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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5) (82/115)



〈 82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5)

“그러고 보니까 네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는데.”
“네?”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아이샤를 바라보며, 며칠 전에 받았던 서류의 내용을 떠올렸다.
제전의 상품으로 받았던 여신의 눈물이 익히 알고 있던 효능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편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그 여신의 눈물은 아주 약화된 상태였다.

일시적으로 이능을 강화하는 건 맞았지만,  효과가 대폭 감락된 물건.
원래라면 고정적인 수치를 증가시켰다면 단지 잠재력을 이끌어주는 효과만 나타날뿐더러, 심지어 영구적인 효과를 주는 것은 아예 사라져 있었다.

“여신의 눈물로 생기는 영구적 강화는 아마 없을 거야.”
“...어, 분명 영구적인 강화도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라면 그랬겠지. 네가 받은 건 헤라 카르멘이 조작한 레플리카니까.”
“레플리카요?”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서포트 아이템에 문제가 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흔히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라도 받은 걸까.

생각해보면 헤라 카르멘과 투랄리온을 동시에 상대했다고 했지.
내가 알던 아이샤의 실력, 그러니까 제전 때의 그 실력을 생각해본다면...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의문이 일긴 했다.

이능 증폭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헤라 카르멘은, 제전과는 그 격차가 상당했으니.
아마 전력을 다해도 버티기조차 힘들었을텐데.

“...혹시 효과를 보기라도 한 거야?”
“네, 엄청 많이 봤는데요. 그래서 영구적인 효과만 확인해보려고 했던 건데...”

레플리카라니, 말도 안 돼.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샤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확인은 해봐야 알  같아요.”
“네가 그렇다면.”

 말과 함께, 나는 담당실 안에 있는 한 벽을 살짝 밀었다.
끼익- 콘크리트가 밀리는 소리 같지 않은,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한 새하얀 공간이었다.

벽부터 바닥까지 빈틈없이 하얀 타일이 깔려있는 공간, 아이샤는  것을 놀란  눈을 크게 뜬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 옆은 분명 교실일 텐데...!”
“내 이능이지, 일종의 환상 마법이야.”
“이 공간 전체가요?”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는 담당실이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전부 내 이능으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환상이었다. 범용성만 따진다면 아마 상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있지 않을까.

내 이능인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장 편하고, 가장 강력한 이능.
탑히어로라는 이명을 만들어낸 이능답게,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것쯤이야 손쉽게 만들 수 있었다.

“탑히어로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확실히.”
“이공간이라면 내가 운석 몇 개를 던져도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 놓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손을 들어 아이샤를 향해 까딱였다.
들어오라는 듯 까딱이는 두 손가락은 꽤나 도발적인 행위였기에, 아이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덤벼.”

곧바로 나를 향하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들을 바라보며,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쩌저적-

마이어씨는 강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심지어 운석  개를 던질 수 있다며 말하는 것에서 살짝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제논이 훈련할  부쉈던 그런 운석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운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도시 하나 쯤은 쉽사리 부술  있는 것이 마이어씨가 운용하는 ‘한 개’의 운석이었다.

들어오라는 듯, 빈틈을 전부 내비친 채 장난 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마이어씨였지만 그렇다한들 선뜻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원거리 견제부터 하겠다는 마음으로 공격해봤자 허공에서 전부 분쇄될 터, 그런 쓸데없는 탐색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이어씨와  격차는 그야말로 아득하다고 보는 게 맞겠지, 전력으로 부딪혀 속전속결을 유도하는 것이 훨씬 승산이 높아보였다.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다면, 여신의 눈물로 얻었던 강화효과가 없을 거라는 말.

하지만 나는 분명히 강화효과를 체감했었다. 순간 온 몸을 관통하며, 뇌에 짜릿함을 안겨주던 그 강렬한 힘을.
아련을 쳐다도 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아련을 뽑아낼  있게 만들었던 그 힘을 분명히 느꼈다.

그게 약화된 효과라니, 직접 체감한 입장에서 마이어씨의 말은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견제를 하려 얼음을 운용하는 지금 상황에서도, 분명히 향상된 이능을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많이 사용하면, 그만큼 발전한다고 했었나.
어느새  몸은 자연스럽게 이능을 다루고 있었다.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강하게.

효율은 최대한 뽑아내면서, 사용되는 정신력은 점점 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계속 발전한다면, 얼마 뒤에는 정신력 소모 없이 견제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미 월야를 뽑는 데에는, 정신력 소모를 하지 않았으니까.

약점을 파악해야 했다. 마이어씨가 자신을 이기라고 하진 않았으나,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려면 승리를 목표로 해야 했으니.
그래야만  전력을 온전히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

눈을 감은 채, 그녀를 오로지 적으로 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호의를 지우고, 적의를 그 자리에 덧댄다.
베고자  때 한 치의 망설임을 가지지 않도록, 얼음으로 그녀를 꿰뚫고자  때 한 치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이 것은 일종의 신뢰가 있기에 할 수 있는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공격하든, 그녀가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무장.
눈을 떴을 때, 이제 내 앞에 있는 것은 한 명의 빌런이었다.

쩌저적-

전력, 그 모든 것을 이끌어 내기 위해 필요한 첫 번 째 단계는 바로 영역이었다.
내 얼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오롯이  힘들이 한 대상에게 향하도록 길을 잡아주는 것.
나만의 공간, 내 얼음들의 효과가 증폭되는 공간.

몸을 타고 흘러나온 한기가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얀 타일들이 얼음으로 변해 하나둘 깨지기 시작하고, 차갑게 식은 대기가 얼어붙어 작은 눈꽃을 만들어내 떨어져 내렸다.
공기 중의 수분마저 얼어붙는. 안개만이 넘실대는 공간.

니플헤임.

마루더즈를 상대했던 저번과는 달랐다.
감정을 증폭시켜 한계를 뛰어넘어 만들어낸 불안정한 공간과는 달리,
이제는 온전히 내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기에 제한 시간도, 그 위력도  때보다 훨씬 위였다.

니플헤임의 범위는 도시 하나를 덮을 정도 였으니,  힘이 이 방 하나에 축약된 지금은 설령 마이어씨라 한들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자신의 발을 뒤덮은 얼음을 보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흥미롭다는  주변을 뒤덮은 얼음들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화르륵,

작은 불꽃이었다.
손바닥을 겨우 덮을 만큼이나, 어쩌면 이 공간을 전부 얼린 얼음과 비교했을 때 극히 미미하고, 사소한 불꽃이라 볼 수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늘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불꽃을 다루는 이가 레이 마이어라면.

쩌저적-

불꽃이 닿는 부위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용암을 부어도 녹지 않았어야 할 얼음이었건만, 여유로운 그녀의 손짓에 차가운 지옥이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창염.”

마이어씨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옆에 육망성이 그려진 원형의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리고 아무 전조도 없었으나. 그녀의 작은 손짓과 함께  원형의 그림들을 뚫고 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치솟았다.

마치 불사조처럼, 날개를 펼친 불꽃은 니플헤임을 단숨에 녹이며 공간을 메웠다.
허공을 감싸는 푸른색의 불꽃은 마치 물과 같았다. 빈틈을 찾아 그 곳을 녹이고, 다시 일렁이며 계속해서 솟구치는 얼음을 찾아 삼켰다.
얼음만을 노리는 불꽃, 그 열기는 일반적인 불꽃과 궤를 달리했다.

브루노조차 쉽게 녹이지 못했던 얼음이었다.
하물며 그 때보다 위력이 강해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녹일 수 있는 걸까.

격차가 아득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도 쉽게 녹는 얼음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한참 멀었다. 4번 검을 뽑아내고 잠시나마 우쭐했지만, 그보다도 강한 사람은 훨씬 많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겠다는 지금의 다짐은 그저 오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탑히어로의 전력으로 다루는 것도 아닌, 그저 일반적인 이능의 사용만으로도 쉽게 파훼되는 것이 내 이능이었다.

“아이샤...솔직히 믿기지가 않아. 도대체 제전 이후로 어떻게 이렇게 발전한 거지? 네가 겪은 일은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이능이 성장할 줄은...”
“...그래도 아직 한참 모자란 걸요.”

이제는 완전히 녹아내린 주변의 얼음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자, 마이어씨는 아니라는  고개를 저었다.

“제전에 비하면 거의 배로 성장했다고 할 만큼이나 이능의 위력이 올라갔어. 정말로...그 여신의 눈물이 효과가 있던 건가.”

마이어씨가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칭찬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능의 위력이 2배 상승했다느니, 활용이 전보다 뛰어나졌다느니 그런 말을 들어봤자. 결국 지금 벌어진  격차가 좁아지진 않을 테니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주변에 남아있는 얼음들을 거두었다.

“...여름방학까지 앞으로 며칠 남았죠?”
“딱 9일 남았지.”
“여름방학이 끝나면,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릴게요.”
“확인해볼 생각이 있다며, 확인  거니?”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4번 검은 아직 멀었다.
니플헤임을 전개하고, 아련을 뽑아내려는 순간 아직 힘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건 일종의 다짐이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아련을 뽑아내고, 그 꿈을 다시 꾸리라.

살짝 떨리는 주먹을 들어   채로,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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