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4) (81/115)



〈 81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4)

내게 손목을 붙잡힌 리디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마치 화를 내려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이쯤 되면 어처구니가 사라지려 하는데, 화를 낼 쪽이 누군데 그 쪽이 그러는 건지.
그 뻔뻔한 행태에 미소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손으로 얼음을 얼리며, 어쩌면 그 얼음으로 저 머리를 후려칠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가늠하고 있을 때,
제논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내게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어?”

순간 당황해 제논을 바라봤지만, 제논은  쪽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처럼 당황한 리디아마저 완전히 지나치고 교문에 다다랐을 때야 제논은 빠르게 걷던 걸음을 멈춰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돌아본 제논의 얼굴은, 화가 난듯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잘못한  있나? 그런 생각에 살짝 고개를 숙이자, 제논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런 거에 일일이 반응 하지 마.”

저런 거라니, 리디아에 대한 얘기인가. 하지만 나도  말은 있었다.

멀쩡히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접근 하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래도 선을 넘잖...”
“난  말고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말란 소리야.”

그 말에, 순간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하는  까먹고 말았다.
분명히 준비된 대사가 있었고, 타이밍에 맞춰 내뱉으려 했는데.
무심한 표정으로 내뱉은 그 말에 다시금 사고회로가 불타고 말았다.

“어...그래.”

당장 보여줄 반응이라고는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논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걔는, 뭐라 해야 하지. 그냥 맘에  들어.”
“맘에 안 든다니?”
“그런 거에 이유가 어딨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냥 맘에 안 드는 것뿐이야.”
“...아.”

확실히, 그런 거라면 납득할 수 있지.
이번에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은 채, 그대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싫어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제논은 특히나 주인공이었다.
주인공들이 가지는  특유의 감이라면, 자신이 앞으로 향하는 데 방해나 위험이 되는 인물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골라내곤 했다.

하지만 리디아는 히로인인데. 순간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라질 대로 달라진 전개였다.헤라 카르멘이 지금 시점에서 잡힌 것도 이상한데,
리디아가 이렇게 낙인이 찍혀버린 것도 어쩌면 새로운 전개의 한 부분일 수도 있지.

“다음부터는 그냥 무시해. 나도 무시할 테니까.”
“알았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제논의 말에 대답하자, 만족스러운 듯 제논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얼굴에 홀로 박동하기 시작하는 심장을 조심스레 매만지기도 잠시,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이어씨를 만나야 돼.”
“마이어씨를?”

제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어제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으니, 하루 만에 다시 만나겠다고 하는 것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거겠지.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해주려 했지만, 제논의 말은 내 예상과 꽤나 달랐다.

“그래, 같이 가자.”
“어...물어 볼 건 없어? 대답해주려고했는데.”

그러자 제논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당연하지 않냐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다 말해줄 거라 믿어. 지금은 힘들잖아, 나중에 네 생각이 모두 정리되면.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되면 그  말해줘.”

그 때까지 사귀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덧붙인 제논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슴을 타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나는 이게 신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런 너에게 어떻게 헤어지자고 말할  있을까.

아마도 그런 날이 온다면, 내가 무언가에 세뇌당한 게 분명하겠지.

“그런 말은 하지 마.”
“알았어.”

그래도 헤어진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조금 괘씸했다.
이제 고작해야 이틀 째인데, 벌써 그런 말을 하면 부정 타기 십상이었다.

옆구리를 안 아프게 툭, 치자 제논은 알겠다며 쿡쿡 하고 웃었다.

“근데 프레이는 왜 마이어씨 동아리에 가입한 거지? 그냥 레이샤 교수님이라고만 알고 있잖아.”
“나야 모르지, 원래 있던 동아리도 꽤 괜찮아 보이던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어제 마이어씨를 찾아갔던 이유 중 하나가 프레이였다.
원래 있던 동아리를 탈퇴하면서까지 마이어씨 동아리에 들겠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해도 프레이는 단단히 결심한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프레이는 원작에서 없던 사람. 아니, 있었지만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친구였고, 언제나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도 되고, 동생도 되고.

완전히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건만, 그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 생각이 있겠지, 그렇게 중얼거려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괜찮을 거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제논을 바라보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갈까?"

"...그래."

프레이의 대한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내 이능으로 그 꿈을 다시   꾸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제논을 따라 마이어씨가 있는 담당실로 향했다.

#

치이익-

언제나 그렇듯, 늘 익숙한 소리였다. 담배의 끄트머리가 불꽃에 휩싸이며 타들어가는 소리.
예전에는 그리도 싫어했건만, 이제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불안할 정도였다.

니코틴이 아니라 이 소리에 중독되다니, 나도 참.

요즘 들어 생각할 게 많았다. 특히나 최근에 알게 되었던 정보,
아이샤의 부모에 대한 정보에 어느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밤잠마저 설친 채 서류를 확인했으니.

[샤론 이리안 / 아이크 이리안]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깨져 버린 생활 패턴에 눈가에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비춰졌다.
그래, 업보였다. 희망을 놓아버린 채, 그렇게 죽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의 업보였다.

희망을 품어봤을 법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자신은 쉽게포기하고 말았다.
이능이 폭주해서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도시.
사람의 잔재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없는 그 폐허를 발견했을 때, 미약하게나마 잡고 있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살아있을 리가 없다.

어느 샌가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그 생각을 굳건히 믿으면서, 그렇게 후회하며 살았다.

“...샤론.”

아이샤를 볼 때면, 어김없이 샤론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리 닮았는지, 처음에 봤을 때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왜 네가 살아있는 건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건만. 그게 학생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동아리를 만든 이유도 그랬다. 샤론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자기가 교수가 되면 동아리를 만들고 싶다- 였던가.
아이샤를 만난 순간부터, 별 생각 없던 동아리에 관심이 생겼다.

“이름도 어떻게 그렇게 지었는지.”

샤론과 아이크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것도, 맨날 둘이 하던 짓을 생각해보면 금방 짐작해낼 수 있었다.
임신해서, 배가 잔뜩 부른 상태에서도.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며 전투에 나섰던 그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아른 거렸다.

“...미안하다.”

  말고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일찍 포기해버려 미안하다고, 찾지 않아 미안했다고
.다만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30년 전, 그 날의 기억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드르륵-

상념을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익숙한 얼굴이었다.

“교수님.”
“...왔니.”

샤론과 닮은 아이, 아니. 이제는 샤론의 아이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볼 때마다 참 표정 관리를 힘들게 하는 아이였다.
솔직히 오늘 찾아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혹여 내게 무어라 탓할 생각인 건지, 조심스레 눈을 살피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굳은 결심이었다.
흔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말이 네게 나쁜 영향을 끼쳤더라면, 아마 계속 후회했을텐데.

“탓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제는...음. 죄송했어요.”
“괜찮아. 오히려 내가 사과하고 싶으니까.”

꽁초를 재떨이에 비비며 손을 들자, 아이샤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런 면은 아이크를 닮았군. 그렇게 담배 연기를 이능으로 지우며, 아이샤를 쳐다보자 굳게 닫힌 입이 천천히 열렸다.

“여신의 눈물로 강화된 이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게 다야?”

아닌 것 같은데. 눈매를 좁히며 아이샤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빨간 색의 눈동자에서 읽히는 것은 굳은 결심뿐이었다.
부모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결심한 건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샤론과 아이크가 살아있다는 것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그럴 때 아이샤가 상처받는 걸 원하진 않았다.

“...만약 제가 생각한게 맞으면, 알려드릴 게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샤가 내게 말했다.
알려줄 거라니,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관련된 얘기에요.”
“그거라면 내가 너보다 아는 게 많을 텐데.”
“...제가 어렸을 때의 일도 아세요?”

어렸을 때의 일이라, 무언가 떠올리기라도 한 건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아이샤를 바라봤지만, 아이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닮긴 했네.”
“네?”
“아니, 따라와. 내가 직접 확인해줄 테니까.”

네가 알고 있는 기억이 무엇인지, 나도 미칠 듯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만약 내가 도울  있는 거라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그게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할  있는,

최대한의 속죄일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