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3)
집으로 가는 길은, 오늘따라 유독 짧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집에 언제 도착하냐고 투덜거렸을텐데. 눈을 잠시 깜빡이는 새에 도착한 집을 바라보자 절로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집이네.”
“그러게.”
잡고 있던 손을 풀려는 건지, 손을 꼼지락 거리는 제논을 쏘아보며 힘을 꽉 주었다.
그러자 왜그러냐는 듯 제논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집 안가?”
“잠깐만 이러고 있어. 아직 심란해서 그래.”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우리 사귄 지 이제 1일 아닌가.
손잡는 거에 이렇게 익숙해지다니, 원래 다들 이런 건가 싶다.
하기야, 아직 익숙해진 건 아니지. 아직도 체온이 느껴지는, 이 살끼리 맞닿은 미묘한 감각에 흠칫 하고 놀라기 일쑤였으니.
나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 아직 서로가 연인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기에 하루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 서로에게 다가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거겠지.
마음을 확인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의 마음이 깨지지 않을 거란 확신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그저 혼자만의 마음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 쌍방이었으니, 애틋한 마음이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네 집도 한 번 가보고 싶네.”
“우리 집?”
“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잖아.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고 싶은데.”
주인공의 집이라, 일러스트로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으니 어찌보면 정말 금단의 구역이라 할 수 있었다.
몇몇 묘사로만 어떻게 생겼는지 겨우 추측할 뿐, 직접 보려면 정말 소설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제논의 대답을 기다리자니, 어쩐지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자 보인 것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도대체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길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
횡설수설하는 제논을 바라보며 피식 웃기도 잠시, 이제는 슬슬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붙잡아둘 수는 없지.
스르륵, 맞잡고 있던 손을 풀자 제논이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 가게?”
“응, 그러니까...”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제논을 등진 채 집을 향해 걷다가, 몸을 살짝 돌려 손을 흔들어보였다.
“내일 봐.”
“...그래.”
아쉬운 듯, 제논이순간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쉬운 마음을 자기만 가지는 게 아니란 걸 알아차린 걸까.
그래도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 보면 되는 거니까.
이렇게 헤어질 때면 늘 밝게 웃어주는 게 훨씬 좋았다.
오늘 하지 못한 것은 내일로, 그렇게 제논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갔다.
“후우...”
밝게 인사하며 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간 어지러운 게 아니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부모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렇게 반응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내 몸은 어째선지 그 단어에 심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이샤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게 몇 살부터지?
보통 사람들은 6살 때부터의 기억을 조금 씩 떠올릴 수 있다.
간혹 그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한들 4살이나 5살 때의 기억일 뿐, 그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꿈 속에서 보았던 모습은 아마 5살 정도의 어린아이.
키도 작고, 걷는 것도 버거워하는 어린 아이였다.
만약 꿈이 정말기억이고, 내가 꿈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 돌아보는 거라면.
정말로, 내 부모님이라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걸까.
꿈 속에서 본 여인에게서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똑 닮은 백금발이, 나를 바라보던 그 슬퍼보이는 붉은색의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다.
이능 폭주에 휩쓸려 죽었다면서, 어떻게 나랑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이 멀쩡히 있을 수 있던 걸까.
아무리 고민해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라도 한 번 더 꾸면 좋으련만.
“...그래, 더 생각하지 말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해봤자 풀리는 건 없었다.
머리만 더욱 아파올 뿐, 차라리 이럴 때는 머리 비우고 잠을 푹 자는 게 낫겠지.
씻으려고 화장실을 슬쩍 바라봤지만,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하루종일 고민에 빠져있던 뇌는 다급히 내게 잠을 요청했다.
지금 자지 않으면, 아마 내일 힘들 거라고. 협박조로 말하는 뇌에게 대답하듯, 나는 셔츠만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침대의 감촉이 몸을 파고들며, 나른한 감각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졸려-
그 말과 함께,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
[띵딩딩~굿모닝~띵딩딩~빠빠빠~]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창문에서 새어나온 빛이 눈을 강타했다.
벌써 아침인가, 내 기억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말고는 기억이 안나는데.
“...눈 부셔.”
잠긴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뚜두둑, 사람의 몸에서 날 법하지 않은 소리를 들으며,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맞이 한다.
꿈은 꾸지 않았다.
도대체 그 꿈을 꾸게 되는 조건이 뭐지?
한계까지 몰아쳐 싸워보는 것쯤은 몇 번이고 해봤다.
처음 헤라 카르멘과 싸울 때 그랬고, 한 3번을 싸웠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헤라 카르멘이랑 싸울 때마다 이능을 한계까지 썼던 것 같다.
그렇다면 꿈을 한 3번은 꿨겠지. 그렇다면 이건 아니겠고.
스타킹을 올리면서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봤지만, 그 가설을 검증할수록 생기는 것은 의문 뿐이었다.
도대체 꿈을 꾸는 이유가 뭘까. 왜 그때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어쩌면 단 한 번의 꿈일수도 있었지만, 내 감이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불안할 때면 늘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던 감.
다른 사람들은 육감이라 칭하는 이 감은 꿈이 단 한 번으로 끝나진 않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역시 그 것 밖에 없는데.”
3번 검을 뽑고 나서, 아마 그 꿈을 꿨었지.
4번 검을 뽑은 뒤에 그 꿈을 꾸지 않은 건 이상했지만 그건 감안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여신의 눈물을 이용한 도핑 상태, 그 도핑이 끝난 뒤로는 4번 검을 뽑지 못했으니까.
아마도 그 꿈을 꾸는 조건은 ‘3번 검 이상의 검을, 자력으로 뽑아낼 수 있을 것.’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월야와 태동을 뽑았을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마이어씨한테 한 번 가봐야겠네.”
생각해보면 어제 마이어씨한테 갔던이유가 이능을 한 번 실험해보려 했던 건데.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는 바람에 도망치듯 빠져나오고 말았다.
“여름 방학 전에는 4번 검까지 가고 싶은데.”
아마 힘들겠지. 이제 여름 방학이 코앞이었다.
한 10일 정도 남았을까, 여신의 눈물을 먹고 영구적인 효과가 남긴 했지만, 수라와 아련 사이의 차이는 아득했다.
마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벽’이라도 되는 것마냥.
하지만 분명히 그 벽을 넘어섰던 경험은 몸과 머릿속에 단단히 남아있었다.
열심히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문 밖을 나서자, 상상도 못했던 얼굴을 본 나머지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였다.
“...제논?”
“아, 이제 나오네. 기다리고 있었어.”
“어, 음. 내가 지금 이해가 안돼서 그러는데, 왜 네가 여기서 기다려.”
너 집 멀잖아, 그런 말을 덧붙이자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럼 안 돼?”
마치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아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제논을 바라보자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안 되는 건 아닌데, 분명 안 되는 건 아니지.
다만 걸리는 점은 제논의 집이 여기서 좀 멀다는 거고, 도대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설마 또 바보처럼 1시간 씩 기다리고 그러진 않았겠지.
한숨을 내쉬며, 제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될 게 어딨어. 가자, 바보야.”
“...응.”
그제서야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짓는 제논을 보자 다시금 입꼬리가 씰룩였다.
후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어씨를 만나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어제 그렇게 헤어졌는데, 오늘 제대로 눈이나 마주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탓할 생각이 없다는 걸 미리 말해둔 점이겠지.
“항상 이 시간에 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찰나, 제논이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가냐니, 왠지 대답해주면 항상 기다릴 것 같은데.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끄덕여줬다. 기다리지 않도록 조금 일찍 나오면 되겠지.
“그래? 알았어.”
기억해두겠다는 듯, 시간대를 중얼거리는 제논을 보며 피식 웃기도 잠시.
저 멀리서 얼핏 보이는 인영에 눈이 차갑게 식어갔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제논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여자.
“제논!”
마치 친한 친구라도, 아니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에 내 표정이 천천히 썩어들어갔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어느새 다가온 리디아는 제논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덥썩 잡으려 했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아마 손이 맞닿았겠지.
“...뭐해?”
염치도 없는 건지, 여자 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손을 잡으려 한 주제에 리디아는 고개를 들어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나는 리디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그저 솔직히 말해주면 되는 거니까.
눈이 둥글게 휘며 살가운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얼핏 보면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나는 입을 열었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