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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6) (83/115)



〈 83화 〉알지 못했던 과거는 싫어(6)



꿈과 4번 검의 발현이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으나 추측이 아니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꿈과 내 이능의 연관점이.

생각해보면 내 이능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 이능이란 것이 이리 쉽게 성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능의 화력은 절대 총량을 지니고 있으며, 절대 총량을 넘어서게 됐을 때부터는  응용만으로 이능을 성장시켜야지 화력이 올라가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능은 계속 성장 중이야.”

처음 태동을 뽑았을 때와 지금의 태동의 위력이 엄청나게 차이 나는 것처럼,
 이능은 절대 총량 따위는 간단히 무시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성장 중이었다.
제논만 보더라도, 폭발의 힘은 그리 성장하지 않았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지 않은가.

폭발을 응축시킨다던지, 체내에 폭발 반응을 일으켜 신체능력을 향상시킨다던지.
그렇게 응용을 할 뿐 한 번 일으키는 폭발의 위력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번에 꾸었던 꿈은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점차 굳어져가고 있었다.

마치 내 이능이  꿈을 해금하는 열쇠 같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얼음 같이 무언가를 조형(造型)하는 것에 특화된 이능을 지닌 사람 중에서 나처럼 일정한 형태를 나눠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칼이면 칼, 둔기면 둔기.

이렇게 딱딱 나눠서 쓰지 1번부터 7번까지로 나누고, 심지어 거기서 경지까지 나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일단, 하던 것부터 마무리 해보자.”

복잡한 이 생각을 정리하려면, 먼저 아련을 뽑는  먼저겠지.
후우, 옅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지친 몸을 이끌어 반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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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돌아가자 제논이 기다렸다는 듯 물병을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더웠는데, 물병을 건네 받으며 살짝 웃자 제논이 입을 열었다.

“할만 해?”
“아니, 아직 한참 멀었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수님이 너무 쌔더라.”
“그럴 만 해. 나도 어렸을 때 엄청 당했으니까 대충 알지.”
“조금은 닿을 줄 알았는데, 생각한 것보다 차이가 심하더라.”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제논이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머리에 닿아 순간 흠칫하긴 했지만,
이내  감각이 꽤 맘에 든다는 것을 깨달아 그냥 쓰다듬게 두자 제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 지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여름 방학 전에는 끝내고 싶은데.”
“여름 방학에 뭐라도 있어?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하아, 아무것도 모르는 제논을 바라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학에 내가 아는 사건만 몇 개가 터지는데.
심지어 리디아나 다른 히로인들까지 생각해보면, 지금  과거에 대한 일은 명확하게 끝내 놓는 게 맞을 터였다.

하지만 미래의 일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 믿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설령 그게 제논이라 할지라도, 아마 그저 웃어넘기는 게 끝일 터였다.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고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말 대신 내뱉은 말이라곤, 내가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방학 때, 너랑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살짝 붉어진 볼을 긁적이며, 제논을 힐끔 바라보자 제논은 어째선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얼굴이 화난  같아 보여 이름을 살짝 부르자, 제논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줘.”
“뭐? 아, 아니. 말했잖아!”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다시 말해.
생각만해도 부끄러워 귀까지 전부 빨개졌음에도, 제논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못 들었어.”

들었잖아! 내심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도 얼굴이 진지한 탓에 말도 못하고 그저 우물쭈물거리며 입술만 달싹거릴 따름이었다.

“너, 너랑...하고 싶은 게 많아.”
“나도 그래.”

씨익, 그제서야 미소를 지은 제논은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으라는 듯,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방석을 두드리는 제논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방석은 또 언제 사온 거야.”
“의자가 차가워 보여서.”
“앉으면 따듯해지는데, 그리고 이제 여름이잖아.”
“그거 여름엔 시원하게도 쓸 수 있어. 이능으로 만든 거니까.”

뭐? 그 말에 나는 앉고 있던 방석을 들어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끝에 달린 태그를 확인했을 때, 내 눈이 큼지막해졌다.

“...야, 이거 너무 비싸잖아.”
“별로 비싸. 그리고  돈은 많아서.”
“돈이 많은  알았지만...”

제논이 가진 돈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카르멘가에서 내쳐졌다곤 했지만, 그래도 카르멘가였기에 최소한의 지원을 받았다고.
물론 그 돈을 자신의 힘으로 불려낸 것은 순전히 제논의 능력이었다.

빌런들 중에 현상수배가 걸린 사람들을 잡아내고, 그 돈으로 가상화폐를 굴려 돈을 번 제논의 자금은 솔직히 말해 어지간한 어른들도 평생 만져보기 힘든 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방석만 해도  백을 가볍게 호가하는 물건인데.
일반적인 공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내가 살았던 현실 세계보다도 훨씬 쌌지만,
이능으로 공정이 들어간 제품은 가격이 그야말로 부르는 대로 올라갔다.

나중에 돈 관리를 내가 해야 하나. 이렇게 쓰다간 아무리 히어로가 돈을 많이 번다한들 금방  쓸 것이 뻔했다.
그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제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지마.”
“싫어.”

뭐라고? 평소와는 달리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제논을 바라보자,제논이 능글맞게 미소지어보였다.

“쓸 거야, 흥청망청.”
“뭐라는 거야 갑자기.”
“파산할 때까지 써서,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런 제논을 의아하다는  쳐다보자 고개를 까딱, 하고 흔들던 제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게 싫으면 그냥 내가 사주는 건 받아줘. 어차피 너에게 주는 게 아니면 달리 쓸 곳도 없으니까.”
“...협박이야?”
“협박 맞아.”

그렇게 말하며 킬킬대는 제논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건지. 제논이 하는 말에 정신을 겨우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 몸이 휘청였다.

“그래서 나랑 하고 싶은  뭔데?”
“뭘 말하는 거야?”
“나랑 방학 때 하고 싶은 게 많다며.”

아차, 내가 했던 말을 다시 읊는 제논을 바라보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러니까, 그건 그런 뜻으로 한  아니었는데.
물론 방학을 아예 날려먹겠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너한테 일어날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는데.

눈을 빠르게 굴리며, 대답할 말을 빠르게 찾았다.
뭐라 말해야하지?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논이 이렇게 말하는  데이트 신청이라고 할  있었다.

저번처럼 둘이서 다니는, 이제는 연인 사이가 되어처음하게 되는 데이트.

그런 생각이 들자 이런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정말 별생각 없이 다니지 않았던가. 그냥  먹고, 오락실 좀 갔던 게 전부.
하지만 방학에는 몇몇 사건을 제외하면 아카데미를 다닐 때보다 훨씬 여유가 많았으니.
조금이나마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여름, 방학, 그리고 우리가 학생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그나마 가볼 곳은...

“바, 바다?”

역시 바다가 아니겠는가. 겨우 떠올린 장소를 언급하자, 제논은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다 좋지.”
“가봤어?”
“아니, 가본 적은 없어.”

뭐야 그게, 차게 식은 눈으로 제논을 바라보자 제논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스마트 워치를 조작했다.

그 위로 떠오르는 것은 수많은 바다, 검색 기능이 이렇게 좋았나 감탄하고 있을 무렵. 제논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색한 거 아니야.”
“응?”
“미리 찾아둔 거야. 너랑 가고 싶은 곳, 너랑 가면 좋을 것 같은 곳.”

그런 말을 그렇게 자연스레 내뱉어도 되는 걸까.
어쩐지 볼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제논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 갈래?”
“...일단 보자.”

하지만 제논이 건넨 그 목록을 보던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도대체 언제부터 계획을 짠 건지, 무려 검색 기록이 3월 달에 시작되는 게 아닌가.

“3월...”
“나는 그때부터 좋아했으니까.”
“...미안해.”

일찍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런 마음에 제논을 쳐다봤지만 제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10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어.”
“뭐야 그게.”
“그래서, 어디 갈지는 골랐어?”
“잠깐만, 이제 고르려고.”

 바다를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대에 부푼 제논의 눈동자를 보자 차마 안 고를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 목록들을 자세히 살폈다.
 세상에 바다가 이렇게 많았구나, 하고 감탄하는 찰나.  바다가 내 눈에 띄었다.

“여긴 특이하네. 왜 가로수가 이렇게 많지?”
“...가로수.”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풍광이 스쳐지나갔다.
정확히는, 꿈속의 내가 만들어냈던 모습. 수십 개의 가로수가 빼곡히 세워지고, 그 위를 파란 얼음이뒤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띄워진 새하얀 태양.

마치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내기라도  것 같은  바다의 사진을, 나는 멍하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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