹해서 다가가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텐데.
리디아한테 했던 걸 보면 어련히 잘 하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여자친구니까...이 정도 걱정은 해도 되겠지.
“아까 마이어씨한테 들었던 얘기, 아직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응.”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논에게까지 숨길 필요는없지. 프레이나 제논에게는, 속내를 털어낼 수 있었으니까.
“에전에...제전에서 쓰러졌을 때. 꿈을 꿨어.”
“꿈...?”
“응, 나는 폐허 속에 쓰러져 있었고. 혼자 그 곳을 막 돌아다녔지.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 무너진 건물 아래 깔린 사람이라면 있었지만. 이것저것을 막 얼리고...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람이나를 불렀을 때 딱 깼거든.”
“그 사람 얼굴은 봤고?”
“...내가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내 이름을 부르던 여자.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인걸까, 정말로...내 엄마라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폐허가 될 만큼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는데,
나를 낳고도 그런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그렇게나 멀쩡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면.
왜 한 번도 아이샤를 찾아오지 않은 걸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 전생에서는 후회로 얼룩진 기억만이 남은 것이 부모라는 단어였건만.
다시 그 이름을 듣자 감정이 벅차올랐다.
“내가 왜 이럴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탓일까,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않았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감정 탓에, 어느덧 목이 메여오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이렇지 않았을 텐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자, 제논이 다가왔다.
“아이샤.”
포옥,
머리에 커다란 손이 닿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이내 머리가 제논의 가슴팍에 닿았다.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었지만, 별로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뜨거웠던 머리가 식어가면서,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싱그러운 라벤더향, 늘 제논에게 나는 그 향을 맡으며.
그렇게 나는 제논에게 기댄 채 서있었다.
“힘들면, 나한테 기대. 부모님을 찾는 것쯤이야 내가 도와줘도 되잖아.”
“...어떻게 그래. 네가 할 것도 많은데.”
“괜찮다니까.”
이제 제논 앞에 닥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란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에드윈 카르멘에게 복수하려는 목표가 아직도 까마득한데, 그런 제논에게 부모님을 찾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기엔, 내 염치가 없었다.
그런 내마음을 아는 건지, 제논은 내 머리를 끌어안은 채 말을 이어갔다.
“부탁해도 돼. 고민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전부 털어놔도 돼. 새벽이던, 아침이던, 밤이던. 언제든지 들어줄게.”
“그래도 괜찮아?”
여전히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제논이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 친구잖아. 얼마든지.”
“...내가 남자 하나는 잘 만났나 보다.”
제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진심으로 너를 만나 다행이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