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경쟁자는 싫어(3) (86/115)



〈 86화 〉경쟁자는 싫어(3)

3번 검, 수라는 어떻게 보면 꽤나 애매한 검으로 보일 수 있었다.
검이지만 일반적인 검과는 궤를 달리하는 형태. 길이가 늘어나고, 검신이 자유롭게 휘어진다.

사실 검이라기보다는 채찍과 가깝다고도 말할  있는 이 검은, 위력이나 속도나 상위호환이 존재했다.

한 번에 낼 수 있는 위력은 태동에 밀렸고, 그나마 자랑했던 속도는 아련에 비해 처참히 밀렸다.
하지만 수라만이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넓은 범위를 단숨에 벨  있는 능력이었다.
길이가 자유자재로 늘어나기 때문에,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범위의 참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

하여 지금 리디아를 상대하기 위해 뽑은 검이 바로 수라였다.

“큭...”

나를 감싸던 빛무리가 순식간에 베여 사라지자, 리디아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이능이 이렇게 쉽게 돌파되는 경험은 처음이겠지. 그녀가 성국에서 살던 시절,  어떤 이도 쉽사리 이능을 부수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빛은 언제나 고결했고, 또한 반짝였기에.

이렇게 파훼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나를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상처는 치료할  있잖아.”
“...알아!”

그녀의 가슴팍은 여전히 큰 상처가 남아있었다.
간단히 견제하기 위해 내질러본 건데, 이리 방어도 못하고 쉽게 몸을 내줄 줄이야.
그녀를 상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느끼는 감상이란, 그녀가 아직 한참 어리숙하다는 점이었다.

“이런 빛들은  위협할 수 없어. 말했을 텐데, 난 3학년 탑 수준이라고.”

실상은 그보다 높은 수준이었지만, 교수가 말한 내용을 다시 언급하며 비아냥거리자 리디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아직 전력을 다하진 않았을 터였다.
그녀가 사용하는 이능의 형태는 오히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제논과 함께 싸우는 히로인중의 하나였으니.

...물론, 이제는 그런 일이 생기도록 두진 않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싸늘해지자, 더욱 솟아오른 기세에 그녀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포기하려는 건가, 내심 그런생각도 해봤지만. 이윽고 그녀가 외친 어떤 단어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클립스.”

마이어씨의 마법처럼, 리디아의 가호는 일정한 시동어에 따라  형태가 자유자제로 변했다.
예를 들어 처음 그녀가 외쳤던 ‘벤젼스’는 광역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면,
이번에 그녀가 말한 이클립스는 한명을 타격하는데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 퍼져있던 빛무리가 하늘로 오르고, 이내 태양을 연상시키는 광구에 하나로 응집되었다.
찬란한 광원, 주변의 색을 전부 하얀색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압도적인 풍경에 학생들은 하나같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런 게 이능이라고? 이건 거의 마법이잖아.”
“광역 공격만 특화된 게 아니라니...”

그래, 내가 생각해도 리디아의 지금 수준은 일반적인 학생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만약 원작의 아이샤가 지금의 리디아와 맞붙었더라면, 아마 지는 쪽은 아이샤였겠지.
그야말로 성녀로 불리며, 나중에는 영웅으로 불리는 이의 능력이라 할만했다.

그녀의 빛은 고고했다. 모든 것을 아래에 두며, 어둠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탐욕을 보였다.
자신 아래에 있는 모든 어둠을 자신이 빼앗으려 들고, 그러면서도 빛을 거머쥐려 했다.

그것을 만들어낸 리디아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듯이.

지잉-

순식간에, 어쩌면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의 빛이 내 몸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발이 아닌, 수 십여 개의 빛. 빛이 쏟아지는 순간에 떠올린 것은, 눈을 감는 것이었다.

“...피하고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옅게 웃었다.
수라를 뽑은 상태에서는  신체능력이 활성화 된다.
그것이 월야나 태동일지라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역시 3번 검인 만큼 그 효과가 가장 괜찮았기에.

지금  몸이 지닌 감각은 마치 동물과도 같았다.
눈으로 보고 피하기보다는, 몸으로 느끼고 피한다.

찰나의 속도를 가뿐히 뛰어넘는 투사채, 그것을 보고 피한다는 것은 증강계 이능을 지닌 사람도 꽤나 힘들 테니까.
한 걸음,  걸음. 피할  없는 빛무리는 검으로 가르며 최대한 앞으로 나아간다.
빛이 떨어지는 소리를, 광채가 내뿜는 열기를, 순간이나마 번쩍이는  빛의 강렬함을 단서로.

빛으로 만들어진 포위진을 뚫고 나가는 순간순간이 위태로웠으나, 그 순간순간이 나를 성장시켰다.
지금보다 더욱 빠른 행동을, 시냅스를 타고 흐르는 뉴런들이 그 의사를 전달하며 뇌에 모든 감각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능이란, 뇌에서 그 근원이 만들어지는 것.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또는 그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성장을 거듭했다.
절대 총량이라는 것은 그 뇌가 버틸 수 있는 성장선을 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절대 총량은 이미 무한대에 가까웠기에-

다시 한 번, 수라를 사용하던  몸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라보다 더욱 빠른 속도,  응집된 빛이 일으키는 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위력의 검.

“4번 검.”

손에 쥔 얼음이 산산히 부서지고, 그 파편이 주변으로 흩어지자 리디아의 눈에 순간 광채가 일었다.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걸까. 응집된 빛이 순식간에 줄어들며, 이내 하나의 거대한 창으로 변했다.

궁그닐.

아마도 리디아가 사용했던 가장 강력한 공격기중 하나였던가.
모든 힘을 하나로 집약하여 오로지 일점만을 돌파하는 기술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흩어졌던 얼음을 다시 손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나마 닿았던 경지였기 때문에 다시 올라가는 것은 그리어렵지 않았다.
투랄리온을, 그리고 헤라 카르멘을 앞에 두었던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 초라하고 비루한 검을 다시금 뽑아낸다.

아련.

한없이 얇은 검이었다. 볼품없고, 손잡이는 부서져있으며, 검신은 무엇을 찌르거나 베기엔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검보다도 초라한 검.

그 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어떤 이의 앞에서도 한결 같았다.

방심, 방만, 그리고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드는, 착각.

리디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검은 눈동자가 오만에 물들며, 그녀는 다시금 자신이 승리하여 나를 짓밟는 미래를 상상하는  했다.

“3학년 탑? 정말 웃겨 아이샤. 고작 그 정도로, 3학년 탑을 논하다니.”
“...그래,  말이 맞아. 나는 3학년 탑이라 하긴 조금 그렇지.”
“조금? 아니, 한참 모자라!”

모자라다니, 그 말을 들은  입꼬리가 비뚜름해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궁그닐이 공중에서 넘실거리며, 이윽고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응축된 빛에서 쏟아졌던 빛무리들보다는 느린 속도, 허나 사람 수십 명이 합쳐진 듯  그 압도적인 크기는, 보는 이를 위축시키게 하기 충분한 크기였다.

손에 쥐어져 있는 아련을 본 내 얼굴의 표정은 미묘했다.
이제는 완전히 이 힘에 닿았다는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있었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얇은 검이 그리 강대한 힘을 지녔다는 게, 솔직히 믿겨지지 않기도 했으니까.

허나 내 힘이었고, 내가 만들어낸 검이었다.

알고 있지 않은가.  검이 만들어낸 광경을, 이 검이 지닌 힘을.
한없이 초라하기에,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기억에 쉬이 남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도 모르게 눈에 담겨져, 기억 한 켠에 숨어있던 사소한 추억처럼.

하지만 그 추억이, 때때로  어떤 기억보다도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아련하게.

검은 가벼웠고, 그 것이 그려내는 선조차 조잡했다. 궁그닐이 일으키는 풍압에 이리저리 흔들려, 단단히 잡고 있는 자세에도 검은 종잇장처럼 휘날렸다.

리디아의 입에서 그려지는 조소, 나를 보며 걱정하는 수많은 학생들.

마침내 궁그닐이  앞에 도달했을 때,  멀리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걱정해주는 걸까. 물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궁그닐을 다시 보았을 때, 왠지 저 창이 너무도 초라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를 이기려고, 온 힘을 다해 내게 쏘아 보냈을 공격일 텐데도.

"한참 모자르지, 3학년 탑이."

이미 몇번이고 꺾어왔던 상대였으니까.

기기긱-

내 코앞까지 다가온 창은, 이내 순식간에 공중에서 흩날렸다.
마치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휘날리는 빛들을 발견한 리디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보이지 않았겠지. 당연했다.

보이지 않는 검격, 마치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낄 새조차 없이 충격을 전하는 아련한 감정처럼, 4번 검이란 그런 검이었으니까.

쩌저적-

빛이 산란하던 공간이 부서진다.
보이지 않는 선이 공간을 가득 메우며, 이윽고 주변을 감싸던 빛무리들을 무참히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스윽-

아련을 거두자, 리디아는 그 자리에 선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깨져버린 가호, 사라진 빛. 부서진 대련장에서 서있는 그녀 또한 그리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으니.

“할 말이라도 있어?”

내가 묻자,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할 말 많겠지. 그녀의 입장에선 나정도 수준의 학생을 만나본 적도 없었으니까.

서걱-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입을 벌린 채, 내게  번 더 베여진 몸을 허망히 바라보며 쓰러질 뿐이었다.

“아...”

이걸로 제논에 대한 생각도 접었으면 좋으련만.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