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경쟁자는 싫어(4)
사방은 고요했다. 마치 방금까지의 싸움이 나 혼자 겪었던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샤!”
프레이가 소리치며 내 품에 안겼다.
꼬옥, 하고 파고들어 기어코 머리를 내민 프레이의 표정은, 꽤 화가 난 듯 보였다.
내가 무리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아련을 뽑은 그 시점부터 이미 무리랄 것도 없었다.
가벼운 검처럼, 리디아도 한 없이 가벼운 상대였으니까.
나를 밑도 끝도 없이 찔러대는 더듬이를 살짝 쥐며, 프레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그냥 대련이잖아.”
“깜짝 놀랐어. 그나저나 리디아가 저렇게 강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성국 수준이 그렇게 높았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쓰려져 있는 리디아를 바라보는 프레이에게 나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성녀라는 건 나만 알고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대단하군.”
그렇게 프레이를 안심시키고 있을 때 다가온 것은, 이 대련이라는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였다
. 매끈한 머리를 매만지며, 팽팽한 근육으로 터질 것만 같은 단추를 조심스레 풀어헤친 그가 입을 열었다.
“주술식이라도 새긴 건가?”
“네?”
“어떻게 17살이라는 나이에 그런 힘을...에드윈 카르멘도 이렇진 않았을 거다.”
내 눈을 유심히 쳐다보는 그에게선 딱히 적개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부담스러울 만큼이나 가득 담긴 호기심에, 살짝 움찔 했을 뿐.
살짝 험상궂게 생기긴 했지만 그는 이래저래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저번에 마루더즈가 습격했을 때, 간부들을 상대하던 것이 바로 이 교수였으니.
나또한 그에게 어느정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나저나 주술식이라뇨. 그런 걸 대체 왜 새겨요.”
주술식이란 힘을 손쉽게 증폭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만큼 꽤 위협적인 대가가 따랐다.
주술식을 새기는 순간 소모되는 것은 정해진 수명의 절반, 거기에 평생 동안 따르는 간헐적인 고통까지.
정말 힘이 간절하지 않은 이상 구태여 새길 필요가 없었다.
나나 제논이나, 둘 다 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런 걸 고려할 필요도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치자, 대머리의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디아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혼절만 시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깊게 베진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힘이 전부 빠질 때까지만 상대했으니까요.”
“저 정도의 이능을 가진 학생을 봐주면서 상대한 건가.”
“...수준 차이가 나긴 하니까요.”
봐주지 않았으면, 한 합에 기절 시킬 수도 있었다.
수라가 아니라 태동을 꺼냈으면 그녀가 가호를 전개하기도 전에 이 대련장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까 아련을 뽑아내었던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뽑았던 아련, 그 검이 보여주었던 힘은 분명 아련이 가진 성질 중 하나가 분명했다.
보이지 않는 참격, 그리고 인간의 반응속도를 뛰어넘는 공격 속도.
하지만, 어째서 완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걸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꺼내든 것이 아련이 아닌, 아련과 비슷한 무언가인 것처럼.
월야를, 태동을, 수라를 뽑았을 때처럼 성취감이 느껴진다기보다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만 같은 불쾌함이 가득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그런 불완전한 성취. 내가 뽑아낸 것은 그렇다면 아련이 아니라 그 편린이었던 걸까.
“...거의 다 왔다고는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지?”
“아, 아니에요. 그냥.”
“그런 실력을 지니고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아무튼 수업이 끝나면 내 담당실로 와줄 수 있나?
담당실?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교수는 웃으며 걱정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너를 혼내려 하거나, 무어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 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누구길래...”
“뭐, 가보면 알 거다. 여기서 말하기엔 조금 유명한 사람이니까. 꼭 수업 끝나고 안와도 되고, 편할 때 와도 돼.”
“알겠습니다.”
할 말을 모두 마쳤는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교수가 사라지자 프레이가 스윽 나타나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얘기 한 거야?”
“모르겠어, 수업 끝나면 담당실로 오라는데.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흠, 소개해줄 사람이라. 그나저나 아이샤, 왜 이렇게 멋있어!”
“머, 멋있다니.”
더듬이를 쫑긋거리며 나를 끌어안는 프레이가 소리치자, 괜스레 부끄러워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멋지다니, 그냥 싸우기만 한건데.
오늘 대련 내용이 막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아련을 뽑아냈지만 무언가 완벽하게 뽑아낸 것 같지도 않아서 거슬리고...
하지만 프레이는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며, 시종일관 내 옆을 따라다니며 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싸울 때 내 표정이 얼마나 도도했는지, 리디아한테 무어라 말할 때는 얼마나 차가웠는지, 검을 뽑고 싸울 때는 또 얼마나-
“그만해...부끄러워 프레이.”
듣다못해 프레이의 입을 막자, 프레이가 읍읍 거리더니 손을 떼니 그제서야 헤헤, 하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아이샤, 아까 리디아한테 뭐라고 한 거야? 멀어서 잘 안들렸거든.”
“...싫다고 했어.”
“응?”
“걔가 나 싫다길래, 나도 싫다고 했어.”
내가 리디아를 좋아할 이유가 있긴 할까. 리디아가 내 앞에서 했던 행동들을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그 도를 넘는 것들뿐이었다.
제논과 있는데 끼어들거나, 대놓고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행동하는 제논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렇고, 하나같이 좋게 볼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잘했어. 근데 걔는 네가 왜 싫대?”
“몰라, 알 생각도 없어.”
걔가 날 왜 싫어하는 지 알 이유가 뭐람. 그냥 차라리 이대로 성국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이번 대련에서 밟아둔 게 그런 이유가 없잖아 있긴 한데. 뭐, 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겠지.
리디아가 품고 있는 욕망이란 생각보다 훨씬 질척거리는 그런 종류였으니.
“일단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먼저 교실로 돌아가 있도록.”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그렇게 흩어지고, 나도 프레이와 함께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련장도 그렇게 부서졌고, 리디아도 치료해야 했으니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겠지.
그렇게 교실로 돌아가자, 의외의 얼굴이 보여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제논.”
대련할 때 왜 안 왔나 했더니, 교실에서 있던 거구나.
하지만 제논은 나를 보며쓰게 웃을 뿐, 이전처럼 반갑게 맞이해주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제논은 그제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별 일 없으니까, 그렇게 얼굴 찡그리지 마.”
“별 일 있어 보이는데.”
제논이 이렇게 쓴 웃음을 지을 때면, 늘 말하지 못할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도대체 내가 잠들고 일어나서 대련까지 하고 온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가 묻자, 제논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진짜 별 일 없었어. 그냥 개인적인 일이라. 나중에 해결되면 말 할게.”
“개인적인 일?”
카르멘가와 관련된 일일까. 그렇다면 나한테 말하기 곤란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벌써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니, 연인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가 깨지는 것이 어디 한둘이던가.
연애를 경험해본 적은 없었지만, 사귄 뒤로 이런저런 서적을 찾아본 탓에 이론 쪽은 꽤 빠삭한 편이었다.
“...나중에 말해줘.”
내가 제논을 힐끔 바라보며 말하자, 제논은 피식 웃더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당연하지.”
“그래, 내가 믿어줘야지.”
“고마워. 믿어줘서.”
어쩐지 간질거리는 볼을 슬쩍 매만지자, 제논이 입을 열었다.
“대련 수업에서 리디아랑 싸웠다며, 다치진 않았어?”
“응, 당연히 안 다쳤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휘젓자, 제논이 살짝 웃으며나를 쳐다봤다.
다친 곳이 없나 이리저리 살피는 건가. 그 모습이 꼭 주인을 보는 강아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제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제논도 쓰다듬었으니까, 음.
제논의 머리는 어째선지 조금 젖어있었다. 땀에 젖은 듯, 물기가 느껴지는 손을 살짝 바라보자, 제논이 슬쩍 머리를 뒤로 당기며 내 손을 자기 옷으로 닦았다.
“아, 땀 흘렸는데. 미안해.”
“뭐, 땀 흘렸을 수도 있지. 나는 머리카락 안 젖었어?”
리디아랑 싸우면서 혹시 땀을 흘렸을까, 그런 걱정에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지만 다행히 젖어있진 않았다.
내 이능이 얼음이라 다행인 걸까, 만약 불이었으면 땀에 젖었을지도 모르니.
“...아무튼. 그, 성국에서 온 여자애랑 싸운 거야?”
“싸웠다기보다는 대련이었지.”
“너는 대련 안하잖아. 걔가 싸움을 걸었겠지.”
“...뭐, 그렇긴 해.”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제논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일일이 싸워주지 마.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안 다쳐. 애초에 그런 걸로...”
“아이샤.”
제논의 괜한 걱정에 손을 휘저으며 별 대수도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제논의 목소리에 순간 입이 꾹 닫혔다.
화가 난 걸까. 평소와는 달리 무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 거리며 제논의눈치를 살폈다.
일부러 싸운 건 아닌데, 그러니까 걔가 하는 짓이 워낙 맘에 안 드니까.
“화났어?”
“응.”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갑작스레 내 볼을 붙잡은 제논에 의해 얼굴이 휙, 하고 올라갔다.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너한테 싸움을 건 걔한테 화가 난 거지.”
“리디아한테?”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 지 알아.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하는 제논의 표정은, 어느새 화가 다 풀린 건지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 하나일테니까. 알았지?”
“...응.”
몽환적인, 순간 홀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짓는 제논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고개만 멍하니 끄덕이는 것뿐이었다.